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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줄을 놓지 말자고 다짐했으나 허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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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줄을 놓지 말자고 다짐했으나 허사로 끝났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2.05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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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로운 행동이었다. 자기 집에 들어오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마는 그는 일부러 존재를 드러냈다. 영역표시를 확실히 한 것이다.

용희는 저녁만 먹고 온다는 그가 늦게 올 것을 짐작했다. 술도 거나하게 걸치고 휘청거리며 들어와서는 환자 걱정을 잔뜩 늘어놓을 것이다. 둘은 맞고 하나는 틀렸다.

그는 결코 늦지 않았다. 10시 전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녁만 먹고 오지는 않았다. 술이 들어갔다. 기분을 내기에 딱 좋은 양은 아니다. 노래를 부르는 혀가 꼬부라졌다.

저 정도 양이면 수술한 환자를 살피기는 글렀다.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 그나마 일찍 들어온 것이 어디인가. 안 돌아 올 수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타의보다 자의가 더 강해야 한다. 말수는 술을 먹으면서도 의사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다른 문제는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용희는 수술실을 들락거리면서 눈은 언제나 출입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오는지 아니면 형사가 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은 맞아 떨어졌다. 형사는 얼신 거리지 않았고 무장 경관도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휴의는 이것으로 용의선상에서 벗어난 것일까.

완전히 혐의를 벗고 조선깡패로 사건이 마무리됐을까. 단순 절도 사건임. 무언가 행패 부릴 것이 있는지 두리번 거리다 경찰을 만났고 그들의 주특기대로 무작정 튀다 총을 맞았다. 상황은 이렇게 처리됐을까. 

아니면 부러 허점을 보여 기회를 엿보기 위한 술책일까. 용의자가 안심하고 있을 때 덮치자, 덫을 놓고 때를 기다리자, 이건가. 용희는 나름대로 탐정이 되어 여기저기를 집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은 말수가 포목점집 사장을 만나 실수는 하지 않았을까 염려한 대목이다. 과거의 말수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해도 설마 그것까지 털어 놓을까 싶었다.

그러나 말수는 용희의 예상 밖에서 놀았다.

이것 보시오. 형님. 우리 병원에 환자가 있단 말이요?

환자? 병원에 환자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환자가 그냥 환자가 아니오.

그러면 가짜 환자라고 왔소. 아프지 않은데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는?

내 말 좀 잘 들어요.

말수가 단숨에 잔을 비우고 입맛을 다시더니 한 잔 주쇼 형님, 하고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틈을 그렇게 들이시나 의사선생.

그래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환자가 보통 환자가 아니거든.

거물이라도 왔소. 모택동에 쫓긴 장개석이 부상당한채 실려왔오?

그보다 더 귀가 번쩍 띄일 인물이오. 바로 조선독립군 총대장 휴의라는 말이오.

그게 정말이오? 김구 주석보다 몸값이 높다는 바로 그 휴의 말이오?

그렇소. 형님.

영사관에는 알렸어요? 돈은 벌 때 벌어야지요. 동생, 안 그렇소?

서두를 것 없어요. 지금은 도망가라고 해도 못해요. 움쩍달싹 못하니 천천히 해도 늦지 않아요.

그렇게 상태가 심해요?

말도 못해요. 다리에 총상이고 얼굴에 두 발 맞았어요.

도합 세발이라. 그럼 죽은 거나 다름없네요.

그렇소. 그런 환자를 상대로 돈벌이를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아요.

듣고보니 그렇긴 하겠네요. 더구나 조선 동포이고. 그래서 어쩌려고요?

조금 기다려 야지요. 혹시 형님이 신고하지는 않겠지요?

동생, 나를 그렇게 못 믿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나 해서요.

그런 걱정은 단단히 붙들어 매고.

주인이 넥타이 끈을 잡아당기면서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술이나 마십니다.

영 오늘은 기분이 그래요.

독립군 총대장이 일제의 총을 맞고 쓰러지다니. 이게 원.

포목점 집 사장이 위로인지 걱정인지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게요. 수술하느라 신경 썼더니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아요. 안 사람에게는 저녁만 먹고 온다고 했지만 어디 그게 지킬 수 있는 약속인가요?

그렇지요. 그런 약속은 어겼다고 해도 비난 거리가 못 되요.

건배.

둘은 잔을 연신 들어 올렸다.

여보, 그곳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 크 윽.

