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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6:02 (금)
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분노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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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분노가 일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1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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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처지를 동휴는 바꿔 놓고 보았다. 용희의 남편으로 총이나 칼 대신 흰가운을 입고 있는 의사로 말이다. 그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곧 자신의 직성과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국가를 위한 일을 하고 저 자는 겨우 아픈 사람의 투정이나 들어주고 있다. 격이 다른 것이다. 내가 할 일이 아니지. 저런 일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거야. 용희도 마찬가지고.

용희가 나를 택했으면 애국이 뭔지 충성이 뭔지를 알고는 벅차오르는 기분을 알텐데 흰 옷 입고 종이나 뒤적이는 여자가 그런 큰 것을 알겠어. 기껏해야 피나 닦고 살을 꿰매는 일만 할 걸.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오?

하야시가 말대신 뜸이 길어지자 동휴를 재촉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고요?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하야시가 불쑥 이제 회포도 풀었겠다 각자 일이나 합시다, 하고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

잠시 10분만 시간을 주시오. 조선사람끼리 할 이야기가 있소.

조선사람이라는 말에 하야시는 기분이 상했으나 자신이 조센징이라고 말한 것을 염두에 뒀는지 알았다고 하면서 먼저 자리를 떴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용희는 체면상으로라도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너 같은 작자가 드나들 곳이 아니라고 쏘아 주고 싶었다.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기세등등하게 앉아서는 여전히 가해자 노릇을 하고 있다.

집어 던지고 싶은 놈이야.

용희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겉으로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점잖게 물었다. 네 놈이 내 앞에서 출세를 자랑하고 의젓하게 폼 잡고 있지만 이제는 당할 내가 아니라는 태도였다.

휴의 소식은 들었소?

동휴는 야, 아파서 왔니? 경성에도 의사 많다, 면서 무안을 주고 당장 막 나가고 싶었으나 남편이라는 자가 옆에 있으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존칭으로 물었다.

형사님이 알고 있는 정도는 알고 있어요.

형사님이라니? 동네 오빠인데 이거 섭섭하오. 오빠라고 부르기가 민망하면 오라버니 어떻소?

동휴가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말수는 불쾌했으나 참았다. 눈꼬리가 위로 크게 찢어져 올라간 것이 사람이 아니라 마치 원숭이 대가리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인 내가 참아야지. 우리 와이프 한테 선생님 이야기는 간혹 들었습니다. 이웃 동네에 살면서 오빠, 동생하는 처지 였다고요. 선생님 덕분에 경성으로 와서 공장에 취직하고 돈을 벌어서 공부하고 의사가 됐어요.

그런 걸 안다면 나 한테 한 턱 쏘아야 겠습니다.

동휴가 다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나중에 받아 먹기로 하고요. 혹시 휴의 동향은 알고 있는지요?

그가 용희에게 물었던 질문을 다시 말수에게 했다.

출정이 임박했다는 첩보가 도는데 정확한 일정은 나왔나요?

말수가 어이 없다는 듯이 동휴를 보면서 그것은 조선 제일의 형사님이 더 잘 아실테지요. 우리같이 병원에 갇혀 사는 사람이 어떻게 알겠어요?

이 병원에 입원했다면서요? 그리고 탈출했고요.

알고 있는대로 입니다. 신문에도 크게 났어요.

탈출에 혹 의사선생이 도움을 주지 않았나요?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용희가 끼어들었다.

그렇지. 우리 사모님은 휴의에게 마음이 있었으니까.

조심하세요. 난 당신에게 잡힌 피의자가 아닙니다.

동휴가 머쓱한 듯이 권총집에 손을 갖다 댔다. 그는 자신이 불리하거나 난처하면 항상 하는 손짓대로 이번에도 습관처럼 그렇게 한 것이다.

조선사람끼리 이거 왜 이러십니까? 타국에서는 범죄자도 애국자가 되는 판인데 낯선 이국에서 동지애는 없고 죄인 취급하다니요?

말수가 싫은 소리를 했다.

그런게 아니라는 것을 동생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나는 내 직무에 충실할 뿐이요. 대일본 제국이 독립운동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를 아파야 쓰겠어요?

일본 영사관에 파견 나온 하야시 형사가 다 조사하고 끝낸 일입니다.

여기 오기전에 그 문제에 대해 서로 상의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하지만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요. 

말을 하면서 동휴는 시계를 보았다. 10분이라고 하고서는 30분이 훌쩍 넘어 있었다. 미안한데 동생이 가서 하야시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해주면 안 되겠소. 난 조금 더 당신 남편과 얘기할 게 있어요.

용희는 말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하야시가 있는 대기실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 남자 끼리 말인데요.

용희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본 동휴가 바짝 다가앉으면서 말수에게 말했다.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자세였다. 말수는 별 시답잖은 녀석이지만 들어주겠다는 태도로 자기도 조금 앞으로 의자를 당겼다.

알려 주시오. 휴의를 잡으면 그 공을 전부 선생에게 돌리겠소. 지금 압록강이 뚫리고 독립군 일부가 함경도에 상륙했소. 내선일체 한 몸도 부족한데 조선인 마저 이러면 우리가 본국에 무슨 낯으로 뵈겠소. 의사선생, 휴의를 체포하면 독립군은 그대로 와해됩니다.

