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 오고 있어요. 그들에게 우리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야 쓰겠습니까?
내 말이 그 말입니다. 하나로 모여도 어려운데요. 일단 임정을 중심으로 뭉칩시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주석밖에 더 있나요. 동의합니다. 나중에 다시 분파가 되더라도 지금은 손을 합칩시다.
나중에라도 그런 일은 없어야지요. 절대로요.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학도병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해요.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지원했다고는 하지만 강제징집 당한 일본 유학생 등이 주축이 된 조선 학도병이 일본군을 탈출했어요.
수 백명이 탈출해 수 천킬로 미터를 걸어서 임정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들은 오면서 광복군에 합류하기도 하고 잡혀서 다시 일본군에 끌려가기도 하는 등 악전고투하고 있다고 하네요. 우리 선배들이 나서서 도와주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약산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말씀드리면 마침 제가 그리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새로운 임무를 수행해야지요. 날랜 지원군 여덟명을 데리고 바로 오늘 떠납니다. 중간에서 접선해서 안전한 곳으로 데려올 생각입니다.
일단은 임정에 신고부터 해야지요.
물론 입니다. 그들이 임정 마당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면 어떤 감회가 일겠어요. 울컥 하는 심정에 목놓아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겠지요.
그들에게는 오로지 희망은 단 하나 임정입니다. 고향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와서 보니 자기들끼리 싸우고 노선 다툼하고 자리를 차지한다고 언성을 높인다면 어떻겠어요? 아마 나라도 다시 일본군에 입대하고 말 겁니다. 가미카제 특공대라면 비행기를 몰고 와서 임정을 폭파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지요. 비극은 생각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는 주석을 만나러 갑니다. 우리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말해 주고요.
저는 약산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저도 죽산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런 언약을 하고 각자 헤어졌다. 그 무렵 휴의는 안전 가옥에 도착했다. 운이 좋았다. 다행히 다른 출혈은 없었다. 박선생은 임정 사무원과 함께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다음날 휴의는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으나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떤 상태인지는 확실히 알았다. 병원에서 모처로 이동해 있고 전문의사가 돌보고 있다.
자신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휴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직이 탄로나 일망타진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기에 하루빨리 일어나고 싶었다.
훌훌 털고 일어나 압록강, 두만강 도강 작전을 해야 한다. 그는 눈 덮힌 산야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는 조선독립군 사단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가야 한다. 싸워야 한다.
그는 아프자 더 전투력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몸은 빠르게 회복됐다. 의약품 덕을 많이 봤다. 부종은 내렸고 총상은 아물기 시작했다. 그러자 답답했다. 그는 방안에서 걷고 뛰는 연습을 했다.
아직은 종아리 통증이 있었으나 별 무리는 없었다. 한 보름 정도 더 요양을 한다면 완전체 몸이 될 것이다. 이런 운 좋은 놈이 있나. 휴의는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이런 농담을 했다.
그나저나 내가 입원했던 병원은 안전할까. 병원장과 용희는 용의 선상에서 완전히 벗어 났을까. 나 때문에 그들이 체포되고 병원이 문을 닫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임정을 크게 칭찬해야 한다. 병원장 부부를 묶어 놓은 것은 계략중의 최고였다. 불가항력의 그들 상태는 되레 피해자로 둔갑하기에 적합했다. 도주를 그저 지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도 병원장에게 혐의를 둘 수는 없었다.
더구나 최초 신고자는 병원장이 아닌가. 말수의 발 빠른 신고가 적중한 것이다. 신고와 동시에 들이닥친 임정 요원들의 활략도 대단했다. 그러나 말수의 반 박자 앞선 대책이 자신은 물론 식구들은 위험에서 구해냈다.
