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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관에 도착한 그는 공을 기대했으나 헛수고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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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관에 도착한 그는 공을 기대했으나 헛수고로 끝났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0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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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변장 도구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변장이라면 이골이 난 그였지만 그것을 보니 갑자기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보다는 차라리 포인트를 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의 특정 부분을 감추거나 더해 인상을 바꾸는 것이 몸을 전부 꾸미는 것보다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력이 난 도망자에게는 도망자만의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꼬부랑 할아버지는 너무 흔한 수법이다. 더구나 일제는 병원을 집중 감시하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되레 젊은이보다 더 눈에 띄기 쉽다.

그래서 검문 대상에 오른다. 가발이 벗겨지고 수염이 뜯겨지고 구부러진 허리가 펴지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다. 약산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다른 생각 하나가 더해졌다.

그가 손에 가발을 들고 임정 사무원을 쳐다봤다. 그러나 입까지 온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사무원이 말했다.

병원에 가는 것은 제가 합니다. 선생님은 뒤로 빠지세요. 그것은 제게 필요한 것이니까요. 선생님을 불에 뛰어들어가게 할 수는 없어요.

뒤로 빠지라는 말에 약산은 기분이 상했다. 그는 물러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무원이 말 실수를 한 것이다. 약산은 그러나 초심자와 싸우기 싫어서 그만 두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고용할 인부는 있나요? 믿을 만한 사람으로.

대신 이렇게 걱정했다.

네,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약산 선생님. 주석께서는 방금 전에 약산은 이 일에서 벗어야 있어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하셨어요.

그는 빠지라는 말이 상대의 기분을 얺찮게 했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고는 조금 순화된 용어를 썼다. 그만큼 그는 말하나에도 조심을 기울이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주석이 직접 보냈겠지. 약산은 조금 부드러운 음성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이지요?

휴장군은 다른 요원이 맡기로 했어요. 급히 선생님을 이리로 모신곳은 그곳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일제가 선생님 계신 곳을 알고 아침에 급습했어요.

감사한 일이군요.

그는 그런 일은 흔한 경험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그러면 이것은?

심심하실까 봐 보여 드린 겁니다. 제가 한 번 써 볼게요. 고칠 점을 말해주세요.

사무원이 머리에 가발을 둘러썼다. 선생님은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챙기세요.

약산은 조금 허탈했다.

이것은 임정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생각은 아닙니다. 선생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휴 장군은 제가 모셔옵니다.

다른 요원이 바로 선생이었군요? 

그래요. 조금의 의학지식이 이런 때 요긴하게 쓰입니다. 이동 중에 혹시 모를 위험이 있으면 긴급조치를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아무래도 저 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 박선생이 동참하기로 했어요.

박군도?

네, 우리측 요원입니다.

약산은 주석의 찌밀함에 다시 한번 존경을 표했다. 어떤 행동이 성공하려는 저런 머리가 있어야 한다.

아침에 병원장과 통화를 했는데 환자는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태라고 하네요. 그 말은 지금은 움직일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작전을 펴야지요. 더 지체할 수 없어요. 적들이 언제 휴 장군의 신원을 파악할지 모르고. 또... 비밀은 오래 간직할 수 없어요.

약산은 그 말에 동의했다. 출동이 취소되자 약산은 긴장이 풀렸는지 변장 도구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자신이 챙길 것이 없을까 두리번 거렸으나 딱히 그럴만한 것은 없었다.

잘못 소지하고 있다가 불심검문에 걸리면 신분만 위험해 질 뿐이다. 그는 작전에 대한 문의는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여기서 오는 휴장군을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요원이 나가고 난 후 휴장군이 도착하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미리 점검하고 챙겼다.

그 시각 포목 점 사장은 병원에 도착했다.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았으나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현관 앞에서 자신을 한 번 점검했다. 나름대로 괜찮았다.

말수와 마주 앉은 그는 궁금해하는 그를 위해 영사관이나 다른 루트로 비밀이 새나가지 않은 사실을 말했다.

알리지 않고 바로 여기로 오는 길입니다. 상태는 어떤가요?

알고 싶어 답답하다는 듯이 그가 물었다.

더 나빠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사람일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변하니 지금 이 말은 십 분후에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하, 밤새 좀 생각해 봤는데 도저히 혼자서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워서요. 동생은 어떻게 생각해요?

