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6-14 22:01 (금)
그들은 방어벽을 이중 삼중으로 치고 있었다
상태바
그들은 방어벽을 이중 삼중으로 치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18 17: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휴의는 숨어들었다. 용산이나 노량진 근처는 아니었다. 일부러 그곳을 피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하다 보니 옥인동 한옥이 그의 안가가 되었다.

구석지고 빛이 없는 노량진의 셋방과는 달리 오전 내내 밝은 빛이 처마에 걸리는 그런 곳이었다. 몸을 감추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으나 등잔불 아래가 어둡다고 첫날을 제외하고는 다음 날부터는 되레 안심이 됐다.

적응하는 것에는 이력 난 그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곳에서 오락이나 열심히 해야겠군.

잠수탔을 때 흔히 하는 그 방법을 휴의는 이번에도 써먹기로 했다. 속죄 기간이 끝난 만큼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그의 영혼은 그만큼 순수했다.

비록 적이나 마땅히 해치워야 할 자들이라도 자신과 연관성 때문에 영영 어둠의 세계에 갇힌 원혼은 위로했고 옥인동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위로는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한옥에 있어 보니 이곳은 다른 곳에 견줄수 없을 만큼 견고했다. 나가서 떠들지만 않으면 들 킬 염려가 없었다. 담장도 낮아 여차하면 뛰어 넘을 수 있게 돌담장아래 나무 토막을 깔아 놓고 운동하는 척하면서 다리를 걸쳐 놓기도 했다.

이곳이라면 여러 날 목놓아 울지 않은다면 안심이야, 안심.

휴의는 기분 좋은 배짱을 스스로 느꼈다. 그곳에서 그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바짝 엎드렸다. 자세를 낮추고 겸손해지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런 자세로 책 읽기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배를 방바닥에 깔고 읽는 습관은 그에게 넘치는 상상력을 주었고 부족한 신념을 채웠다. 이런저런 책들은 모두 일본어였다. 읽다 보니 말하는 것보다 일본어 독해력이 더 늘었다.

조선글로 번역된 책은 눈 씻고 봐도 드물었고 사상서는 더욱 그랬다. 그는 한 권씩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한가하게 독서나 하고 있는 자신의 꼴이 한심하기보다는 더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짓밟고 약탈하고 때리는 일본인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 그는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은 나날이 확고해져 갔다. 힘센 그들과 맞설 방법은 인간적이어서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늘 법을 내세웠고 그것이 옳은 줄 알았는데 법은 언제나 그들 편이었다. 그래서 법으로 하자고 하면 흰 옷 입은 사람은 늘 불리했고 피해자였으나 가해자가 돼서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억울하고 분한 일이었다. 착하게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신념은 꺾이고 있었다. 불의 앞에서 생명과 선을 내세우는 것은 저항하지 못하는 자들의 비겁함이었다.

일제가 흰옷 입은 사람을 개돼지로 취급하는데 상대를 사람으로 대하면 승패는 자명한 것이었다. 짐승에는 짐승으로 대해야 했고 이 경우 양심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말로는 힘 있는 자들을 당해낼 수 없었고 법대로 할 경우 권세를 이길 수 없었다. 휴의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매우 선한 일이라는데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들은 죽이고도 법대로 했으니 떳떳하다고 하고 우리는 죽이면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는 것은 현명한 자들의 판단이 아니었다. 아무리 흰옷 입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기준은 있었다.

사상과 철학이 재무장되자 휴의는 자신이 폭파전문가인 것이 자랑스러웠고 숨어 있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터득했다. 그러자 이제 다시 나올 시간이 다가왔다.

일 라운드 아니 이 라운드가 끝났고 라운드 걸이 삼 라운드를 알리는 푯말을 들고 경기장을 돌고 있다. 기권패를 할 수는 없다. 휴의는 글로브를 낀 두 손을 소리 나게 탕탕 마주치면서 당당히 겨룰 준비를 했다.

겨울잠을 잔 곰이 나와 한바탕 연어 사냥에 나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빨은 벼린 칼 처럼 날카롭고 둔중한 앞발로 내리치는 힘은 상상 이상이다. 맞고  쓰러지면 달려가서 물어야 한다.

빠져나갈 수 없는 송곳니도 건재하다. 적은 삼 라운드를 버티지 못하고 케이포 당했다. 휴의는 두 손을 귀뒤로 치켜들고 위아래로 흔들면서 환호했다. 이 순간 휴의는 자신의 몸보다 영혼이  맑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상하이 임정에 암호를 발송했다. 무사한 대원 두 명과 함께 또 다른 작전을 시행하니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새로운 작전이 어떤 것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혹 암호가 적에게 발각돼 해독되면 일이 어그러질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임정은 국무회의를 열었다. 휴의의 전통에 대한 답신이 필요했다. 회의는 난상을 거듭했다. 결국 결정은 주석에게 일임됐다.

