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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과 점례는 읍내로 가 경성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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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과 점례는 읍내로 가 경성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2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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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한 얼굴의 여순이 책 한 권을 들고 있다. 한동안 그녀는 두 손으로 받쳐 들고서는 책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책장을 넘기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내려놓을 것인지 망설였다. 이런 때 누군가의 허락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읽어봐. 그래도 돼. 스스로에게 명령하듯이 여순은 제목을 읽었다. 

나와 지점례 그리고 마사코. 지은이 유마 호사카. 

점례! 여순은 나직이 점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책을 펴지 않고 그대로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온갖 상념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혼란스러웠다. 이 상태로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두 눈을 꼭 감자 마음이 조금 좋아졌다.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래, 위안. 내가 지치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을 때 점례를 생각했었지.

내 동무, 점례야. 시도 때도 없이 악몽에 시달렸었지. 밤에 깨서 울부 짖었어. 도둑을 본 개처럼 말이야. 어떤 날은 공포에 질려 비오는 밤의 연병장을 달렸어. 그때 네가 나타나서 내 손을 잡았어. 그거 알아?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어. 넌 어땠는지 모르지만 너와 난 어떤 운명같은 공동체로 묶여 있었던 거지. 넌 곧 꺼져 버릴 듯 하다가도 활활 타올랐어. 난 알아. 보지 않았어도 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여순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깊은 동굴 속에서 어렵게 구조된 사람처럼 눈을 보호하려는 듯 가늘게 뜨고 앞을 서서히 관찰했다. 다행히 눈 앞에는 겁먹을 것은 없었다. 부릅뜬 눈을 풀고 여순은 손을 뻗어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작심한 듯 읽기 시작했다. 엄숙한 그러나 오래된 골동품 같은 거야. 그런 마음이면 좋겠어. 이해할 거야. 가슴이 뛰다가도 곧 멈추고 말겠지. 그래 바로 지금이야. 서둘러야지. 늦으면 안돼. 여순의 생각은 빠르게 움직였다. 

순사가 나타났다.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집안으로 숨었다.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온 것보다 더 빨리 달렸다. 긴 칼이 말 허리에서 박자에 맞춰 덜렁거렸다.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말가죽에 닿은 금속은 그 소리를 삼켰다. 흰옷 입은 사람들은 두려웠다. 문득 개소리가 그쳤다. 개장수가 나타난 것처럼 고요한 상태가 잠시동안 이어졌다. 애초에 소음이라는 것은 없었다는 듯이.

면에서 나온 일본인 순사는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황토배기 언덕에서 잠깐 아래를 보더니 거침없이 내려왔다. 죽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였다. 조선인 부하의 도움을 받아 가볍게 말에서 내린 그는 가죽 장화가 젖지 않도록 조심했다. 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장화라는 듯이 그는 고개를 숙이고 빛나는 장화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가죽 장화에 황토가 조금 묻어 있었다. 완용아 이것 보이느냐. 네.

완용이 대답과 동시에 달려와 소매로 황토를 쓱쓱 문질러 닦았다. 저리가. 됐어. 순사를 개를 쫓듯이 완용을 그 장홧발로 밀어냈다. 어디냐? 완용은 여순의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옆집 하나 건너에 점례네 초가지붕이 보였다. 마침 점례는 출타를 준비했다. 준비래야 댓돌에서 내려 고무신을 신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친구 여순과 바느질을 같이 하자고 한 약속을 지키자고 전날 저녁부터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례는 아침이 되자 물에 머리를 묻혀 곱게 빗었다.

점례가 여순네 초가의 사립문을 밀고 들어 갈 때 집 뒤의 커다란 소나무가 높이 뜬 해를 받아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금강송으로 불리는 조선솔이었다. 1000년 된 소나무여. 그 집 아버지는 점례가 소나무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마당으로 나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말 속에는 오래된 나무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 있었고 그 자부심은 자신에 속한 것이라는 다짐이기도 했다. 베지 않고 오래 남겨둔 조상에 대한 고마움과 그 고마움을 자신이 이어가고 있다는 만족감이 얼굴에 묻어났다. 그런 미소를 점례는 좋아했다. 무언가 확신에 찬 것이 미적지근한 것보다 나아 보였던 것이다. 

