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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0:17 (금)
나도 오늘 만큼은 귀부인이고 싶다고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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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오늘 만큼은 귀부인이고 싶다고 그녀가 말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16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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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작전이군. 이봉창 다음으로 큰 사건이야. 문제가 심각해지겠는걸. 여기 상하이도 안심할 수 없어. 당분간 몸을 숨기고 있어야겠어. 소나기는 피해 가야지.

잘 생각했어요. 조선에서 그런 큰일이 일어났다면 독립군 근거지인 상하이도 무사하진 못할 거예요. 대대적인 숙청 바람이 불겠군요.

포크를 내려놓으며 용희가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조금 두려워하면서 말했다.

당에 가입하거나 창당은 뒤로 미뤄야겠어.

말수도 답답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속도가 너무 빨랐어요. 전염병도 그처럼 빠른 건 없어요. 브레이크를 걸었으니 되레 잘 된 일이라고 편하게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때 종업원이 다가와 더 시킬 것이 없는지 물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문을 닫아야 한다고 했다.

무슨 일 있어요?

말수가 본능적으로 물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 지배인께서 그렇게 하라는 지시가 왔어요.

후식으로 뭐가 있나요? 겨울이지만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요즘 유행입니다.

좋아요. 그걸로 같다주시오.

말수가 흔쾌히 대답했다.

서양요리에 디저트가 빠지면 안 되지요.

용희가 대꾸했다.

그런 소식만 없었다면 아주 기분 좋은 출정식인데 말이야.

말수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여기는 여전히 해방공간이야. 전쟁중에 터진 완전한 자유시가 이곳이거든. 흥미를 잃을만하면 새로운 흥밋거리가 생겨.

말수가 흥미롭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 여보, 그 소식 아래에 조선인 사진은 누군가요?

글쎄다.

말수가 다시 보기 위해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이백육십사라고 이름이 뭐 이래. 사십도 안 된 조선 청년이 죽었다는 소식이네. 부음란에 실리지 않고 사회면에 있는 걸 보니 알려진 인물인가 보오.

용희는 이육사라는 말에 조선 시인인 것을 떠올렸다. 일전에 그의 체포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동대문경찰서에서 잡힌 그는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둥청구 둥창후퉁 28번지에서 고문을 받았다. 악랄하기로 소문난 일본 헌병대의 손아귀에서 젊은 생을 마감한 이는 대구 출신이었다. 대나무로 살이 뜯기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끝내 동지를 불지 않았던 그는 무려 17번이나 옥살이를 한 끝에 18번째에 옥살이를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는 숨이 끊어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시를 떠올렸을까.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을 건너고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제비처럼 따뜻한 나라로 날아가서 꽃피는 봄을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는구나. 그래도 나는 광야에서 끝내 부르지 못한 노래를 목놓아 부르겠다.

그럴 것이다. 그는 광야를 광인처럼 해매면서 목놓아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내가 언젠가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권력에 아부해서 기생하는 인간과 부당한 권력에 맞서서 싸우는 인간 이렇게. 앞서 조선에서 폭사한 문인이나 고관들은 전자에 속할 것이오.

그리고 바로 어제 일제의 모진 고문에 사망한 시인은 똑같이 글로 문장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후자를 택했으니. 어느 것이 옳은 길인 것 같소?

말수가 진지하게 물었다. 말투도 그렇게 남편이라기보다는 동지에게 느껴지는 그런 투였다. 원하는 대답이 어떤 것인지 용희는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치는 분명 홀로 쓸쓸하게 간 젊은 이백육십사일 것이고 세상사로 보면 이쪽이 아닌 저쪽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은 옳고 그른 판단의 문제가 아니지요.

용희은 어느 죽음이든 죽음은 어떤 면에서 보면 모두가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정답을 기다린 건 아니죠?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조금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일거예요. 더구나 정치적으로 생각한다면.

맞아. 이전 같았으면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졌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고 있어. 어떤 길을 선택하든 나름 대로의 고민은 있다는 거지. 제 민족을 팔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든 그런 자들을 응징하든 고뇌의 깊이에서 어느 쪽이 더 깊다고 말할 수는 없어.

회색이 표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지. 독립 운동에 있어서는 더 그래야 해. 한쪽만 내세우면 길을 내기 어려워. 양쪽을 다 잡아야 해.

그게 가능할까요? 사회주의자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정치가 바로 그런 것 아냐? 흩어진 것을 두어 개로 뭉쳐 놓는 것.

힘드는 작업이네요. 그런데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도 있고요. 딱 절반으로 결판나는 것은 없잖아요.

그래서 당수가 필요한 거야. 당원들의 일임을 받아 당수가 결정하는 거지. 최종 결정권자가 누구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거야. 그런 결정을 내리려면 지도자의 선견지명이 필요한 거고, 그게 부족한 지도자를 만나면 백성들은 피곤해지지. 때로는 파멸하는 거고.

용희는 말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고 싶었다. 그것은 바름과 틀림이 명확한 문제였다. 친일로 이득을 보는자와 독립으로 손해를 보는자는 구분된다.  개돼지와 사람처럼. 

편하게 왔다가 숙제만 가득 받고 집으로 가는 아이처럼 용희는 무거운 가슴이 무언가에게 짓눌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러 달 묵혀온 때를 벗은 것처럼 개운하기도 했다.