그는 고심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내려졌다.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전선이 두 개로 나뉘면 적들은 당황할 것이다. 이곳 이 개 사단의 훈련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그들을 급파할 시간은 적어도 육 개월 정도는 필요하다. 낮 밤을 가리지 않고 훈련을 해도 겨우 기초를 떼는 군사력 정도다. 그 기간을 단축해야 한다.

조선에서 연이은 대규모 폭발이 일어날 경우 중국내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 자기 쪽으로 임정을 손에 넣기 위해 신속하고 과감한 지원 경쟁을 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경쟁지원이 볼만 할 것이다. 조선 독립군은 이같은 배경 때문에 아직은 덜 익은 감자였으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주석은 기다리지 않고 사람은 중국내 양 진영으로 보내 협상을 진행했다.

군수품의 빠른 보급과 훈련 교관의 투입이 시급했다. 이것은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 훈련병들에게 좋은 기폭제가 된다. 저녁이 되어서 돌아온 요인은 모택동쪽에서 아쉬운 대로 개인화기 500정과 기관총 30문을 다음주 화요일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전했다.

장제스 쪽은 어때요?

그쪽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전과 같으나 날짜는 확정하지 못하더군요. 아마도 전선의 상황이 녹녹치 않은 모양입니다.

주석은 요인의 답변으로 미루어 중국의 내전은 모택동의 승기를 예견했다. 장제스가 밀리면 버리고 가는 무기도 상당할 것이다. 다급하면 못 버리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대포 같은 큰 무기를 조선땅으로 옮길 수는 없다. 그에게는 이동수단이 간편한 개인화기가 절실했다.

좋소. 마음은 장제스라도 모택동에 뒤지지 않겠지만 미적대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요. 수고 했어요. 그리고 이것 하나 보내시오. 주석은 일어서려는 요원에게 흘려쓴 종이쪽지 하나를 건넸다.

하산하시오. 그리고 다시 오르시오. 

조선의 휴의에게 보내는 전통이었다. 그가 간단하게 물은 것에 대응하려는 듯이 주석 역시 아주 짧게 썼다. 굳이 긴 말이 필요없는 사이라는 것도 작용했고 알아서 잘 하리라는 믿음도 더해졌다.

하산하시오. 그리고 다시 오르시오.

이 간단한 말 한마디로 휴의의 단독 군사행동은 승인됐다. 그래, 이제 산을 내려가야지. 오르는 것은 내려간 다음에 결정하자.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가서 대원 두 명을 만나 대상과 시기를 결정하자. 그는 마치 소풍을 가는 아이처럼 도시락이 든 책보를 등에 메고 가벼운 걸음으로 한옥 골목을 빠져나와 인사동 쪽으로 향했다.

늘 거니는 곳이 익숙해 저도 모르게 발이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곳은 이제 죽마을의 논두렁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사자의 힘과 여우의 영민함으로 이번 일도 지난번처럼 성공하자, 가면서 그런 다짐을 했고 예감이 좋았다. 일로 이처럼 즐거운 적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두려움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몸에서 그것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흥분과 기쁨과 충만함이었다. 거기에 경험한 자신감 까지 더해지자 휴의는 더 크게 놀자, 큰물에서 제대로 헤엄쳐보자고 콧노래를 불렀다. 독서의 보람은 이런 것이다. 빈 그릇을 채워 주는 데는 읽기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폭탄의 양은 충분했다. 안전한 곳에서 축제 때 써야 한다.

동지들, 이번 작전은 지난 것보다 더 크고 파괴력은 셀 것이오.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소. 대놓고 친일하던 자들이 쥐새끼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소. 새로운 친일분자로 두각을 나타내려는 자들은 움츠러들었소. 다 대원들 덕분이오. 상하이 임정에서도 경하하고 있는데 그 공을 모두 두 대원에게 돌립니다.

휴의가 정중하게 존댓말을 쓰면서 사건 발생 후 한 달 만에 모인 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번 작전은 어딥니까?

성질도 급하군, 그보다 누굽니까?

급하긴 마찬가지군.

대원 둘은 이런 농담으로 휴의의 엄숙한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 놓았다.

장소는요?

휴의도 질세라 급하게 물었다.

질문은 다 나왔다. 휴의는 자신의 질문은 물론 두 대원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의견을 물었다. 일제는 지금 비틀대고 있다. 술 먹어 쓰러지기 직전인데 술이 깨면 다시 제대로 걷는다. 그러기 전에 한 방 먹여야 한다.

느닷없이 달려들어 뒤통수를 깨는 작업은 비겁하지 않다. 술 깬 그들을 우리는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해야 한다. 힘센 사자를 상대할 때는 여우의 간교함이 필요하다.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동의해요.

두 대원은 이런 식으로 한 번 더 합을 맞췄다. 휴의는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기 전에 대원들의 의사를 물었고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임정의 지시를 따랐고 지난번에는 자신의 의견에 두 대원이 동참했다.

