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3-29 13:17 (금)
길고 긴 삼월의 하늘이 저물고 있었다
상태바
길고 긴 삼월의 하늘이 저물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28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차역에서 내린 여순은 봉숭아를 보았다. 흙먼지 틈에서 자란 아직 피지 않은 줄기와 무성한 잎이었다. 어디서건 그것은 눈에 띄었다. 해마다 그 시절이면 죽마을 돌담 아래서 피어나곤 했다. 소학교 뜰에도 그곳으로 가는 황토배기 언덕에도 남의 집 대문 앞에도 아무대서나 자랐다. 

손을 들어 여순은 손톱을 보았다. 올해도 이곳에 분홍빛 도는 물을 들일 수 있을지 여순은 착잡했다. 돈을 벌러 간다는 마음에 들떴으나 막상 낯설고 물설은 곳에 오니 가슴이 저도 모르게 벌렁거렸다.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작은 바람에 코 끝이 시렸다. 덜컥 무서움에 눈물이 나려했으나 억지로 꾹 참았다. 광장을 돌아 나온 바람이 또 옷 틈새로 스며들었다. 흙먼지가 일면서 춥다는 느낌이 들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구나. 여순은 가슴에 안은 보자기를 끌어당겼다. 먼저 내린 점례가 뒤를 돌아보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자신처럼 보자기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여순이 저것 보라고 눈짓했다.

점례도 봉숭아를 보았다. 두 사람은 말 대신을 막 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한 봉숭아를 곁눈질하면서 인솔자가 이끄는 대로 광장의 한구석에 모였다. 시끄러웠다. 대열은 흐트러졌고 호각 소리가 요란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본 적이 없었다. 모두 자기 또래의 처녀애들이었다. 족히 백 명은 넘어 보이는 소녀들이 서로 비슷한 차림새로 같은 놀라움과 비슷한 두려움을 안고 손에 쥔 것을 세게 움켜쥐면서 이리저리 밀려다녔다.

누군가 나서서 제지하지 않으면 날이 새도록 인파는 그 상태로 물결처럼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할 것이다. 밀려다니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다시 호각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크고 부는 간격이 짧았다.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신호를 주고 받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순은 사람보다 군인이 더 많다고 느꼈다. 그때 저쪽에서 행군해 오는 무리 들이 지르는 군가 소리가 크게 들렸다. 놀란 가슴이 더 크게 뛰었다. 박자를 맞추면서 한꺼번에 불러대는 크고 낯선 목소리의 군가는 낯설었다. 경성에 가면 코 베어 먹어도 모른다는 말이 실감났다. 점례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죽마을과는 달리 모든 것이 어수선했다. 이리 저리 밀리고 혼란한 상황에 기차 멀미는 사그러들었다. 좁은 기차를 벗어난 광장은 그런 기회를 주기도 했다. 대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둘은 서로 손을 꼭 잡았다. 우리 떨어지지 말자. 그리고 돈 많이 벌어서 담에 꼭 다시 만나자. 그러기 위해 많을 것을 참아내야 한다. 어떤 힘든 것도 이겨내자. 여순과 점례는 다짐했다. 그래 꼭 그러자. 그런 다짐은 시끄러운 소음과 인파 속에서 어리둥절해 있는 소녀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한 일 년만 고생하면 논을 살 수 있다. 어서 가. 자꾸 뒤돌아 보아도 가지 않고 손을 흔들고 있는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어머니는 우느라고 그러는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손에 갔다 댔다. 논을 사야 부자가 되지. 그래 논이면 다 되는 거야. 논이라면 못할 짓이 뭐가 있겠어. 

여순아, 일 년 후에는 우리 서로 부자가 되는 거야. 논과 일 년의 고생을 맞바꿀 수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것은 없었다. 30년을 일해도 안 되는 일을 일 년 만에 해치운다면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두 사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자리를 주선한 완용이 고맙기까지 했다. 아무나 일본 가는 거 아냐. 완용이 크게 선심을 썼다는 듯이 말했다. 순사가 가고 저녁에 온 순사 부하 완용은 느글 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느그들 돈 벌어 오면 한 턱 크게 써라. 오빠 잊으면 안 된다. 

