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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유난히 길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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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유난히 길다고 느껴졌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2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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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될 수 있는가. 이렇게도 되는 것이 사람인가. 자고 일어나니 백발노인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이 이그러졌다. 하루 아니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건 변했다. 파리는 이제 유지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구상했던 글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부모님도 점례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 것은 패전 앞에서 힘을 잃었다. 아주 하찮은 일이 돼버렸다. 유지는 집에 도착했다.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차를 탔나? 걸어서 왔나? 어쨌든 집에 왔다. 

그는 현관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는 벽에 걸려 있는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아버지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될 때 덴노가 하사한 장검이었다. 수 백년 전의 전통 그대로 만든 진짜 일본칼이었다.

사무라이. 사무라이. 사무라이.

거푸 세번을 이렇게 외쳤다.

그래 내 몸에는 사무라이 피가 흐르고 있어.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도도히 흘러왔다. 그것이 어느 순간 막혔는데 이제 다리 흐르고 있다. 헛것이 나를 홀렸다. 이제라도 제자리를 찾은 것은 다행이다. 

내가 누군인지 이제 분명해 졌다. 나는 유지 호사카. 대일본 제국의 영관급 최고 장교이며 일급 작전통이었다. 부상때문에 전역했지만 이제는 쓸만한 몸이다. 어깨 좀 다쳤다고 정신마저 상한 것은 아니다.

전쟁은 나에게서 떠났다고 했는데.

아니다.

대동아전쟁의 승자라고 했는데.

아니다.

아냐. 모든 게 틀렸다. 무조건 항복이라고. 이게 말이돼? 되느냐고? 전쟁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천황도 아버지도 대본영의 육해군 장군도 병사도 아니다.

내가 점례를 만나지 않았다면... 파리를 멀리했다면... 조선에서 휴의를 처단했다면... 왜 그러지 못했을까. 나는 그 당시, 나는 내가 아니었다. 유지가 아니라고.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천황의 자식이 아니었다.

대일본 제국의 빛나는 장교가 아니라 거칠게 손을 깎은 나무 인형이었다. 나무로 사람 형상을 본뜬 인형, 그것도 아주 작은 꼭두각시 인형. 

부끄러움으로 유지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렇다고 지금 유행처럼 번지는 할복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럴 마음 추후도 없다. 그럴 시간, 노력 있으면 적군 하나라도 쳐야 한다.

석고로 만든 내 몸. 망치로 내려쳐 산산이 부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자. 항복은 아니다. 종전이다. 그리고 종전에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적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천황제 존속, 군부 기득권 그대로. 그리고 전쟁 전 식민지 유지, 전쟁 범죄자 처벌과 재판은 우리 손으로 하고 무장해제는 치안유지를 위해 최소한으로 한다. 그래 이런 조건이라면 해 볼만해. 그리고 시간을 벌자. 다시 준비해 싸우는 거다. 몇 년이 걸려도 좋다. 겉으로 웃고 속으로 이를 갈면서 멋지게 복수하자.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 아닌가.

이깟 부상이 대수라고. 유지는 상처입은 어깨를 툭쳤다. 아팠다. 아얏,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생각보다 어깨는 정상이 아니었다. 부러진 어깨뼈를 이은 뼈가 다시 부러졌는지 통증은 사이렌처럼 셌다가 약했다를 한동안 반복했다.

아프다. 부상은 부상이다. 앞으론 때리지 말자. 내가 어리석었어. 어깨야 미안.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어깨대신 이번에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그래 한가지는 정리됐어. 문제가 여럿일 때는 이렇게 가지를 쳐야해.

다음은? 그래 다음은 점례. 점례는? 나를 남자로 만든 여자. 그녀의 그림 솜씨.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인류 최고의 화가 가운데 하나야. 우리의 보물. 아, 어쩌지. 

그는 잠시 사무라이를 떠나 나중에 자란 예술의 피로 잠깐 돌아왔다. 파리, 지금 파리에 있다면. 술과 담배. 멋진 건물과 음식. 글쟁이들의 끊없는 허세. 그립다. 어쩌지 다 팽개치고 애초 계획대로 파리로 뜰까. 그럴까. 유지는 흔들렸다. 바람에 나무 끼는 마른 갈대처럼 마구 흔들렸다.