과연 소나무는 그런 칭찬을 받을 만 했다. 커다란 몸통의 끝에는 세갈래의 가지가 위로 뻗어 있었는데 보아서 예사롭지가 않았다. 정말 그리 오래 됐습니꺼? 처음 들어본다는 듯이 점례는 늘 하던 식으로 대꾸했다. 그라믄, 아마도 그 보다 더 오래 됐을끼다. 여순 아버지는 아버지,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고조 할아버지가 심었다고 했다. 그걸 우예 압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점례가 피식 웃었다.  나의 아버지가 말씀해주셨다. 뒷머리를 긁으며 여순 아버지가 말했다. 말하고 나서도 멋적은지 그는 재밋게 놀다가라는 말을 남기고 지게를 지고 대문을 나섰다. 하얀옷은 낡아서 누렇게 변색된지 오래였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점례는 알았습니더. 하고 지게에 대고 하는 말인지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 그렇게 대답했다.

잘 다녀오시오. 여순은 그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인사를 끝냈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놀 시간이다. 급한 마음으로 그는 점례의 손을 끌었다. 봐라, 나무가 꼭 황금같제. 황금이라면 을매나 좋을까. 내말이 그 말이다 애. 어느 날 소나무가 황금 덩이로 바뀌믄 혼자 갖기 없끼다. 소녀 둘은 손을 잡고 낄낄거렸다. 여순도 아버지처럼 소나무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집을 나설 때나 집에 돌아올 때면 늘 집 뒤의 나무를 한 번 치어다보고 그 놈 참 잘생겼다면서 아버지가 하는 말을 자신도 따라했다. 오래된 나무는 집안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아니 마을 전체를 지켜주는 버틴목이었다. 

둘은 작은 계단을 한 번에 뛰어 토방으로 올라섰다. 그때 사리문 앞에 모인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황토배기에서 말 그림자를 보고 순사가 나타났다고 외쳤던 그 소리를 다시 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작아서 자기들끼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점례도 여순도 그 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은 그 말을 하고는 금세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전에 여순은 이미 말 울음소리를 듣고 조금은 기가 죽어 있는 상태였다. 소나무 이야기를 아버지가 꺼내지 않았다면 내내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말이나 소나 뭐가 다르다고. 여순은 소 울음 소리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이 말 울음에는 몸이 달리 움직이는 자신을 다독였다. 점례는 말이 무서웠다. 그것이 울 때면 심장이 마구 뛰어 식은 땀이 다 흘렀다. 

말은 소와 달랐다. 이 마을에서 소를 키우는 집은 서너 집이나 됐으나 말 우리를 가지고 있는 집은 아무도 없었다. 말을 타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말이었다. 높으면 분의 행차하는 것이었다. 말은 그 행차에 권위와 힘을 주었다. 그래서 죽마을에 말이 온다는 것은 순사가 온다는 의미였다. 무슨 일일까. 순사의 등장은 아이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여순과 점례는 이불 속으로 넣은 다리가 저절로 꼬였으나 호기심을 못이겨 문틈으로 가는 눈길과 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몸은 이유도 없이 덜렁거렸다. 여순은 용기있게도 일어나서 문고리를 걸어 잠궜다. 쇠고리에 걸리는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이불속의 점례는 더 움츠러 들었다. 둘은 뜨개질은 생각지도 못하고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방안에서 새우처럼 구부린 여순과 점례는 숨죽이며 순사의 움직임을 따라다녔다. 소리를 통해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순사가 여순의 집에 온 것을 동네방네가 다 알도록 말은 소리나게 울었다. 앞발을 들었을 때는 소리가 더 크게 나서 마을 전체가 말울음 소리를 알아 챌 정도였다. 숨었던 아이들은 다시 나타나 뒷걸음질 하면서 말을 구경했다. 신기한 물건이었다. 그러다가 순사가 무슨 일로 여순네 집에 왔는지 알아내서 자기 집에 알려주려고 그 쪽으로 고정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알고 싶은 것은 아이들보다 여순이 더했다. 왜, 우리집이지.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 여순은 숨이 멎었다. 점례도 마찬가지였다. 무슨일일까. 순사가 왜 여순네에 왔지. 사립문 여는 삐그덕 거리는 소리는 조금 전에 났으나 두 소녀의 귀에서는 멈추지 않고 계속 그 소리가 들렸다. 귀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그치질 않네. 수탉 한 마리가 황급히 닭장으로 달려 들어갔다. 보지 않고도 뒤뚱거리면서 달리는 수탉이 여순의 눈에 선했다. 상황파악이 빠른 여순 어머니는 닭을 쫓아 닭처럼 뒤뚱거리며 닭장으로 들어갔다.

