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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8:51 (금)
약속 시간이 늦었다며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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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이 늦었다며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2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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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거실로 나온 용희는 글렀다, 다시 자기는 글렀어, 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에 밤이 깊어갈수록 또렷해지는 정신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좋아. 싸우기보다는 친해져야지. 그는 책장을 기웃거리면서 읽을만한 것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산 그림 잡지에 눈을 주었다.

그래, 점례나 추억하면서 시간을 보내자. 그가 거실등을 켜고 자리에 앉으며 창밖을 보자 여명이 시작되려는 듯 검붉은 분위기가 안으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잘 생각했어, 일본에 가면 점례를 볼 수 있을거야. 요즘들어 자꾸 점례가 그리워진다.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잡지를 뒤적이던 그는 문득 작은 사진 하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책장을 덮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프랑스 유곽을 드나드는 화가들이 매독 때문에 일찍 죽거나 고생한다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는 그 사진은 작은 군용 막사를 연상시켰다. 군용 막사. 용희는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르는 작은 거미를 내려다보듯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황급히 팔둑을 내리졌다.

그러나 스멀거리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환영처럼 팔뚝에 이어 다리로 타고 내려갔다. 불면의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새삼스럽게 용희는 그곳의 악몽과 불면을 연결시켰다.

그런가. 다 정리됐다고 생각했던 것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실타래로 엉켜 있었다. 대세계에서 마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아세아여관 앞에 모여있던 일본 군인들, 그들은 모여서 담배를 피고 껌을 씹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곧장 문을 열고 미리 정해놓은 순서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으로 안에서는 다른 병사들 서넛이 역시 주변을 둘러보면서 급히 여관 밖으로 빠져나오다가 서로 어깨를 부딛치기도 했다. 상관인듯한 자는 군복위에 걸친 하로리를 휘날리며 노동자들이나 신는 지까다비 18문 작업화를 자랑스럽게 앞으로 뻗으면서 시내로 사라졌다.

언뜻 보면 그는 군인인지조차 알 수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쪽발이 포병대원들이야. 말수는 한 마디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자신의 옆에 있는 말수가 한 마디 했다. 용희는 대꾸하지 않았다.

말수는 군인들의 모습만 보고도 그들이 육군인지 포병인지 해군인지를 알아냈다. 헌병대나 경찰을 구분하는 것도 그 였다. 그는 왜 군인들을 구별할까. 용희는 그 순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전선은 전투가 직접 붙는 곳만이 아니었다. 상하이 곳곳에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잠시 전열을 정비한 후 후난성을 거쳐 창사까지 진격했다. 중국 국민당의 수도였던 난징은 벌써 그들이 점령한지 오래였다.

수많은 중국 여자들이 여관에 머물렀다. 일본군이 있는 곳은 어디나 여자들이 군인들 숫자만큼 몰려 있었다. 용희는 다리로 내려갔던 거미들이 다시 다리를 타고 몸통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팔뚝 대신 어디를 쳐야 할지 몰라 들었던 손을 한동에 허공에 대고 있었다. 쳐야 할 곳은 몸 전체였다. 그냥 내릴 수 없어 용희는 자신의 뺨을 한 대 세게 내리쳤다.

빗맞았는지 얼굴이 아닌 코끝으로 손가락 두개가 스치고 지나갔다. 뺨 하나도 제대로 치지 못해. 속으로 자신을 호통한 용희는 자로 재기라도 하듯이 뺨의 위치를 확인한 후 다시 한번 내리쳤다. 제대로 맞았는지 이번에는 쇠막대로 칠 때 나는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용희는 쇼파에 몸을 엎드렸다. 눈물이 나왔다. 그 일로는 절대 울지 않겠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흘리고 말았다. 상하이에는 위안부들이 넘쳐났다. 바로 얼마전에도 자신의 병원 대각선으로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수상한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삼 층 짜리 건물로 도쿄여관이라는 간판이 하루 종일 번쩍였다.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그 건물에도 군인들이 들락거렸다. 외지에서 온 숙박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때로는 길게 4열 종대로 행군하고서는 여관 앞에서 대열을 흐트러트렸다. 그들이 행군해 올 때면 거리는 순식간에 인적이 드문 죽은 도시로 변했다. 사람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강제로 그러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알아서 그렇게 했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군인들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족히 30명은 넘어 보이는 인원은 순식간에 삼층 여관 건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칠흑 같은 밤도 사라지고 있다. 여명은 더 바짝 다가왔다. 용희는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다시 들어왔다.