독립을 하는 단체가 여기 상하이만 해도 수십 개가 넘고 참여자도 사단 병력입니다. 사람 하나 없앤다고 독립운동 자체가 사라지지 않아요. 더구나 본국은 태평양 전쟁의 큰 그림을 봐야지 지엽적인 하찮은 것에 너무 힘을 쏟는 것 아니오?

말수가 나름대로 처방을 내리고 방향이 틀렸다고 동휴에게 훈수를 두었다.

싸울 대상을 독립군이 아닌 서양 연합군에게 돌리는 것이 현명하지요.

그런 것으로 논쟁할 시간이 없어요. 삼 년 전이라면 모를까요. 독립군이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울에서도 잇따라 도발이 일어나고 마산이나 대구에서도 들고 일어났어요. 목포는 진압하는데 열흘 이상 걸렸고 도망자들을 아직 다 체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말수가 진지하게 나왔다.

이제 말귀가 조금 통하네요. 종로서장인 내가 그래서 여기 상하이 까지 온 거 아닙니까. 애국 합시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어떨결에 손을 잡은 말수는 이 자의 손이 퍽이나 차다고 느꼈다. 작고 연약했다. 남자의 손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이런 손으로 고문하고 지지고 살을 찢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손을 놓으면서 말수는 그런 거라면 나보다 포목점 집 사장이 더 잘 알것이니 그 분을 만나라고 공을 넘겼다.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어 많은 시간을 쓸 수가 없었다는 핑계는 자연스럽게 나왔다.

용희 동생이 봐주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보는 환자가 따로 있어요.

그는 용희 동생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으나 그냥 참고 넘어갔다. 동휴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체포해서 경찰서로 끌고 가지 않는 한 더 나올 것은 없었다.

그는 포목점 사장에 대한 사전 정보가 있었으나 그 자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 자는 밀정에 이중 첩자이면서 능구렁이라서 한 두 시간으로는 정확한 정보를 파학하기 어렵다.

하야시는 가지 않고 대기실에 그대로 있었다.

뭐 좀 얻어냈어요?

우리 조선사람은 대개는 착해요.

그렇지요. 그럼.

하야시가 말꼬리를 높였다.

결론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내가 뭐라고 했소. 의사 부부는 용의점이 없다고.

우리 영사관을 뭘로 보고 그러냐는 듯이 하야시가 빈손이라고 말하는 동휴를 타박했다. 그러나 말수를 만난 것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용희를 본 것이고 용희를 통해 점례가 일본에 있다는 것과 그가 곧 파리로 떠난 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용희가 아닌 말수의 입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들이 이곳 상하이 병원을 넘기고 도쿄로 이전 한다는 것을 들었다.

소문을 사실로 확인 한 것은 그에게 큰 소득이었다. 개인적인 야욕은 언제든지 채울 수 있다. 아무리 네 년이 의사라고 해도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다. 작전이 끝나면 작살을 내주마.

내가 고맙지 않은 모양이지. 공장에 가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의사가 됐고 지금 잘살고 있다면 제일 먼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야지. 나쁜 년. 고작 한다는 것이 어디 아픈가요? 아프면 네가 치료해 줄래. 공짜로.

그리고 점례도 그렇다. 그는 언제나 용희나 점례를 한 묶음으로 놓았다. 물론 거기에 휴의도 끼어들었다. 자신도 거기에 포함됐다. 한 때 우리는 죽마을 사인방 아니었던가.

이런 생각은 그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용희는 그렇다고 쳐도 조선에 있던 점례는 자신이 먼저 나에게 와야 하지 않는가하고 분노를 키웠다. 용희보다 점례에게 이를 더 갈았다. 

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분노는 상대와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알려고 조차 하지 않는 그는 자신은 늘 그들에게 관대했으나 그들은 자신의 이런 마음을 못 알아주는 배신자였다. 

조선에 있을 때 왜 나를 찾지 않았지. 숨는다고 되느냐 말이다. 내부대신의 아들 빽으로 나를 좀 더 밀어줄 수 있잖아. 헌병대장을 시키든지. 하다 못해 그림 한 점이라도 줘야지. 미술대전에 특선을 하고 돈을 무더기로 벌어서는 뭐 어쩌자는 거야.

괜히 뒤를 쫏았어. 용희에게 한 것처럼 내가 동휴 오빠다 하고 인사동 갤러리에 나타날 걸. 괜히 폭파범 잡는다고 허둥대기만 했지, 내가 얻은 게 뭐냐고.

비록 내가 술수를 썼다고는 하지만 결과가 좋잖아. 그도 뻔하지. 공장 같다가 돈을 벌었고 우연히 내무대신의 아들을 만나 교류하다 같이 살고 유학을 가고 파리에서 인정받고.

난 뭐야, 죽쒀서 개줬나. 다들 나는 제쳐놓고 놈팽이 하나씩 차고서 나를 무시해. 이 종로서장을. 이런식으로 까지 동휴의 생각이 미치자 그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웠다.

갑시다. 난 바로 두만강으로.

그럼 나는 영사관으로.

동휴와 하야시는 각자의 길로 가기 위해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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