이번에는 그들에게 주도권을 주고 싶다. 주인이 된 자는 책임감이 더 크고 높다. 휴의가 이런 판단을 한 것은 작전 후 바로 일본으로 떠날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다.

덴노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는 임무를 하늘이 내렸다고 그러니 그 일을 하러 일본으로 가야한다고 그는 거듭 다짐했다. 소규모의 작전으로는 피해를 줄지언정 일제를 완전히 몰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진 덴노 앞에서 일제는 자신을 돌아볼 것이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리석은 신도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새로운 신은 필요없다. 그저 평화를 원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인간만 있으면 됐다.

그럴수록 모처의 군기지에서 훈련하고 있는 군단급 요원들의 수준도 궁금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의 규모와 질도 파악하고 싶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몫이 아니라 자신의 몫이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폭파전문가가 아니라 큰 그림을 그리는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작전을 지휘하고 싶었다. 

일본행은 그 다음이야. 그래.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어. 몸이 열개가 아닌 이상은.

휴의는 바로 자신의 결심을 바꿨다. 덴노의 일은 누군가 적임자가 있을 것이다.  

당장 발등의 불부터 끄자. 각개 작전은 대원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령관으로 군대를 지휘해야 하는 게 임무라고 여겼다. 임정의 정식 국무위원으로 국방장관 휘하의 총사령관이라면 제대로 한 번 싸워 볼 만했다.

그런 자리가 없다면 조직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옥인동 안가에서 휴의는 이미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 대원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자신은 동참하고 그들을 격려하기로 했다.

총독부는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저도 동감이고요, 헌병대사령부도 아닙니다.

동의합니다. 그런 경호가 삼엄한 곳은 피해야 하고요.

그렇게 말하고 대원들은 휴의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실망하는 기색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안전을 위해 뒤로 빠진다는 인상이라면 달리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나 휴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나도 그렇소. 그런 곳은 아니오. 적들은 이미 방어벽을 이중삼중으로 치고 있소. 허를 찔러야지.

대원들은 자신의 의견에 휴의가 동의하자 자신감이 생겼다.

허를 찌르자는 말을 염두에 두고 이번에는 이곳은 도저히 대상이 아니다, 라고 여길 만한 장소를 찾자고 했다. 철저하게 적의 입장에서 현실을 직시했다.

신문에서 봤는데 총독은 독실한 불교신자라고 합니다. 그 자는 신사보다 절을 더 숭배한다고 해요. 물론 그런 것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신사참배 동정보다는 절에서 부처님 자비를 빌었다는 내용을 두어 번 본 기억이 있어요.

대원 하나가 장소를 추측할 수 있는 발언을 했다.

나도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그자가 부처님 앞에서 세계평화와 아시아 인민의 독립을 설파했다는.

어불성설이 따로 없어. 침략자가 평화를 내세우고 주권을 뺏고는 독립을 외치다니. 그런 말을 하고도 낯이 가렵지 않을까?

그렇지. 피부 연고라고 바르고 그런 말을 했다면 몰라.

대원들은 농담할 수 있는 여유까지 부렸다. 이런 것은 일차 성공이 가져온 후광이었다. 그러고도 잡히지 않고 있고 또 다른 작전을 모의하고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일제도 붙어보니 별거 아니네. 괜히 맞고만 있었어. 그렇다고 해볼 만한 상대는 아직은 아냐. 자신감도 좋지만 경계를 늦춰는 안 되고.

알아 모시겠습니다.

휴의가 꼰대 투의 발언을 하자 대원 하나가 정중하게 받았다.

장소는 정해졌고. 다음은 시기인데. 정해진 날짜가 있나. 추측해 보면 지난번 일본각에서 폭사한 자들의 추념일이 바로 사흘 뒤에요. 아마 그때 조선 민심도 달랠 겸해서 총독이 움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아닙니다. 이건 그냥 제 추측이고요.

휴의가 확실하냐고 묻는 듯한 표정에 아이디어를 냈던 대원 하나가 황급하게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아냐 그럴지도 몰라. 나도 그 의견에 찬성해. 지난번 사건 이후로 일정을 미리 공개하지는 않을 거야. 그들도 머리를 굴리거든. 총독이 당하면 전 세계 여론도 관심을 가질 거고. 일제는 결정적 타격이 맞거든. 

조선이 원해서 일본에 합병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을 전 세계가 알게 되겠지. 조선의 독립 문제는 전후 승전국 모임에서 중요하게 안건으로 채택될 수 있고. 미국이나 영국, 소련, 중국의 의견을 일본도 무시 못 할 거야. 여론은 그러면 우리쪽으로 기울고. 

그래서 이번 작전의 성공이 중요하겠군요.

말해 뭐하나 이 사람아.

대원 하나가 다른 대원에게 이렇게 농담 겸 핀잔을 주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