채근하는 투로 그가 말했다.

말수가 차트에서 고개를 들고 포목점 사장을 쳐다봤다. 신고 여부를 묻는 것이라서 언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우리만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혹 일제가 먼저 눈치를 채면 난 끝장이오. 의사 선생은 이런저런 끈이 있으니 어떻게 변명하고 버텨나가겠지만 나는 걸리면 어려워요. 죽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둘 중의 하나에요.

사장이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니 신고해야겠어요?

그것은 형님이 판단할 문제고요. 저는 환자 치료에만 전념하고 있어요. 내가 어제 다 말해버린 것은 그동안 진 신세를 갚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나 역시도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몰라 상의할 겸 말해 버린거구요.

그렇다면 이 길로 바로 영사관으로 가야지요.

포목점 사장이 일어섰다.

이렇게 빨리요? 환자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조사라는 조사는 다 했는데 조선깡패로 결론이 난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장은 일어서던 그 자세로 엉거주춤 멈춰섰다. 마음을 바꿔야 할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사진을 가지고 와서 얼굴도 대조하고 지문도 떴어요. 하나도 맞는 것이 없었어요. 그들의 기대와는 빗나간 것이지요. 지명수배자 하고는 전혀 다른 인물로 나왔으니 당황했겠지요.

그럼,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포목점 사장이 반문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친일하지 않는다면 굳이 알릴 필요가 없고요. 설사 나중에 밝혀지더라도 우리도 몰랐다고 하면 되는 거지요. 형사들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우리가 무슨 수로 알았느냐고 하면 그들도 할 말이 없겠지요.

사장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수가 다음 환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눈치를 보였으나 사장은 조금 더 있었다. 무언가 미지근한 것을 떨쳐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럽시다. 난 가게로 가야겠어요. 일이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들어가세요. 형님.

말수는 등 뒤에 대고 이렇게 가볍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 역시 찜찜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포목점 사장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밀정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말은 나라 위하는 일인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고 떠들어 대지만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식은 죽 먹기로 뒤집었다. 그런 경험을 알고 있던 터라 꺼림직했다. 무언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도 말수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장이 자신에게 당장 큰 해가 미칠 것도 아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말수는 그가 아는 것을 일제 형사들도 다 아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지금은 환자에만 집중하자. 일단 살려놓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수술비를 받지 못할 형편이지만 나중에 임정이 정산해 줄 것이다. 아니면 지금처럼 무상으로 치료해도 상관없다. 양심이 더 큰 위로를 받는데 그까짓 치료비 정도야.

말수는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이 조선 사람인 것에 민족애를 느꼈다. 사장이 나가고 임정 사무원이 순차적으로 도착했다. 물론 환자로 왔다. 이 모든 장면은 도쿄여관에서 감지됐다.

여관 삼층에는 성능 좋은 망원경이 설치돼 있었고 들고 나는 사람들은 모두 관찰 대상이 됐다. 어떤 차림의 누가 언제 들어가서 언제 나오는지 기록됐다.

일제는 환자에 대한 신원 판단을 보류했다. 조선깡패로 결정 내리지 않았더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것이다. 일주일 정도만 지켜보면 수배자인지 아닌지 결론이 날 것이다.

요원 역시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했으나 작전을 미룰 수 없었다. 그 시각 도쿄여관에는 진짜 조선 깡패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소란을 피웠다. 위안부들은 소리 질렀고 삼층의 일제 형사들은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왔다.

망원경의 시야에서 병원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천으로 뒤를 덮은 트럭 한 대가 병원 앞에 도착했다. 상황이 정리된 것은 불과 삼십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관도 사건이 수습됐는지 조용해졌다. 형사들은 다시 삼층 창가로 다가갔다. 망원경을 들고 다시 병원쪽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포목점 사장은 집으로 가려다 방향을 바꿔 영사관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병원장도 믿을 수 없다. 지금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찾아오는 형사들의 눈초리도 예전같지 않다. 자신에 대한 신뢰을 의심하고 있다. 이번에 그런 의심을 바꿔야 한다.

장사를 계속하고 그들의 우산 아래에 있기 위해서는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직접가자. 전화로 연락을 하는 것보다 실상을 내 목소리로 바로 알리자. 비록 환자는 보지 못했으나 아침 회진을 돈 병원장의 말도 들었으니 정보 가치는 있을 것이다.