그걸 자랑이라고 해요?

말수는 대답하지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건지 듣지 못해 그런 건지 알수 없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말수가 또 흥얼 거렸다. 

어물쩍 넘어가지 말아요. 그럼 어째요? 환자는. 체포되는 건가요.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요? 

짜증이 몰려온 용희가 버럭 화를 냈다.

노래를 그친 말수가 조용히 말했다. 발음을 정확히 하려고 애썼으나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크윽, 그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그런 애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상하이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에 만족한다고...알았어.

나 그 사람 믿어 크억 크럭. 알았냐고?

정말로 말한 건 아니죠?

말했다니까.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

걱정 마. 바로 신고하지는 못 할거야. 그리고 신고는 하더라도 내가 하기로 했어. 그래서 상금을 그 사람이 아닌 내가 타거든.

그걸 말이라고 해요.

크억 취한다.

어 술 냄새. 독하네요. 냄새에 취하겠어요.

미안. 형님은 좀 단순하거든.

당신도 그래요, 하려다 용희는 꾹 참았다.

내가 이렇게 말했어, 여보 잘들어 이 대목이 중요해 크억.

총알 세 발을 맞았다. 하나는 다리에 두 발은 머리에. 오늘 밤 죽을 지도 모른다. 죽을 확률이 절반을 넘는다. 그러니 적어도 오늘 밤에는 신고하지는 못할거야. 같은 조선사람끼리 더구나 독립군 총대장이 그런 상태인데 영사관에 연락하겠어. 당신 같으면.

말수가 칭찬을 바라는 듯이 그러겠냐고?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라면서 중얼 걸렸다.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나, 잘했지. 적어도 하루는 번거야. 그 전에 당신이 알아서 빼돌리던지 말던지 하... 머리가 아파. 속이 울렁 거리고 나 정말 취했나 봐.

당신 취한 게 분명해요. 

말수는 그런 말수를 그대로 남겨두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용희가 나오자 말수는 자지 않고 있다가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자고 있어요. 그냥 내버려 둬야 맞지요?

그래. 환자에게 더 이상 약물 주사는 위험 천만행 행동. 지금은 쇼크가 제일 위험 하거든. 전선에서 내가 아주 많이 봤어. 당신도 알 거야? 총상 환자는 출혈 아니면 쇼크야. 아프다고 마구 주사를 찌르니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터지는 거지. 잠시 깬 적은 없었고?

헛소리했는데 그걸 깼다고 할 수 있나요?

글쎄, 내가 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중간이라고 봐야지.

참, 내. 어이가 없군요. 어서 자요. 자고 일어나서 한 번 봐줘요. 환자를 살려야지요. 다른 환자도 아니고.

오케이. 알아 모시겠다고.

방으로 안 가요?

아냐. 여기 야전침대에서 자야 일어나지. 적어도 내 환자는 내가 책임져. 죽이지는 않을 테니 당신 좀 자. 박군은?

곧 올 거예요. 아, 저기 오네요. 말소리와 동시에 박선생이 들어왔다. 말수가 일어나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곧 쓰러졌다.

선생님이 술 좀 드셨어요. 별 거 아니니 걱정말아요. 박선생이 서너 시간 좀 봐줘요. 나는 잠을 좀 자고 나올게요.

사모님, 그렇게 하세요. 피곤해 보여요. 잠시 쉬지도 못하셨잖아요.

좀 수고 좀 해주세요.

그래야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모습 좋아요.

말수가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다.

우린 한 식구야. 별것이 있나. 밥 같이 먹고 병원에서 같이 밥벌어 먹으니 한 식구지.

원장님도 좀 쉬세요.

박선생?

네.

고비야, 지금이. 오늘 밤 넘기면 환자는 괜찮아 질거요. 하지만 발작이 오면 위험하니 그때는 날 지체 없이 부르고. 난 여기서 자고 있을 테니.

박군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말이야. 크 취한다. 날 깨우기 전에 할 일이 있어. 심장 마사지. 바로 그거야. 심장을 살려야 해. 뇌로 가는 혈액양이 적으면 사달이 나. 저산소증 특히 조심하고.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누군가요? 조선깡패 라면서요?

어, 맞어 맞어. 말수는 그 와중에도 겨우 깡패 하나 살리려고 야근까지 서야 하는지 의심하는 박선생에게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했다.

