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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0:17 (금)
내용도 그렇지만 제목은 절대 타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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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도 그렇지만 제목은 절대 타협할 수 없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24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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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이었다. 길지 않게. 아주 짧게.

그래, 나는 약속을 지켰어. 길지 않고 아주 짧게 처리했어.

유지는 자신이 한 말의 약속을 지켰다. 한 번의 내리침으로 족했다. 그는 칼에 묻은 피를 닦지 않고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번 더 점례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생명에게 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해는 고개를 숙였으나 기세는 여전했다.

정말로 길어. 오늘은 왜 이리 길지.

그는 그 길로 다시 내무총리대신의 관저로 향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다. 가는 길이 제법 익숙하다. 그런데 허리춤의 칼은 유난히 무겁다. 피의 무게 때문인가.

유지는 다시 총리의 방 앞에 섰다. 비서가 깜짝 놀랐다. 파리한 얼굴의 유지가 손에 피를 묻히고 아버지 면담을 요청했다. 총리 각하께서는 안 계십니다.

너도 죽고 싶으냐?

유지가 피 묻은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비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쇼와 덴노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조금 기다리면서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누구랑 갔느냐.

아까 방에서 뵙던 육해군 두 장군과 함께였습니다.

유지는 대기석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서가 잠시 후 다가와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직접 닦으려는 듯이 내민 손을 거두고 유지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다, 내버려 둬라. 이것을 아버지께 보여 드려야 한다. 어디쯤 오고계신지 그거나 알아봐 줘라.

그는 사뭇 명령조로 말했다. 군복 입은 그 앞에선는 모두가 부하라도 되는 듯이 그는 짧고 굵은 말을 내뱉였다. 비서는 전화를 하기 위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유지는 고개를 들었다.

항복이라고. 안돼. 말도 안돼. 아버지라도 항복을 말한다면 이 칼이 용서치 않으리라.

유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난 쇼와 덴노외에는 누구의 신민도 누구의 아들도 아니다. 이제부터 나는 오로지 천황의 아들일 뿐이다. 그는 군복 상의에 걸린 덴노의 훈장을 어루만졌다.

훈장값을 해야지. 항복이라니. 종전도 글러 먹었어. 이천만 국민 아니 1억 인이 죽는다해도 멈출 수 없어. 덴노 반자이.

그는 벌떡 일어서서 벽에 걸린 쇼와 사진을 향해 오른손을 척소리나게 올려붙였다. 그 옆에 걸린 욱일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전투 함선에서, 가미카제 특공대 비행기에서, 전투 최일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람이 없어도 그것은 펄럭인다.

이제 내가 왔다. 있을 자리에 있을 때 사람은 힘이 생긴다. 최후통첩이다.

아버지. 항복을 건의해선 안 됩니다. 두 장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면 아니 입안에서라도 그렇다고 하면 이 유지 호사카의 일본도는 가만히 있지 않아요.

그는 혀를 깨물었다. 그것은 다짐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명령이었다. 길은 오직 하나였다. 길게 뻗은 그 길옆에는 어떤 샛길도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길로 가려 한다면 이 칼을 피할 수 없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그날 아버지는 관저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지는 다시 집으로 갔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오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다.

거실과 방에는 아직도 피가 낭자한 채 그대로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시체를 관에 모셨다. 말이 관이지 이불에 싼 것에 불과했다. 그는 장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고 곧 돌려 보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삽으로 땅을 팠다. 늦은 저녁 무렵 유지는 두 사람의 매장을 마쳤다. 방도 깨끗이 정리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유지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순간 돌았던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는 모든 것은 지나갔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한 행동과 결과를 간단히 설명하고 날이 새는 즉시 파리로 떠난다는 작별 편지를 썼다.

여기는 파리. 일본을 떠나온지 삼 년이 지났다. 전쟁은 끝났다. 항복이라고도 하고 종전이라고도 했다. 천황제가 유지됐고 군부의 책임은 면책됐다. 전범에 대한 재판은 흐지부지됐고 일본 정국은 빠르게 안정됐다.

아버지는 정계에서 은퇴한 후 훗카이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조선은 독립됐다. 그러나 일본처럼 안정 대신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좌우 대립이 심각해 남북은 삼팔선을 놓고 이미 내전 상태에 돌입한 것처럼 서로를 적대시했다.

남쪽만의 정부가 세워졌고 미군은 그런 정부를 막후에서 움직였다. 유지는 기지개를 켰다. 거의 다 끝났다. 그러나 아직 마무리가 덜됐다. 그러나 기지개를 켜고 난 후에는 더 쓰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여기서 끝내도 될 것같다. 그래서 종 치자.

마침표를 찍고 유지는 일어섰다. 창밖에는 여름의 태양이 안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훅하고 뜨거운 열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에는 여름꽃이 태양보다 더 불게 물들고 있었다.

점례가 가꾸었지. 심어 놓고 보지도 못하는구나.

그는 펜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감상에 빠져서는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렸다. 숙달된 배우처럼 그는 쉽게 눈물을 흘렸고 한 번 흘린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원고를 마무리했다. 출판사로 가는 길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그러나 그는 삼년 만에 탈고한 기분 탓인지 홀가분했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되레 시원했다.

그는 원고 겉면에 쓰인 '나와 점례 마사코' 라는 제목이 마음이 들어 마음이 들떴다.

편집자가 무어라고 해도 절대 바꾸지 말아야지. 내용도 그렇지만 제목은 절대 타협할 수 없어. 무엇보다 조선식 이름인 점례를 넣고 그 뒤에 창씨개명한 마사코를 넣은 것은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잘 한 결정이었다.

저녁에는 이곳 파리 문인들과 맥주를 마시자. 점례 친구 용희가 온다고 했다. 용희는 조선의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됐다. 신생 한국의 보사부장관 말수도 동행한다.

오랜만에 그녀를 추억하자. 아, 휴의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도 한국 정부의 국무위원이 됐다니. 그럴만도 해. 그만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온 자도 드무니. 국방부장관은 그에게 딱 어울린다.

여기서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휴의는 두만강 전선에 있지 않았다. 임정의 특명으로 그는 그곳으로 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는 일본으로 잠입했다. 천황을 제거해 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는 비상한 작전이었다.

천황의 일정을 살피면서 디데이를 정하던 그는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덴노의 떨리는 음성을 듣고 그는 왜 하필 지금이냐고 울분을 터트렸다. 한달 만 더 늦게 터졌어도 한 달 만 더 늦게 원자탄이 터졌어도 하고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동휴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다. 그는 조중 접경에서 조선 독립군과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임정과 미군의 손이 맞지 않아 출동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동휴는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부사령관에서 작전권을 넘기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초대 내무부장관이 됐다. 그만한 능력과 치안을 담당할 인물은 아무리 수소문해도 없었기 때문이다. 점례를 제외한 죽마을 세 명의 친구는 독립된 나라에서 초대 국무위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날 저녁 만찬은 화기애애했다. 모두가 유지의 출판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후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라고 미리부터 축하했다.

파리 문단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나와 점례 마사코'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벌어진 조선 독립운동을 일본인의 눈으로 그린 작품은 유일무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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