습관처럼 심호흡을 했다. 바람을 들이마시자 배가 불러왔다. 군가 소리가 들렸다. 새벽 바람을 가르고 그것은 상하이 시내로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새벽구름 어쩌고 영광에 찬 우리 관동군 어쩌고 호국의 영령 어쩌고 하는 고함이 울렸다. 탱크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들려오는 굉음이었다. 군가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기계가 내는 소리였다.

산 넘고 물 넘고 어쩌고 저쩌고 대동아를 지키는 황군의 화려함 어쩌고 저쩌고 하늘의 독수리 어쩌고 저쩌고 태평양의 아침해 어쩌고 저쩌고 붉은 마음 봄바람 어쩌고 저쩌고 사쿠라 어쩌고 저쩌고. 그들은 서너 곡의 군가를 마치고 도쿄 여관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전선에서 막 돌아온 듯 앞세운 일장기는 옆구리가 터진 채로 아래로 쳐져있었다. 바람이 잦아 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여관 앞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군가 두 세 곡을 더 불러 제켰다. 깃발을 바꿔 달 시간은 없었다.

응, 관공군 군가야, 그리고 대항공의 노래, 다음은 일본사관학교교가 인가? 말수가 알은체를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들어가서 자요. 난 조금 있다 갈게.

알았어. 어서자. 오늘 환자 봐야지. 의사가 환자 앞에서 꾸벅꾸벅 졸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 

그 말을 하고 말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가 된 용희는 다시 창가로 눈을 돌렸다. 사지에서 돌아와 곤죽이 됐을 그들의 입에서 어디서 그런 큰 함성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개 짖는 소리조차 삼켜버릴 정도로 힘이 셌다.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순서를 정하는 지 먼저 들어가는 장병들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여관 계단에 일렬로 정렬해서 앉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앉아서 문쪽을 흘끔거렸다. 어떤 병사는 시계를 보면서 앞서 들어간 동료들이 얼마나 지체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용희는 그 모습을 창가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지켜 보았다. 밤새 전선에 있다 후방으로 온 그들은 잠을 자기 위해 여관에 온 것이 아니라 위안을 받으러 왔다. 잠이야 이삼일 못자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렇게 위안이 시급한가.

이층, 삼층의 작은 방들이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를 반복했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불 빛의 움직임을 용희는 놓치지 않았다. 날은 밝았다. 이제 신호등처럼 보이던 불빛은 밖으로 새 나오지 않았다.

용희는 한동안 그렇게 계속 그곳을 지켜보았다. 건설 일꾼들이 연장을 메고 그곳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도쿄여관 뒤쪽에도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건물 앞에서 노동자들은 군인들처럼 총대신 삽이며 괭이며 연장을 내려 놓았다.

아마도 그곳도 여관이겠지. 이번에는 오사카 여관일까 아니면 규수 여관일까, 삿포로는? 이름 명을 용희는 생각나는데도 지어 보았다. 시간 감각이 없었다. 모든 군인들이 다 들어가고 나서야 용희는 몸을 돌려 다시 거실 쇼파에 몸을 기댔다.

