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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점심 -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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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점심 -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여인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3.02.09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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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물가인상이 가파르다. 덩달아 외식비도 크게 올랐다. 매일 점심을 먹어야 하는 직장인들의 고충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좋은 날이면 기꺼이 거액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주머니 속은 동전으로 찰랑거린다 할지라도.

데이트 약속을 받았다고 치면 사채를 내서라도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야 한다. 서머싯 몸도 이런 남자를 비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역시 그런 생각에 전적으로 동조하고 있었으니.

어느 날 독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치자. 당신의 팬, 어쩌고저쩌고하면서 파리를 경유할 생각인데 그날 ‘포유’에서 간단한 점심을 사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장소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포유라는 것.

포유는 프랑스 상원의원들이나 가는 식당이라 평소에 단 한 번도 그곳에서 식사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시간이 많지 않고 따라서 돌아오는 목요일 밖에는 시간을 낼 수 없는 처지다.

그러니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고 짧다. 미지의 여성에 대한 호기심이 불쑥 일어났으니 덜컥 약속을 수락할 수밖에. 누가 알겠는가. 예상했던 만큼 어리고 눈길을 끄는 외모의 소유자이면서 첫눈에 반하는 매력을 갖고 있을지.

이런 상상은 돈 보기를 돌같이 하기 마련이다. 한 달 생활비로 점심 한 끼를 산다고 해도 아깝지 않다. 더구나 여자에게 안 된다고 말해도 괜찮다는 걸 아직 모르는 새파란 나이라면 두말하면 잔소리다.

▲ 연어라면 , 캐비어가 있다면 모를까 난 점심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그녀는 세상에서 으뜸가는 귀여운 여인이 틀림없다.
▲ 연어라면 , 캐비어가 있다면 모를까 난 점심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그녀는 세상에서 으뜸가는 귀여운 여인이 틀림없다.

돈 같은 것 벌면 되지, 못 벌면 굶으면 되지. 오늘 밤이 행복한 것은 내일 먹을 커피를 생각할 정도로 커피 애호가라 할지라도 그녀와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보름 동안 커피를 끊을 각오가 돼 있다.

그녀는 편지에 그냥 점심이 아닌 '간단한 점심'이라고 했겠다. 잘하면 수중의 돈으로도 해결할 수 있지 싶다. 운명의 목요일 12시 30분. 내 기대와 달리 그녀는 그렇게 어리지도 않고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벼락 맞은 정도는 아니다. 더구나 나에게 말하고 싶은 눈치를 보였으므로 이왕 점심을 사기로 했으니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메뉴판을 든 나는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비싸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나 그녀는 ,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녀는 그런 나의 속마음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이 가난한 작가의 텅빈 주머니 사정을 이해하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난 점심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와우, 먹지 않는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나. 나는 감동한 나머지 그러지 말아요, 하고 돈 많은 남자가 하듯이 후하게 나왔다. 그녀는 정 그렇게 나오신다면, 마지 못한 듯이 한 가지 이상은 먹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고 주문을 받았다.

그러면서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는다고 타박을 덧붙였다. 작은 생선 한 마리라면 괜찮겠지요. 여기 연어가 있을지 모르겠네. 지나가는 투로 말하는 그녀.

자, 여러분이라면 여자가 이렇게 나올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한 번 생각해 보자. 평균적인 남자라면 웨이터를 불러 이렇게 물어야 옳다. 여기 연어가 있나요? 철이 아니고 메뉴판에 없어도. 나는 당연히 평균적인 남자이므로 이렇게 물었다. 

웨이터가 어떤 대답을 할지 여러분은 눈치챘을 것이다. 몸이 어떤 작가인가. 독자들의 배꼽을 뺐다 붙였다 하는 수완이 둘째가라면 서럽다. 당연히 있다. 그것도 올해의 첫 연어로 방금 들어온 큼지막한 놈이.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오케이 했다. 눈치 빠른 웨이터는 가지 않고 생선이 요리될 동안 무엇을 먹을지 물었다. 가슴이 철렁한 나. 그녀는 이번에도 내 편이다. 나는 하나 이상 먹지 않아요. 음, 캐비어라면 모를까.

그녀는 동면에서 깨어난 곰처럼 캐비어와 뒤늦게 나온 연어를 시쳇말로 ‘순삭’했다. 이것으로 끝나야 한다. 그녀는 간단한 점심을 원했고 한 가지 이상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벌써 두 가지나 먹어 치웠다.

