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409. 왕의 남자(2005)- 남자를 뺏긴 남자의 이야기
상태바
409. 왕의 남자(2005)- 남자를 뺏긴 남자의 이야기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3.03.01 14: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약뉴스]

기원전 사람 호라티우스는 웃음으로 진실을 말하려는데 이를 어찌 막을 수 있느냐고 글로써 마음껏 세상을 웃겼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신을 조롱하고도 살아남았다.

최고 권위의 황제와 교황과 교회와 추기경을 능욕하고도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은 풍자와 해학에 대한 이해가 당시 사회에도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이 이를 용인한 것은 마음이 넓어서라기보다는 그렇게해서라도 백성들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혁명으로 뒤집어 지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잠시 조롱보다 오래동안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 서양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도 이런 풍자는 때에 따라서 간혹 용인됐다. 양반 귀족이 모른 척 눈감아 줬다.

특히 미천한 상놈들이 펼치는 광대극에서 자신들이 비웃음 거리로 전락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러 외면했다. 괘씸해도 웃음으로 진실을 말하는데 막기보다는 슬쩍 자리를 떠나 민초들의 한과 설움을 그런 식으로라도 풀어줬다.

그러나 이런 풍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어중간하게 떠들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하루를 부지하기 어렵다. 장돌뱅이처럼 떠돌이 광대 패 장생(감우성)은 그것을 잘한다.

뱃심도 두둑하고 의협심도 강하고 무엇보다 춤과 노래가 일품이다. 부채를 들고 줄타기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에게는 친구이며 동료이며 연인이라고 해도 좋을 공길(이준기)이 항상 껌딱지처럼 붙어 다닌다.

그들이 모이면 장판은 한바탕 난리 부르스다. 동전이 수북이 쌓이고 그날은 푸짐한 먹거리가 한상 대령이다. 오늘만 같은 내일이 기다려 지는 이유다. 그러나 시골 장터만 돌기에는 장생은 그릇이 제법 크다.

큰 판을 벌이고 싶다. 마침 그럴만한 사건도 일어났으니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핑곗김에 한양으로 간다. 어디 가나 터줏대감이 있듯이 한양에는 이미 자리 잡은 패거리들이 있다.

그들이 기득권을 주장할 것은 뻔하다. 양반이든 상놈이든 거지든 모든 인간은 기득권 빼면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실력으로 간단하게 육갑이(유해진) 패를 제압하고 장생과 공길은 장안에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소문은 궁에도 퍼지고 왕실의 처선(장항선)에게도 그들의 실력이 귀에 들어간다. 임금( 정진영)을 웃길 절호의 찬스가 찾아온다. 그러나 간댕이가 커지면 그만큼 위험도 커지는 법. 의금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다.

▲ 연산역의 정진영과 공길역의 이준기 연기자 볼만하다.
▲ 연산역의 정진영과 공길역의 이준기 연기자 볼만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왕실 관계자에게 왕을 웃겨보겠다고 ,왕이 웃으면 그것은 희롱이 아닌 것 아니냐면서 궁에서 한판 놀이를 제의한다. 천한 기생 녹수도 붙어먹는데 자신들이 못할 게 뭐냐고 해보자고 으스댄다.

유생과 원로대신의 상소에 시달리는 왕을 위해 처선은 분위기 전환으로 그들을 궁으로 끌어들인다. 실전은 연습과 달라 장생패는 초반에 고전한다. 제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천한 것들이 어느 안전 앞이라고 제대로 연기를 펼칠까.

왕을 웃기기는커녕 얼어붙어 벌벌 기는 것들이 어디서 저런 무지렁이들이 왔나 싶다. 그때 공길이 구세주처럼 등장하고 왕은 참았던 웃음을 터드린다.

내 저놈들을 궁 가까이 두고 틈나는대로 불러 주마.

그날로 장생패는 궁의 한켠에서 먹고 자고 그야말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다. 그러나 웃음이 흔하면 울음이 있기 마련. 영화도 제법 중반전에 접어들었으니 뭔가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야 할 시점이다.