언제 들어왔는지 지게를 벗을 생각도 없이 아버지는 술상을 차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말 안 해도 그러려고 준비하던 어머니는 더 크게 알았다고 대답했다. 순사가 장화발 소리를 일부러 내며 마루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는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매서운 두개의 눈이 흙벽돌을 뚫고 점례와 여순이 있는 골방 쪽으로 가서 박혔다. 그는 그렇게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한동안 문풍지가 뜯겨나간 문고리를 응시했다. 어여 들어 오시유. 어서유. 아버지가 연신 등을 수그리면서 순사에게 말했다. 완용이 무릅을 꿇고 장화를 벗기려고 손을 댔다. 치어라. 순사가 아까처럼 개에게 하듯이 완용에게 장화발로 정갱이 쪽을 슬쩍 걷어찼다. 완용이 순간 인상을 치푸렸으나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첨하는 비굴한 표정이 바뀌는데는 순식간이었다. 

마루에 올라선 순사는 눈으로 보았던 골방을 장화발 그대로 가볍게 툭툭 찼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들어오라고 열어둔 안방으로 들어갔다. 완용이 뒤따랐고 아버지가 맨 나중이었다. 앉기 전에 방에 들어온 순사는 다시 장화발로 옆방을 한 번 툭 찼다. 여순과 점례는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어쩔 줄을 몰라 서로 껴안고 있었다. 순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위엄을 내세웠다. 아버지는 올 것이 왔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점례와 여순이 몸을 꼬면서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리고는 바들바들 떠는 서로의 몸을 확인했다. 너도 떠니? 나도 떨고 있어.

옆방에서 인기척이 없자 순사는 이래서는 곤란하다는 듯이 혼잣말을 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놀란 아버지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순사는 방에서 나와 발로 찼던 옆방 문을 잡아당겼다. 마치 도둑을 잡으러 온 듯한 행동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고 잡아 당기는 힘에 의해 약간 벌어진 채로 있었다. 이거 왜 이래. 이러면 곤란한 일이 생길거야. 순사는 조선말로 지껄이면서 안에 사람이 있으면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순사의 부하가 달려와서 더 큰 소리를 질렀다. 여순아 문열어라. 순사님이시다. 완용이 말했다.  그때까지 순사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는 완용에게 눈을 부라리면서 열지 않으면 발로 차겠다고 위협했다. 공갈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고도 남았다. 

잠시 후에 문고리를 더듬는 소리가 났고 이어서 두 여자애가 동시에 이불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들 있었구먼. 그제서야 순사는 제 뜻대로 된 것이 흡족한 듯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불속의 여자애 둘을 대충 훓어 보더니 자신을 따라나와 마루 한구석에서 하인처럼 어깨를 숙이고 있는 아버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거운 짐을 얹은 지게를 진 것처럼 허리를 펴지 못했다. 

저 아이는 딸애 친구입니더. 나이도 같고. 순사는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여순 아버지에게 같이 가자는 눈짓을 해보였다. 순사가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사립문을 열고 그것을 잡고 있는 완용을 향해 막 앞으로 나가려는 순사에게 여순 어머니는 목이 잘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닭을 보여주면서 순사님, 하고 불렀다. 순사는 금방 돌아와 먹겠다는 시늉을 하면서 오른손을 가볍게 들었다. 점례네 갔다 올깁니더. 완용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의미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십 분 쯤 후 순사가 다시 여순네로 왔다. 그 옆에는 점례 아버지가 여순 아버지보다 더 심하게 굽은 어깨로 비껴 서 있었다. 방안에는 순사와 여순 아버지와 점례 아버지, 완용 넷이서 종이 쪼가리 한 장을 앞에 놓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순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여순아, 너 일본 가서 한 일 년만 일하고 와라. 점례도 같이 가니 심심치는 않을 거다. 점례라는 말이 나오자 점례 아버지의 침 삼키는 소리가 꿀꺽하고 들렸다. 그려, 점례 니도 그렇게 하고. 점례 아버지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점례를 보면서 말했다. 걸어 오면서 순사와 양쪽 아버지가 입을 맞춘 모양이었다. 

