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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꼬부랑 할아버지로 변장을 하는 게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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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부랑 할아버지로 변장을 하는 게 나을 겁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06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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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이 기척을 느끼고 살짝 눈을 떴다. 잠이 다 깬 상황은 아니다. 다시 눈을 감았으나 이내 그러다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크게 눈을 떴다.

용희가 자기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다. 벌떡 일어난 그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조심해요. 환자와 부딪히면 위험해요.

용희가 다급하게 말하면서 박군의 팔을 잡았다.

박군은 얼떨결에 죄송합니다, 사모님, 하고 말했다. 그는 미안했다. 짧은 시간 벌써 두 번의 실수를 한 셈이다.

방금 전에 발작이 있었어요?

제 잘못 입니다.

발작은 박선생과 상관 없어요.

그 때 자리를 비웠어요. 원장님이 살렸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또 졸고 있었으니.

내가 있으니 박선생은 좀 쉬고 오세요.

제가 더 있겠어요. 아주 잠이 싹 달아났거든요.

용희는 더 말려도 소용 없을 것 같아 알아서 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대답을 하지 않고 환자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여기저기 만져보면서 열을 바로 확인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아니 참았다기보다는 그럴 수 없었다. 이마며 손까지 부어올라 휴의의 얼굴은 차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상한 짐승 하나가 사람처럼 누워 있을 뿐이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부기는 더 심해져 얼굴 전체가 벌에 쏘인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적어도 일주일은 필요하다. 부기가 가라앉고 상처가 아물어야 사람 꼴이 될 것이다. 계단을 내려올 때만 해도 상태가 심해졌을까 하는 걱정으로 떨렸던 용희의 몸은 이제 차분해졌다.

이런 환자는 처음이지요?

네, 사모님. 이러고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의 생명은 질겨요. 특히 어떤 사람은 더 질기지요.

깡패나 건달 같지 않아요. 어떤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박선생도 그렇게 생각해요?

형사도 오고 무장경찰까지 동원한 걸 보면 요주의 인물처럼 보여요.

그렇게만 알고 있어요.

용희는 휴의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박군까지 정체를 안다면 휴의의 신상은 더는 비밀이 아닐 것이다. 둘은 수술방에 나란히 앉았다.

박군은 조선독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환자 열심히 보는 것도 독립운동이지요. 조선 사람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하는 것도 운동의 하나라고 봐요. 물론 소극적이지만.

그러면서 용희가 휴의쪽을 바라봤다. 마치 저사람은 적극적이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그래요, 적 소심한 편이거든요. 부모님은 일찍 서울을 떠나 용정으로 왔고요. 난리 통에 상하이로 와서 겨우 정착했어요. 그러다 전쟁이 터지고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어요. 집안이 하도 어수선해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어요. 핑계지만요.

이해해요. 이 사람이 좀 특출날 뿐이지요.

용희는 이 사람이란 말을 하고 나서 그 표현이 적절한 지 한 번 곱씹었다. 이 사람이라. 그래 이 사람이지, 이제는. 

그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말수가 물을 찾는지 아니면 헛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용희가 먼저 일어나서 나가보려는 박군을 잡아 앉혔다.

내가 나가 볼게요.

용희는 깜짝 놀랐다. 말수는 가운을 입고 단정한 차림으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세수를 했는지 젖은 머리를 빗으로 가볍게 빗고 있었다.

여보, 일어났어요.

어, 그래. 당신은 잠 좀 자지.

방금 내려왔어요. 박군 좀 쉬게 하려고요.

말수는 거울 속에서 웃어 보이면서 나 어때? 하고 물었다.

이 정도면 아직 괜찮은 거지?

뭐가요.

내 젊음 말이야. 박군 보단 못하지만 이 정도면 아직은 쓸만할 거야.

별 말을 다 하네요.

박군은 수술실에서 나왔나.

용희는 아차 싶었다.

둘이 말하는 것을 들었나 보다. 사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말수가 오해하려고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있을 거예요. 같이 있다 무슨 소리가 나서 내가 나와 봤거든요. 이제 교대했으니 들어가서 좀 쉬라고 했어요.

괜찮아, 요즘 애들은 삼 일 새도 끄덕 없어. 나와는 다르다니까. 난 하루만 못 자도 비실대는데.

그나저나 커피나 한잔 합시다.

그러고 보니 6섯 시가 다 되어 가네요. 알았어요. 그런데 어제 쇼크가 왔다면서요?

박군이 그러던가.

네, 원장님이 환자를 살렸다고 하데요. 그러면서 수술실을 비운 자신을 한참 자책하길래 위로 좀 해 줬어요.

혼날 때는 혼나야 해. 사람 목숨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조금만 기다려요. 10분 후에 올라오세요.

아냐, 여기로 가져와. 환자가 깰거야. 귀신같이 밤낮을 알거든. 잠을 잤으니 환자는 일어나서 아침을 우리처럼 맞을 거야. 그때가 중요해. 깼을 때 환자는 의식이 돌아오거든.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기억을 살리려고 무진 애를 쓸 때 또 한 번 위험이 찾아와.

용희가 존경스런 눈으로 말수를 바라봤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당신 대단해요. 

됐고. 나 어때? 이만하면 환자들이 믿을만 하지. 의사가 깔끔해야 신뢰가 가. 그가 다시 빗질을 시작했다. 

용희가 돌아서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당신은 상하이 최고 의사에요.

콧노래 소리를 들으면 용희가 계단을 올라갔다. 다리근육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노래는 언제 또 배웠담.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용희가 따라 부르다 말고 청승맞게 아침부터 늘어지는 노래는. 하고는 뚝 그쳤다.