옆에 있던 휴의가 그건 그 때 가서 일이지. 돈 많이 싸가지고 온다면 말이지.너는 항상 부정적이더라. 완용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한 턱은 돈이 있은 다음 일이라고. 휴의도 지지 않고 받았어. 알았다고. 완용이 목소리를 높였다. 점례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난 오빠들 믿어, 죽마을은 두 오빠들에게 맡기고 우린 떠날께. 그래 그까짓 한 턱이 문제야. 논 사면 쌀가머니 이고 갈게. 여순이 말했다.

맡겨도 되는 거지. 그런 거지? 여순이 웃었다.  그 웃음은 어딘가 가벼운데가 있었다. 실제로 믿는다는 말이 아닌 바람처럼 스쳐가는 그런 말이었다. 여순은 그 웃음을 다시 지어보이기 위해 입술을 억지로 양옆으로 벌렸다. 

그때 확성기의 소음이 크게 울렸다. 한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소녀들 앞에 키가 크고 마른 군인 하나가 미리 준비된 단상으로 급히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양손을 책상에 집은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지휘봉으로 인파를 반으로 갈랐다. 양쪽으로 갈라서. 그래, 아니 너는 이쪽으로. 됐어. 너도. 대충 정열이 되자 그 사이로 군인들이 들어섰다. 그것이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기준이 됐다. 정열이 되자 단상의 군인이 확성기를 입에 갔다 댔다. 그러나 확성기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떠드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확성기를 옆으로 치우고 몸을 숙이고 지휘봉으로 바로 아래에 있는 군인을 툭툭 치면서 양쪽의 숫자를 정확하게 맞추도록 지시했다. 숫자를 맞춰. 여순과 점례는 서로 같은 줄에 있었으나 군인이 지나가면서 서로 떨어졌다. 여순이 점례 쪽으로 움직이려 하자 군인이 막아섰다. 너는 그대로 있어. 단상의 군인은 말대신 부하하게 갈라선 인파를 한쪽으로 광장의 서쪽으로 다른 한 쪽은 북쪽으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연설을 하려고 준비했던 것이 안 되자 그는 실망한 눈치를 보였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부하들이 소녀들을 옮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앞뒤로 서서 소녀들을 끌고 정해진 방향으로 이동했다. 곁에 있던 여순과 점례의 간격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눈을 마주쳤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으나 곧 멀어졌다. 눈치가 빠른 점례는 여순과 헤어지기 싫어 그쪽으로 가려고 했다. 직감적으로 가는 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서운 얼굴을 한 억센 군인의 손이 그를 잡았다. 너는 이 줄이야. 그는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 같이 가려고 하는 점례를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나에게 나쁜 결과가 올 것만 같았다. 점례는 그것을 알았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여순이 사라졌다. 그때서야 점례는 알수 없는 어떤 걱정 같은 것이 자신의 한구석에서 불쑥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헤어졌구나. 그래 떨어졌어. 놓치고 만 거야. 여순이 어디로 가는지 그녀는 묻고 싶었다. 그러나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조차도 갈 곳을 알지 못하는데 여순이 알리가 없었다. 이제 단상의 군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초조한 시선들이 서로의 눈을 교차하면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는 사람이 있으면 대답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사람은 소녀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끊겼던 군가 소리가 다시 가까이 들렸다. 노래는 광장의 바닥을 울리면서 전해지는 군홧발의 저벅거림과 섞여 묘한 소리를 냈다. 이제 여순은 없다. 안 보인다. 점례는 눈 먼 사람이 된 것처럼 방향을 상실했다. 광장의 시계탑이 그런 점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열 시간 넘게 타고 온 멀고 먼 기차 여행 끝에서 점례는 그렇게 나와 마음이 잘 맞았던 여순과 헤어졌다.

점례는 광장을 한 번 빙 둘러 보다가 위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경성역에서 눈길를 멈추었다. 사람들이 쉬지 않고 나오고 들어가고 있었다. 삼월의 하늘이 저물고 있었다. 길고도 긴 하루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