그말이 신호라도 되는 양 순사가 손에 든 종이를 흔들었다. 여순 아버지와 점례 아버지는 그 종이에 나란히 손도장을 찍었다. 손에 묻은 인주를 바라보며 두 아버지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각자의 옷에 쓱쓱 문질렀다. 흰옷이 금세 피라도 흘리는 듯이 붉게 물들었다. 손도장 찍었으니 다 됐다. 여순 어머니가 그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을 쟁반에 담아 마루에 놓았다. 여순 아버지, 여기 닭있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뜨지 않고 안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안에서 분명히 소리를 들었음에도 문을 여는 기미는 없었다. 

천여순. 지점례. 순사가 글자를 따라 읽었다. 봐라, 니들 이름 여기 있제. 인제 니들은 일본에서 가서 돈을 벌어 오면 된다. 이말을 하면서 순사는 환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마루에는 삶은 닭이 냄새를 풍겼다. 이거 잡수히고 가시요. 네, 잡수셔유. 그러나 순사는 체면 때문인지 손사래를 쳤다. 무엄하게도 여순 어머니가 옷자락을 잡았다. 지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닭다리 하나 뜯으셔유. 순사가 어머니를 노려봤다. 그러더니 마지못해 하는 행동인 것처럼 엉거주춤 엉덩이를 마루에 걸쳤다. 완용이 옆에 있다 젓가락을 집어 주었다. 정성이라고 하니 하나 뜯겠소. 알다 시피 이런 일은 고되고 힘이 드는 일이오. 완용이 그 사이 닭다리를 하나를 뜯어 순사에게 내밀었다.

당신들도 하시요. 우린 아까 다 먹었어유. 그러니 그것은 순사님이 다 잡수셔요. 내가 돼지라도 된 말이오. 허허. 순사가 기분좋게 웃었다. 닭다리를 먹고 그는 일어섰다. 순사 정도 되면 음식을 남겨야 하는 법이다. 그는 자신이 남겨 남은 사람들이 맛을 보게 하도록 한 것은 큰 은혜라는 듯이 여유를 부렸다.  순사는 사립문을 열고 기다리는 완용 앞을 지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려 집을 한 번 돌아봤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 아닌 그 집 뒤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금강송이 볼 만 하구나. 저 것을 베어다가 지서 화장실을 지어야겠어. 순사가 말했다. 언제 벨까요? 완용이 물었다. 다음 주 쯤 하자. 예, 알겠습더.

완용이 말하자 이 자식은 알겠슴더가 뭐야. 알겠습니다 해야지. 순사가 완용의 정강이를 개를 차듯이 한 대 더 찼다. 알겠습니다. 완용이 큰 소리로 따라했다. 순사가 또 한 번 완용의 정강이를 질렀다. 한 두걸음 물러난 완용이 얼마나 아픈지 아느냐고 항변하고 싶은 듯 손으로 맞은 부분을 감싸 잡았다. 더구나 이번 발길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라는대로 했는데도 말이다. 완용의 체면이 구겨졌다. 알겠습더. 이 놈아, 하이는 어디다 뒀어. 완용이 그것이 똑바로 서라는 신호라도 되는 양 급하게 일어서더니 하이, 하고 외쳤다. 맞은 것은 다 자신의 불찰이다. 완용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완전히 제자리를 찾았다는 듯이 표정을 갖추고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완용이 두 아버지를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까딱거렸다.

존칭을 썻으나 마지 못해 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순사만 아니라면 자기가 거드름을 피워야 옳다. 그런데 순사라는 자는 이런 무지렁이들 앞에서 자기를 무시했다. 완용은 기분이 상했다. 가자. 순사가 부하에게 명령했다. 완용이 말의 고삐를 잡았다. 여순과 점례는 순사를 태우고 흔들리며 가는 말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무섭지가 않았다. 여순과 점례는 순사가 떠나고 나서 삼일 후 천웅 읍내로 나가 경성행 기차를 탔다. 가슴에는 각자 옷가지 하나를 둘둘 말은 보자기를 안았다. 점례와 여순은 그렇게 부모 곁을 떠났다. 1936년 이른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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