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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라도 그런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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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라도 그런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27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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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뤄 두렵거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긴 잠을 못 자서 그렇지 한두 시간의 쪽잠은 언제나 가능했다. 꼬박 날 밤을 세워도 진료 시간 틈틈이 눈을 붙일 여유는 있었다. 그래서 인지 용희는 말똥말똥한 눈을 억지로 감지 않았다.

그러나 낮과 밤을 조절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용희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믿으면서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자려고 기력을 소진하지 않았다. 새벽 1시 30분이다. 정말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죽마을의 그 시절과 지금의 고요함은 닮았다.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어디 숨을 곳이 없는지 틈을 보다가 들입다 닥쳤다. 그것마저도 죽마을과 진배없었다. 바람은 먼 조선 땅이나 이곳 상하이나 숨어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랬다가 기회가 오면 달려들었다.

그래, 뭐, 감춰둔 물건이 있다면 모를까 닥쳐온다고 해서 두려워할 게 뭐람. 혹 일제가 찾아내서 꼬투리 잡을 만한 물건 같은 건 없겠지. 조금 전의 일에 용희는 생각이 몰려 있었다. 말수가 놓치고 있는 지점을 찾아 자신이 메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들었다.

전장에서 이리저리 붙다가는 사달이 날 수 있다. 그것이 되레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말수는 말하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는 문제였다. 서류나 무슨 문제 있는 것은 없었다. 쌓아 논 것은 환자 차트였고 잡지나 신문은 누구나 소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용희는 기지개를 켰다. 권총이 생각났다. 길거리에서 주웠다고 할 수 있다. 흔한 것은 아니지만 간혹 분실된 총기류를 회수한다는 공고를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총알 한두 개 정도는 문제 될 것이 없다. 신변 보장을 위해 훈련 교관이 챙겨 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폭약이 문제였다. 말수는 다이너마이트에 애착이 있었다. 언제부터 끌고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병원 개업 전에도 무슨 돈 보따리처럼 다이너마이트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의 존재를 그는 항상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 좀 치워요. 제발. 잘못되면 우리 목숨은 물론 병원마저 날아가잖아요.

그렇게 쉽게 터지지 않아. 위험한 물건이지만 간수만 잘하면 시루떡처럼 안전하다고. 설마 나를 못믿는 건 아니지. 조선독립군 폭파 교관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말수가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쓸모가 없잖아요. 우리가 쓸 것도 아니고요. 차라리 임정에 넘겨 버리던지 훈련장으로 가져가요.

그럴 수 없어.

그건 내 목숨과 같은 거야. 그게있고 없고에 따라 내 마음이 달라져. 내가 언제나 마음이 놓이는 것은 바로 그 자루 속에 있는 물건 때문이지.

모르겠어요. 무서운 것이 왜 안심을 가져오는지. 정, 그렇다면 눈에 안 띄는 깊은 곳에 숨겨 두세요.

며칠 전에 집 마당을 깊이 파고 거기에 묻었어. 당신 나갔다 온다고 한 날 말이야.

정말이죠?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

용희는 그런 대화를 상기하고는 다른 생각으로 옮겨갔다. 일본에서 개업이 어떠냐고 영사관 직원이 말했다고 했지. 농담이라고는 했지만 그러지 못하라는 법도 없잖아. 여기는 불안해. 전쟁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일본이라면 좋아. 패전한다고 해도 본토에서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야. 거기에는 나카무라 대장의 든든한 백도 있고. 여기보다 환자도 많을 거고. 조선인도 많고. 용희는 갑자기 일본에 가고 싶었다. 거기라면 말수의 들뜬 마음을 잠재울 수 있다.

무슨 당을 창당하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다고 이게 무슨 일인가. 납치되는 줄 알았다. 남편 없는 세상을 용희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 됐다고는 하지만 일제는 임정 무력화에 나서고 있는데 독립군 훈련 교관이라니.

그 군대가 독립군이 아니고 황군으로 쓰인다고 둘러댔다고. 참, 어이없다. 너희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한 몸을 바쳐야 한다고 외치고 나서 침이 마르기도 전에 그 병력을 황군으롤 뺀다고.