환자는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이제 독립운동을 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밀고를 한다고 해도 크게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스스로 이렇게 위로한 사장은 영사관 문을 열었다.

말수는 떠나는 사장의 뒷모습에서 그가 신고할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 즉시 영사관에 전화를 넣었다. 말수의 발걸음보다 한발 앞선 것이다. 영사관은 여관 삼층에서 망을 보고 있던 형사에게 병원 침투를 지시했다.

무장 경관도 데려가라.여차 하면 사살해도 좋다.

전화를 걸고 채 삼십 분도 안돼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환자가 휴의라고요. 고맙소. 선생. 우리편인줄 진작에 알아봤소.

하야시는 병원 문 앞에서 이런 말을 연습하듯이 중얼거리면서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움직였다. 병원장은 자기 방에서 묶여 있었다. 용희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그자들이 들이닥쳤어요.

그자들이라니요?

조선 깡패거나...어서 이거나 풀어요. 확실치는 않아요. 그 자들은 권총으로 위협하고는 환자를 빼돌린 거지요. 전광석화처럼 빨랐어요.

압박에서 풀려난 말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희는 이제 살았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팔을 흔들었다.

환자가 깨어나지도 못했다면서요?

그래요. 아마 이송과정에서 죽을지도 몰라요.

몇 명이 왔나요? 정확한 인원은 모르겠으나 내가 본 것은 모두 세 명이었어요.

형사는 혀를 찼다. 화난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어쨌든 고맙소. 그런데 의사 선생은 그자가 휴장군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헛소리를 하더군요. 종종 그런 환자들은 그렇게 합니다. 왜 형사님이 무슨 일이 있는지 잘 관찰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수시로 수술방을 들락거렸는데 마침 내가 들어갔을 때 환자가 고함 비슷하게 지껄이더군요. 정리하면 이래요.

나는 실패했다. 조선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내 죽음은 그러나 헛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원통한 것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왕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마땅히 내가 죽을 자리는 이곳이 아닌데...

어쩌고 하더니 금세 조용해졌어요. 갑자기 잠잠해 집디다. 그래서 아, 이자는 조선깡패가 아니라 독립군 휴장군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체 없이 전화했던 거고요. 그게 바로...말수가 시계를 보았다. 삽 십 분, 아니 삼 십 삼분전이네요.

아 참, 그리고...그 자들이 인질로 사람을 잡아갔어요.

말수는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이 말했다.

인질이라니?

형사님도 아시겠지만 박선생이라고 여기 우리 의사요.

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약품까지 싹 쓸어 갔어요. 큰 자루에 담아서는 어깨에 매고 달아났지요.

환자가 어떻게 달아 난단말이요? 

환자를 침대째 몰았고요. 마치 가벼운 구루마처럼. 밖에는 트럭이 대기하고 있는지 기계가 내는 엔진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어요.

형사는 병원 관계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환자가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갔는지 물었다. 종합해 보면 병상에 있던 환자는 트럭 뒤 칸에 침대와 함께 실렸고 박선생이 함께 탔다.

그리고 덮개를 닫은 다음 프랑스 조계지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형사가 밖으로 나갔다. 트럭을 확인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말수는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부러지지는 않았다. 용희도 말수처럼 손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영사관에 막 도착한 포목점 사장은 큰 정보나 가져온 것처럼 직원에게 거드름을 피웠다. 영사님을 뵈러왔으니... 급한 거요. 빨리 안내하시오.

그러나 직원의 반응은 별로 탐탁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나를 모르시오. 저기 시장통에서 가장 큰 포목점을 운영하는...

직원은 대답 대신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공을 기대했던 그는 대신 영사관에서 바로 체포되는 수모를 겪었다. 취조 과정에서 안 사실이지만 말수가 전화로 자신보다 먼저 휴의의 존재를 알렸다는 것이다.

이 배신자 새끼. 사장은 속으로 분을 삭였다.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말수가 밀정인가. 그가 알렸다고 해도 그를 탓할 필요는 없다. 서로 알려야 할지 말아야할지 논의하지 않았던가. 알려도 알리지 않았어도 말수의 잘못은 없다. 

오후 늦게 말수가 면회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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