불면의 밤은 이것 때문인가. 용희는 그러나 진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불면은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밤은 수면제 신세를 져야 한다. 용희는 가운을 챙겨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차라리 차트나 보면서 오늘 예약된 환자들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인기척이 들리는 것을 알고도 용희는 못 들은 척 계단의 난간을 잡았다. 사이렌 소리가 길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전선에서 듣던 바로 그 사이렌 소리가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지고 있다. 그것은 일본국가를 위한 경례의 시간이기도 했으며 천황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침 여섯 시. 기상과 동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거리 곳곳에 서, 집안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일장기를 향해 하던 일을 멈추고 황국의 신민들은 손을 가슴에 대고 있어야 했다. 병원 출입구에 붙어 있는 일장기를 보고 용희도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덴노를 향해 충성을 다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눈을 고정했다. 그래, 내가 살 길은 친일이야. 거기서 벗어나려면 그 길밖에 없어. 아니야, 깨부수어야 해. 모르겠어. 둘 다 아니야.

용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머릿속을 일부러 혼란 속으로 빠트렸다. 그러나 길은 한길로 통해 있었다. 일본으로 가자. 가자. 가서 도쿄에 부부병원을 개업하자. 용희는 이제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배고픈 사냥개에게 물어 뜯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재울수 없었다.

요즘 들어 부쩍 들락거리는 일본 깡패들도 싫다. 모른 척 하고 몇 번 돈을 집어줬지만 이제는 그자들 얼굴만 보면 토가 나온다. 진절머리가 나는 듯 용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해결할게. 당신은 뒤로 빠져.

그러나 말수가 그 말을 하고 난 후에도 여러 달 동안 깡패들은 월세금 수금하듯이 한 달에 한 두번은 꼭 병원에 들렀다.

의사선생, 이달은 환자들이 많았다면서요. 늦게까지 불이 켜진 것을 보면 제시간에 다 보지 못한 환자들이 있었나 봐요.

말수는 알아서 준비해 둔 봉투를 내밀었다. 해결한다는 것이 이같은 ㅎ식이었다.

같이 먹고 삽시다. 우리 일본인끼리.

그들은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떠날 때는 슬쩍 숨겨둔 권총을 내보이기도 했다. 정말 같잖은 짓이었으나 사건에 엮이기 싫어 부부는 그들에게 상납금을 꼬박꼬박 내오고 있었다.

오늘도 그들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말수는 급한 외출이 있다면서 그 놈들 오면 내 서랍에 있는 봉투를 줘서 보내내, 하고는 아직 출근하지 않는 페이닥터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아직도 김군은 오지 않았나? 하면서 연신 시계를 보았다.

오겠지요. 당신 오늘 수술 없다고 낮술 먹으면 안 돼요. 오후에는 환자들 몰리니 늦지 말고 일찍 들어오고요.

점심만 먹으면 바로 달려올게. 내가 언제 내 환자 당신에게 맡기는 것 봤어? 

말수는 더 기다리지 않고 약속 시간이 늦었다는 듯이 급히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 깡패 담당은 그래서 용희 차지였다. 10시가 조금 못 된 시간에 예의 그 깡패들이 나타났다. 용희는 말수와는 달리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데라우지 영사관님이 어제 다녀가셨어요. 내게 어떤 일이든 부탁하지 않는다고 언짢아하시더군요. 일주일 후에 영사관으로 초대하셨어요.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여기 주둔군 사령관님도 왔다 갔어요. 팔에 조금 부상을 입었는데 나라를 위해 몸 바치다 그랬으니 제가 정성껏 치료했습니다. 완치된 후 사령관님은 그라모리 대위를 보내 사례를 하셨어요. 아, 여기 그 분이 주신 조선삼이 있네요.

용희가 산삼 그림이 그려진 봉투 쪽으로 눈을 돌리자 깡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받았던 봉투를 품에서 꺼내 공손하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두목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넣어 두세요.

용희는 점잖게 나왔다.

치안을 담당하느라 고생이 많은신데요. 덕분에 우리 병원도 안전하고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깡패가 두꺼운 다리를 가지런히 모았다. 의리와 자존심을 중시하는 그들에게 원한을 사서는 안 된다. 주는 것도 정중하고 돌려받은 것도 그렇게 해야 후환이 없다. 용희는 그런 식으로 깡패를 따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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