일본 영사관은 말수를 믿을 만한 밀정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그가 임정 요원을 만나는 것을 묵인했다. 주석을 포함해 한꺼번에 잡아들일 때 요긴하게 쓰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실을 말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려야 할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았다. 줄타기는 그에게 새로운 의욕을 주었고 그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포목점 집 사장도 예전의 지위를 찾았다.
하루 늦은 신고를 문제 삼았으나 따로 심문한 결과 말수의 진술과 일치했고 다음 날 병원에 들러 환자의 상태를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영사관으로 직접 온 것을 높이 샀다.
저 정도 충성심이라면 믿을 만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사람이 귀했다. 그와는 수 년째 접촉을 하고 있다. 조선 사정에도 밝고 오가는 조선인들의 동태를 알려주는 것도 그였다.
영사관의 고민은 다른데 있었다. 모처에서 한다는 한국독립군의 훈련이었다. 말수가 여러날 훈련에서 빠졌고 다른 대타가 없어 병력들이 불안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들어가서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을 자연스럽게 황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스러운 인수인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영사관은 태평양전쟁이 일제의 패망으로 기울고 있는 것을 역전 시키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독립군으로 훈련받는 사단 병력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영사관은 포목점 사장을 통해 말수에게 이 삼 일간의 마무리 훈련을 지시하고는 그들이 압록강으로 이동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야밤에 트럭으로 만주 전선으로 뺀다는 계획을 세웠다.
날이 밝을 무렵이면 그들은 속았다는 것을 알지만 달리 어쩌겠는가. 그들 가운데는 도망친 학병 출신들도 많으니 탈영에서 돌아와 자대로 복귀한 것이 된다. 거기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주고 그런 자들에게는 일계급씩 특진을 시켜준다.
그리고 황군의 옷을 입히고 각자 분대로 나눠 인솔장교에서 인계하면 감촉같이 물갈이가 되는 것이다. 포목점 사장과 헤어진 말수는 이런 소식을 듣고 더 편안했다. 형사들이 병원에 오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마음이 가뿐해 지자 그는 훈련기지의 병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났다. 일제가 나서기 전에 임정이 먼저 움직인다고 해서 자신이 의심받을 상황은 아니다.
어느 쪽 군인인가는 임정과 일제가 어떤 선택을 먼저 할지에 따라 다르다. 일단 휴의가 부상을 당한 이상 그는 병력 인솔은 어렵다. 그렇다면 지난번 왔다는 몽양이 그 일을 대신할까. 아니면 약산이나 죽산의 몫일까. 그는 이런 사실을 임정에 알리고 싶었다. 일제 몰래.
일본 영사관도 긴밀히 움직이겠지. 잘 훈련된 병사들을 자신 쪽으로 빼돌려야 하니 지금쯤 작전에 돌입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력은 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적이 아닌 아군으로 판단하고 있으니 말이다. 누가 어떻게 인수하느냐에 따라 독립군이 될 수도 황군이 될 수도 있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열단장이 한발 빨랐다. 휴의 탈출에서 벗어나 여유가 생긴 그는 임정 보고를 마친 즉시 바로 모처로 이동했다. 죽산은 아마 지금쯤 험준한 산맥을 넘고 있겠지. 도중에 만나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중국 농부나 상인으로 변장하면서 학도병들을 만날 것이다.
나는 일단 훈련병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임정에 도착한 그들과 합류해 애초 휴의 장군이 하기로 한 압록강, 두만강 도강 작전을 편다.
휴장군도 이해겠지. 한시가 급하다. 일제는 무너지는 속도가 빠르다. 함흥경찰서부터 파괴하고 그곳에 갇혀 있는 독립투사들을 석방시키자. 그리고 남으로 남으로 이동해 평양을 접수하고 개성을 거쳐 서울로 진격한다.
걸리는 것들은 모두 사살한다. 우리 독립군 제3지대 병력들이 총독부를 접수하고 일장기를 끌어내린다. 그리고 태극기를 건다. 그 시점에서 일제가 패망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정해지자 약산는 마음이 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