포목점 사장은 고민에 빠졌다. 신고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혼자 끙끙 앓았다. 사실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말수가 왜 자신을 찾아와서 굳이 그 사실을 알렸는지에 대한 의문을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직접 신고를 하면 될 것을 왜 나한테 와서 말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 말수는 순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완전히 정반대 상황이다.

창당을 한다고 하고 임정에 들어간다고 하고 어떤 때는 일본으로 간다고 하는 등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독립파처럼 보였다가 친일파로 돌아서고.

방안을 빙빙돌던 포목점 사장은 맞다, 그가 밀정이다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밀정은 밀정을 알아보는 법이다. 나를 떠 보려고. 그래서 신고가 들어가면 나를 처치하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어차피 환자는 죽거나 식물이다. 병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깨어나려면 적어도 이 삼일은 걸린다고 했다. 그 사이에 그자가 무슨 꾀를 낼 것이다.

어쩐다. 이를. 도망갈 수 없고 말할 수 없다면 지금 당장 신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 영사관도 좋아는 하겠지만 무슨 정보를 얻을 수는 없다. 포목점 사장은 이러지도 저러지고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포상금은 문제가 아니다. 돈이라면 자신도 부족함이 없다. 말수도 마찬가지다. 독립자금 지원을 요청하면 거절한 적이 그는 없다. 병원에 환자는 많다. 보조 의사도 하나둘 정도면 잘 돌아가는 것은 분명하다. 돈도 아니라면.

사장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며 어젯밤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른 아침을 먹고 그는 상하이 거리로 나섰다. 영사관으로 바로 들어갈까, 아니면 아는 형사를 불러낼까 망설이다가 병원부터 들러보자고 마음먹었다. 방향을 바꾼 그는 부부병원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에서 꽃도 하나 샀다. 병문안을 하면서 빈손으로 올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조선독립군 총대장 아닌가. 같은 조선사람으로 쾌유를 빌어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꽃다발을 든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 시각 약산도 모처에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임정의 안가는 아니었다. 거기서 두세 블록 떨어진 프랑스 조계의 어느 이층집이었다. 여기도 안심할 수 없으나 다른 곳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그는 거기서 임정 사무원을 만나 휴의 구출작전에 대한 상의를 했다.

주석님은 오늘 새벽에 긴급히 모처로 이동했어요. 그 자리에 몽양 선생도 같이 했고요.

그래, 주석께선 뭐라고 하시든가.

아마 몽양 선생과 상의한 결과겠지만. 휴의 장군을 광복군 훈련장으로 이동시키기로 했어요. 사실은 그 말을 전하려고 만나자고 했던 거고요.

훈련장이라면.

여기서 10킬로 정도 떨어진 산속 인데요. 환자를 치료할 만한 공간이 있다고고 했어요. 아마 완치 후까지 생각해 둔 것 같아요.

부상 환자를 그곳까지 이동하려면 환자가 위험해 지지 않을까요.

그러니 의사가 중요해요. 미리 약품을 챙겨야 하고 응급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사람이 동행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나요. 부부의사를.

말수라고 통영사람인데...

통영이라. 내가 밀양이니 동향사람이네.

독립자금도 대고 임정에도 최근 들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 확실히 우리편이다라고 믿을수가...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휴장군을 맡긴단 말이오. 더구나 독립군 훈련장이라면.

그곳 훈련 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누가요?

말수 병원장요.

허, 이게 어떻게 돌아가나. 못 믿을 사람에게 독립군을 훈련 시키다니요.

그분이 다이너마이트를 능숙하게 다뤄요. 아마 미군 CIC 요원보다 더 뛰어날 걸요. 실전 경험이 어마어마하다고 해요.

약산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믿지 못한다는 거요?

사실 병원 설립에 일본 돈이 들어갔어요. 돈뿐만 아니라 각종 귀찮은 서류까지 다 일본 영사관이 도와줬고요.

이런 친일파가 따로 없군.

일본 대장 나카무라 아시지요? 부상으로 다 죽은 것을 말수 병원장이 지극 정성으로 살려냈어요. 영사관이 그 점을 높이 산 것 같아요.

그럼 뭐지요? 의사의 정체는?

우리도 잘 몰라요. 하지만 부탁하면 들어 줄거에요.

안들어 주면...

그땐 다른 수를 써야지요.

거부할 경우 영사관에 휴의의 존재를 알린다고 봐야지요. 거부 즉시 환자를 빼돌려야 합니다.

장소는?

바로 이곳입니다.

치료 의사는?

제가 좀...정식 의사는 아니지만 조선에 있을 때 병원에서 일했거든요. 의사가 시키면 환자를 꿰매기도 했어요. 급할 때는 주사도 놓고 뼈도 맞추고 이것저것 실천 경험이 조금 있어요.

그러니까 제의를 해서 받으면 훈련장으로 이동시키고 거부하면 이곳으로 데려오라는 말이지요? 이곳은 안전한 거요?

알 수 없지만 일단 형사들은 파악하지 못한 걸로 보여요.

약산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11시가 넘어가네요.

병원은 지금쯤 복잡할 거예요. 일반 환자들이 몰리는 시간이거든요. 일본 영사관도 형사를 파견했을 테고요.

나를 알아보겠어요? 만일 그들이 있다면?

아마 낯선 사람은 뒤쫓을 공산이 커요. 그러니 꼬부랑 할아버지로 변장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임정 사무원은 말과 동시에 일어나서 서랍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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