내 조국은 갈가리 찢기고 있는데 나는 조선 여자 점례와 장난을 하고 있어. 그리고 그것을 소설이랍시고 끄적였지. 사랑놀이. 그래 남들은 죽으라 싸울 때 나는 여자와 놀고 있었어.

유지는 또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그는 한 점 먼지가 됐다. 창가에 비치는 무수한 먼지 알갱이가 되어 방안을 부유하고 있었다. 목적지도 없는 먼지 신세가 바로 자신이었다. 

여보.

점례가 다가와 앉았다. 손에는 뜨다 만 자수가 들려 있었다. 유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답도 없었다. 다 싫었다. 그는 장점을 꺼내 닦았다. 날이 선 검의 날은 금방이라도 살점 깊숙이 박혀 들듯이 푸르게 빛났다.

여보, 무슨... 그만, 그만해. 지금은...

점례는 일어섰다. 처음 그를 만났던 때를 기억해 냈다. 혈기왕성한 육군 장교와 소초에서 만났던 그 날 그 표정이 지금 유지의 얼굴이었다. 낯설고 두려웠다.

빨리 파리로 가고 싶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 그녀는 한쪽으로 물러나 바늘을 잡았다. 그러나 잘 될리 없었다. 아차 싶었는데 손을 찔렸다. 손가락에서 피어 배어났다. 핏방울, 아주 작은 것은 흰 천에서 점하나를 찍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다, 끝났다. 그녀는 체념했고 되는대로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고 막사에서처럼 그녀는 죽음을 생각했다.

묶을 끈을 찾았던 그 시절의 막장 같은 생활로 점례는 다시 돌아왔다. 참 인생 바뀌는 것 한순간이구나. 유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러나 유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사무라이의 피는 끓고 있는데 검은 찌를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주인은 아직 말 고삐를 잡지 않았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는 가족의 목을 쳤다.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전진하겠다는 뜻이다.

제국의 용사들은 지금 이순간도 미군 함정을 위해 돌진하고 있다.

나는? 누구도 보다도 앞장서야 할 나는?

유지는 나는 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은 생각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밥 먹자.

어머니가 유지를 불렀다.

조선 아가씨가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어.

조선 아가씨.

유지는 조선이라는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조선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조선이라고.

감정이 이렇게 나빠지자 조선 아가씨에게도 같은 감정이 쏠렸다. 그러고 보니 점례는 휴의를 도왔다. 그의 직감은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살렸다. 시차가 그렇게 정확하게 일치할 수는 없다. 한 번은 몰라도 두어 번 그것이 되풀이 되면 우연이 아닌 사람의 개입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뺀 검을 다시 집어넣을 생각은 없었다. 대의를 위한다면 이것은 역사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하찮은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 한 번 휘두르면 그것으로 끝이다. 힘들지도 않아. 가볍게, 아주 가볍게지.

나라를 위하는 나의 마음은 이처럼 간절하다. 생각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솜씨 좋은 두 명이면 충분하다. 첩자로 위장해 두만강의 휴의를 처단하자. 그것이 점례도 원하는 바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데 점례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안 그래? 점례 당신 생각도 그렇지?

그는 입안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식탁의 밥은 식고 있다. 한두 술 뜬 어머니마저 입맛이 없다고 남겨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점례는 일어섰다. 그는 식탁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방으로 들어온 점례는 방안 가득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뜨개를 이어 갔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금새 울어버릴 것이다. 학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편 날개를 접으면서 막 땅에 착륙하는 모습이었다. 암수놈 동시에 그런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보기에 좋았다.

목과 눈과 다리에 붉은 물을 들이기 위해 점례는 바늘을 바꿨다. 유지가 다가왔다. 그는 몇가지 물으면서 우리들의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적어도 나와 함께 한 시간 들, 동지적 마음으로 같이 했던 그 시간에 대한 짧은 회상 정도는 필요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가는 목을 본 순간 유지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아프지 않게 보내줄게. 오늘 하루는 참으로 기네. 왜 이리도 시간이 안 가지. 오후는 너무 길어. 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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