나는 뭘 먹었으냐고? 제일 싼 양고기. 그녀는 그런 나를 고기 같은 부담스러운 걸 먹고 일은 어떻게 하느냐고 꾸중을 늘어놓는다. 그 정도 타박은 참을만하다. 그녀가 마실 거리를 주문하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그녀는 나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았다.

"난 점심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는다니까요."

올커니. 그러나 영어도 한국말처럼 끝까지 듣고 나서 판단해야 한다. 김칫국 미리 먹고 헛물 켜기 전에. 나도 그래요. 이런 때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동의한다. 의사가 아무것도 먹지 말래요. ‘올커니’. 그런데 아뿔싸. 샴페인 빼고는.

이쯤되면 박차고 나와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아무리 쪼잔해도 나는 작가이고 그녀는 내 독자 아닌가. 갈 때 까지 가보자는 심정이다. 대화는 없었느냐고. 왜 없겠어. 음식 주문은 이쯤에서 일단 멈추고.

발칸 지방의 연극실태 같은 담론은 물론 문학과 음악과 미술 기타 온갖 종류의 예술과 인생 철학 종교 뭐 이런 모든 것이 도마에 올랐으리라. 여자 나이 사십 세 정도면 이런 종류는 토론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지성적으로 보이니까.

그런데 내 귀에도 그런 주제가 들어올까. 아무리 재잘거려도 아니올시다. 더구나 그녀는 대화 중간에 양갈비를 먹는 나에게 점심이 너무 거하면 잘못하는 거예요. 날 따라서 한 가지만 드세요, 라고 또 핀잔이다.

‘어쭈구리’. 이것으로 끝내자. 그러나 그 순간 웨이터가 다가온다. 미리 짜여진 각본이 아니다. 실제 상황이다. 글쎄 난 점심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니까요. 혹 자이언트 아스파라거스 조금이라면 모를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았다면 거짓말 백배다. 앞서 나는 가난을 이야기했다. 월세를 걱정하는 노총각 신세 한 번 처량하다. 가게에서 한 번 본 가격이 무시무시한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신사다.

숙녀분께서 그것이 있느냐고 묻는데요? 당연히 웨이터는 내가 없다고 말하기를 바라는 눈치를 뭉개고는 아주 실하고 좋은 놈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으로 식사가 끝났다. 아니 아직 후식이 남아있다. 커피 드셔야죠? 이번에는 그녀도 거부하지 않는다.

네, 아이스크림과 커피. 녀석들은 음식이 아니니 점심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은 참이다. 커피를 먹으면서 그녀는 짐작컨데 또 엄청난 철학, 두고두고 책상머리에 써놓고 기억해야 할 명언을 쏟아낼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명언은 바로 이것.

내가 철칙으로 삼는 것은 사람은 조금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을 때 숟가락을 놓는 것이다. 예스, 전적으로 동감이다. 요즘 그렇지 못하고 한 숟가락 더 먹고 있어 똥배가 나왔다. 그녀에게 감사할지어다.

여기서 끝인가. 독자들은 팁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참극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 그날의 점심 이후 작가는 그녀를 계속 만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점심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작가는 이 십 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극장의 구석에서 만난 그녀에게 나는 복수를 하는 그런 못난 남자가 아님에도 멋진 복수를 했다.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닌 신의 것이라고 했던가. 불멸의 신들은 이런 때 끼어들어야 옳다.

내가 만족스런 웃음을 계속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몸집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가 먼저 손짓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60세 정도인 그녀의 추정 몸무게는 133 킬로그램.

사람이 하지 못하는 복수는 신이 한다는 믿음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아 참, 계속되는 참극의 결말은 복숭아다. 그냥 웨이터도 아니고 수석웨이터가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에게 가면 같은 얼굴에 알랑거리는 미소를 머금고 철이 아닌 이탈리아 색깔이 나는 복숭아가 가득한 커다란 바구니를 불쑥 내민 것이다.

그녀의 말이 궁금하지 않은가.

난 점심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잘 익은 복숭아라면 모를까. 이번에도 이런 대답을 했을까. 친절한 독서평이니 읽어보라고 내 몰지 않는다. 대신 답을 준다.

당신은 위장이 고기로 가득하니 이건 먹지 못하겠죠. 난 간식을 조금 먹을 뿐이니 복숭아 하나쯤은 괜찮아요. 입안에 한 가득 욱여 놓고 먹는 꼴이라니 참말로 꼴사납다.

얼마가 나왔느냐고? 그러니까 음식값이 얼마냐고? 그건 나도 모른다. 하느님만이 알 뿐이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모르는 그녀는 진정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에 맞설 세상에서 유일한 귀여운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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