혹시 이 분이 독립운동하는...?

아냐, 혹 사모님이 무슨 소리 했었냐?

아니요. 직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깡패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깡패라면 이렇게 버틸 수 없어요. 정신적 압박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정말 강해서요.

깡패도 나름이지. 나중에 깨어나면 어떤 종류의 깡패인지 한 번 물어 보자고...

박선생은 더 대꾸할 수 없었다. 말수가 등을 돌리고 곧 코를 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병실에 들어선 박선생은 비밀을 캐내려는 수사관처럼 환자를 이리저리 뚫어져라 살폈다.

부은 얼굴 사이로 뭔가 단서가 있는지 주사바늘이 꽂힌 손목 부근을 보기도 하고 총상으로 엉망이 된 왼족 종아릴 부분을 가만히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상태로 환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투사인지 깡패인지 분간하기를 중지하고 의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환자의 맥박과 호릅을 살폈다.

특별한 이상징후는 없었다. 간혹 헛소리가 나왔으니 그것은 그런 환자들이 겪는 일종의 잠꼬대 같은 것이었다. 그는 환자 옆의 간이 의자에 몸을 숙이고 눈을 감았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 무사히 살아서 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 예감해 보았다. 그러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서 며칠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는 환자를 남겨두고 수술실을 나왔다. 다른 입원 환자들을 잠깐 둘러볼 생각이었다. 삼 십 분쯤 후 수술실로 돌아온 박군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말수가 비틀거리면서 환자의 심장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선생님, 발작이 일어났나요?

말수가 힐끗 뒤돌아 보았다. 흰자위가 가득한 눈에 이상한 살기가 느껴졌다. 박군은 주춤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너, 환자 지키라고 했지? 어딜 간 거야.

벼락같은 호통이었다.

다른 환자 회진 돌았습니다.

기어가는 듯한 소리로 박선생이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 어서 와. 바꾸자. 아니. 됐다. 한고비 넘겼다. 난 자야겠다.

말수가 비틀거리면 다시 자기 쇼파로 갔다. 기분이 언짢아진 박선생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화를 삭였다. 말수가 아닌 자신이 문제였다. 다른 입원 환자 가운데 중환자는 없었다. 굳이 회진을 돌지 않아도 됐다.

그냥 수술실이 싫어 밖으로 나온 사이 일이 터진 것이다. 사모님이 올라간 이층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거기서 더 나가지는 않았다.

내가 제대로 의사질을 할 수 있을까. 그가 회의감을 느꼈다. 술이 떡이 된 사람보다 내가 못하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환자를 살렸을까. 자다가 일어나니 우연히 발작이 일어났고 그래서? 아니다. 그건 우연이 아냐.

말수는 알고 있었다. 분명히 환자가 일으킬 발작과 발작에 대처하기 위해 눈을 부릅드고 잠을 쫓았을 것이다. 머릿속은 발작에 대비한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환자 잘 지키라고. 발작 위험이 커.

그는 등을 돌리기 전에 내게 그렇게 강조해서 한 번 더 말했었다. 그런데 난 햇병아리 주제에 고참 의사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들었다. 박군은 안정된 호흡을 하는 완자 옆에서 날이 샐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화장실도 안 갈 테니 마음놓고 주무셔. 박선생은 환자에게 말하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책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오늘 밤은 글렀다. 책이나 읽자. 이런 환자는 뇌로 가능 혈약량이 감소하거든. 그게 심장이상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저산소증이 오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망위험이 높아. 다행히 살아도 식물인인간.

박군은 배운 의학지식을 점검했다. 하필 책의 아무데나 펼친 곳이 쇼크에 관한 장이었다. 그래, 이 환자는 쇼크만 벗어나면 돼. 쇼크. 정신을 차리자고 했으나 청춘의 몸은 새벽녘에 그만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박군은 의자에 기대 꾸벅꾸벅 졸았다. 말수는 의자에서 떨어져 아예 거실 바닥을 안방 삼아 자고 있었다. 용희는 조용히 수술방 문을 열었다.

박군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보다 만 책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용희는 휴의가 고비를 넘기고 죽음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단정했다.

고른 홀흡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곤히 자는 아이처럼 휴의는 덮은 시트를 가볍게 밀어 올렸다가 내렸다를 반복했다. 용희는 돌아서서 편한 자세로 하기 위해 박군의 머리를 옆으로 가볍게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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