매번 줄만 타서는 왕은커녕 관객들도 자리를 뜰 판이다. 풍자는 도를 넘고 급기야 매관매직을 일삼던 대신이 죽는 상황까지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늘 마음속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던 연산은 드디어 폭발한다.

이제 대신들의 목숨은 파리채 앞의 파리에 불과하다. 판만 벌였다하면 죽어나가니 광대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한바탕 피 잔치를 벌인 왕에게는 다독여줄 장녹수( 강성연)가 있다.

그녀는 치마폭을 들춰 그를 숨겨 주면서 우리 아기 젖 많이 먹어라, 하면서 피비린내를 닦아 주지만 연산은 이제 여자라면 어지간히 싫증이 날 때도 됐다.

그가 노린 것은 바로 공길. 그는 공연이 끝나고 난 후에도 광대들의 처서로 돌아오지 않는다. 광대의 남자였다가 이제는 왕의 남자가 된 것이다.

광대들이야 왕의 남자로 벼슬까지 받는 공길이 부러울 따름이다. 불러 주지 않는 왕이 야속하지만 장생만은 심히 불쾌하다.( 녹수의 불만도 이만저만한 것은 아니다. 사내놈이 계집만큼 고운 피부를 가진 공길을 모함으로 위기에 빠트린다.)

왕에게 공길을 뺏긴 장생의 사랑과 분노는 질투를 타고 넘어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대신들도 호시탐탐 기회를 였본다. 눈치라면 산전수전 다 겪고 그 자리에 올랐는데 천한 상놈 광대들에게 놀아나고 있으니 두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짜낸 꾀가 사냥을 좋아하는 연산에게 사냥놀이나 나가자고 꼬드긴 것. 동물로 변신한 광대들이 사냥감이다. 화살은 맞아도 죽지 않는 것으로 했으니 그야말로 사냥놀이다.

그런데 어떤 화살은 맞으면 죽는 진짜 화살이다. 구석으로 몰린 장생과 공길은 그제서야 대신들의 계획을 눈치챈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장생은 감히 왕에게 대든다. 이판사판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장생은 이제 앞을 못 보는 장님이다. 그들이 놀이로 써먹던 진짜 '소경'이 된 것이다. 그를 보는 공길의 애처로움. 그들은 마지막 광대극을 펼치는데.

경극, 가면, 인형 놀이, 걸쭉한 음담과 욕설, 비방서 대필 등 흥미진진한 화면이 보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국가: 한국

감독: 이준익

출연: 감우성, 이준익, 정진영, 강성연

평점:

: 영화만 보면 연산은 폭군 그 자체다. 장녹수는 그런 연산을 있게 만든 장본인이다. 대신들은 마침내 이들을 끌어 내리는데 성공했다. 중종반정이다.

성공한 구테타는 역사를 마음대로 주무르기 마련이다. 해서 연산은 기대 이상으로 폭군이 됐고 녹수 역시 기대 이상으로 마녀가 됐다. 조선 제일의 폭군과 그에 버금가는 마녀는 영화 소재로 더없이 좋다.

이제 수 백년이 지났으니 후손이나 그 누구로부터도 위협을 받을 일도 없다. 이준익 감독은 오래된 역사를 현대극으로 소화해 한국 영화사를 새로 썼다.

남자대 남자의 이야기. 공길을 향한 장생의 애틋함이 영화를 관통하는 힘이다. 밥만 나오면 뭐든지 다 파느냐고 따지지만 공길의 속사정을 장생이라도 다 알기는 어렵다.

지금이야 성소수자 인권이 거론되고 동성도 부부로 인정되는 세상이지만 영화가 나온 당시만 해도 왕의 여자는 몰라도 왕의 남자는 일러도 한참 일렀다.

그것이 관객이나 평단의 관심을 끌었다. 좋은 연기를 펼친 감우성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나면 좋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