용희는 말수가 하는 일이 벼랑 끝에서 위험한 놀이는 하는 것처럼 보였다. 헛디디면 끝이다. 옛날의 본성은 눌러야 한다. 스멀스멀 연기처럼 올라오는 그것을 찍어 눌러야 한다. 지상에 올라와 사방으로 퍼지면 잡을 수 없다. 지금이 적당한 순간이다. 바람 부는 대로 쓸려가게 내맡겨 둘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기 어렵다. 언제 화를 참지 못해 들이댈지 모른다. 군자다운 행동이 아니라면 훼방을 놓는다 치더라도 버티고 서 있어야 한다.

여보, 그건 아니라고요.

용희는 목이 메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어쩌자고 이리저리 붙어 다니나요. 이쪽도 저쪽도 적당한 거리를 둘 수는 없나요? 하루는 독립운동에 불타오르다가 다음날에는 황군의 역할을 강조하면 당신은...내가 회색 인간이기를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적당한 사이를 두라는 의미였어요.

이러다 우린 다 죽어요. 그 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당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나를 알잖아요. 나의 과거, 나의 전부를. 전선에서 막사에서 갑판에서 성당의 무너진 잔해 속에서 당신은 나에게 신이었어요. 불사신인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왔고요. 여보. 하지만 당신의 행동은 위험해요. 앞마당에 묻었다는 다이너마이트보다 더 크고 더 거칠어요.

용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깊숙이 마신 담배 연기를 토해내는 기분이었다. 일제는 발악하고 있다. 언제 트집을 잡을지 모른다. 그래, 일본이야. 용희는 머릿속이 온통 일본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하이는 이제 지겹다. 정을 줬지만 더 정이 들수는 없다. 조계지가 폭파될 때 용희는 직감했다. 서양사람이라고 전쟁은 봐주지 않았다. 무사히 상하리를 떠날 수 있을까. 기회가 오고 있다. 마음이 어찌나 흔들리는지 용희는 걷잡을 수 없었다.

거기가면 점례를 만날지도 몰라. 내무대신의 아들과 같이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나카무라 백은 백도 아냐. 점례를 만나고 싶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니? 하고 묻고 싶다. 그림을 그린다고? 놀랍다 애. 니가 화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너는? 너는 어떻고? 의사라니. 정작 놀라운 건 나다 나.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애는 있니? 난 양자를 들였어. 그 다음 말은 묻지 않겠다. 점례가 말하지 않는다면. 어디 있었느냐고 눈으로라도 묻지 않겠다. 경성역에서 헤어지고 나서 어디로 갔느냐고. 가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어떻게 화가가 됐고 어떻게 내무대신의 아들 호사카를 만났느냐고. 묻지 않겠다.

점례도 나에게 다른 것은 다 물어도 그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휴의는 잘 있는지. 동휴는 여전히 사냥개 노릇에 충실하고. 남자 둘은 빼놓자. 우리만의 이야기를 하자. 나도 그림에 좀 관심이 있는데. 이 참에 점례 사인이 들어간 그림 한 점 얻어 볼까.

내 방에 걸어 놓으면 좋겠다. 병원 복도에도 전시해 놓고. 나는 무엇을 주지. 글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래 아프면 공짜라고 하자. 내 건강은 못지켜도 네 건강은 내가 챙겨 줄 수 있지. 기타도 쳐주지. 피아노를 치면서 황성옛터를 불러줄거야.

그리고 울고 싶으면 울고, 실컷 울고 나서 종일 웃자. 생각이 이런 쪽으로 흐르자 용희는 자는 말수를 깨우고 싶었다. 여보, 우리 일본가요. 거기서 개업해요. 영사관 직원이 추천해 준다면서요? 친절한 제안을 거절할 필요가 없어요. 도쿄로 가요. 거기서 근사한 병원을 열어요.

여보, 눈 떠봐요. 용희는 정말 흔들어 깨워 이런 말을 하려는 듯이 안방 문을 열었다. 그곳은 어두웠다. 커튼까지 내려진 방은 도무지 빛이라고는 없었다. 용희는 다시 문을 닫았다. 들떠서 꿍꿍거렸던 발자국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잦아들었다. 그래 이렇게라도 생각이 정리됐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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