이참에 휴의를 털고 가자. 남편은 언제든 다시 그 문제를 끌고 나올 공산이 크다. 신문은 계속 그의 동정을 보도 할 것이고 그때마다 아는 사람 아니냐는 눈치를 받고도 어물쩍 넘어가기는 어렵다.

가만, 이리 줘봐요.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그 휴의가 맞는 것 같아요. 동네 오빠지요. 이웃집에서 사는데 저보다 두 살 위여서 어릴 때는 오빠하면서 따랐어요.

더구나 우리 집과는 먼 친척뻘 이어서 양쪽 집안에서도 오빠, 동생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요.

인물 났네, 보령 죽마을 촌 동네에서 애국지사 납시었네. 말수가 빈정거린다기보다는 놀랍다는 식으로 용희를 쳐다봤다.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대단한 기록이야. 더구나 당신도 엄청난 인물이고. 당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당수가 되고 해방이 되고 그대로 조선에 들어가면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요.

용희가 내친김에 한다는 듯이 기분 좋은 말을 조곤조곤하게 했다. .

너무 나갔어.

못하리라는 법이 없잖아요. 당신이 어디가 부족한가요. 조선의 어떤 정치인이 당신만큼 경험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이 있나요? 다만 인생 경험만큼 정치 경험이 부족한 것만빼고는요. 그것은 신선함으로 대치할 수 있고 빠르게 각인시킬 수 있어요. 이름이 알려진 분들은 이런저런 약점이 노출됐거나 노출되고 있어요. 다크호스로 등장하는 거지요.

벌써 나를 인정하고 밀어주는 거야, 그런 거야.

말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한 번 밀어보지요. 그것도 세게. 나만큼 당신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안주하는 삶이 당신은 아니에요. 언제나 일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당신 가슴을 뜨겁게 하지요. 사실 내심 그것이 언제냐 일뿐 터질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요. 다만 그것이 정치 쪽일 줄은 몰랐지요.

그럼 어디로?

저는 게릴라를 생각했어요. 말수가 이번에는 더 놀랐다는 듯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릴라 라고라?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마침 잘 나왔네. 식혀야지. 안 그러면 댈거야.

말수가 분위기를 가라앉히려는 듯이 작은 스푼으로 한 숟가락 떠 넣으면서 용희에게 먹어 보라는 듯이 눈짖을 했다.

나는요? 용희가 스푼을 들며 말했다.

전쟁 무기를 당신은 잘 다루잖아요? 총이면 총, 폭탄이면 폭탄. 당신 손에 들어가면 고물도 저격용 총이 되고 녹슨 작약도 훌륭한 폭탄이 되잖아요? 병원 일이 일년을 넘어갈 때 난 당신 눈에서 어떤 다른 것을 찾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먼 데서 찾을 것도 없고 당장 눈앞에 뭐가 있나 보니 전쟁이 보였던 거지요. 전쟁이 우리를 이어주고 의사 자격증을 주었지요. 그것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만날 확률도 제로였겠지요. 당신은 통영에 있었고 난 보령에 있었으니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하는 일도 그렇고 나이도 좀 차이가 나고.

그래, 휴의와는 두 살 차지만 나와는 여섯 살 차이네. 내가 좀 늙었어.

당신은 나이를 뛰어넘는 사람이라는 걸 잊었어요? 나이는 그냥 숫자에 불과해요. 그래서 여섯 살 차이라서 불만인가요? 너무 젊고 예쁜 아내를 만난 것이.

싸우려고 드내? 한 번 해볼까.

말수가 입을 비죽이 내밀었다.

그리고 여보, 내친김에 그 마을 우리 친구들 이야기를 할게요. 준비 단단히 하세요. 난 언제나 준비가 되 있어. 어떤 말이 나와도 난 이해한다고.

이해해 달라는 말이 아니고요. 해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그냥 편하게 들어요. 휴의 말고 점례도 있어요. 나와 동갑이고요. 그리고 동휴도 있어요. 휴의와 친구이니 나와는 두 살 차이고요.

점례는 쉬지 않고 말했다. 오래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비밀을 말하듯이 내친김에 그렇게.

한 번 말이 터져 나오자 아주 쉽게 말은 다음 말로 이어졌다.

점례는 파리 유학 중인 화가로 조선 최고의 반열에 올랐어요. 그리고 알다시피 휴의는 독립 투사로. 동휴가 궁금하지요?

동휴라. 놀라지 않을 게.

독립군 때려잡은 종로서 경찰서장이 동휴에요.

어라, 뭐 이런 경우가. 지어낸 얘기도 이처럼 놀랍지는 않겠는 걸. 놀라지 않는다면서도 말수는 놀라는 눈빛을 드러냈다.

여자 친구는 화가고 오빠는 조선 최고의 독립투사고 다른 오빠 하나는 독립군 토벌의 최일선에 있는 종로서장이고.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게 확실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지금까지 참았대. 마구 지껄이는 스타일이 당신이 아니라는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그건 숨 막히는 비밀인걸. 고해성사로 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들어도 될 지 몰라. 하느님이 화내지 않으실까. 

말수가 일부러 농담이라고 하느님을 꺼내 들었다. 

사지에서조차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잖아?

그때는 그들의 생존을 알 수 없었거요. 점례는 죽었을 거라고 여겼어요. 자존심이 센 아이였어요. 나와 경성역에서 헤어지고 나서 생사를 몰랐으니까요. 상하이에 와서 알게 됐어요. 조선 신문도 보고 나중에는 프랑스 미술 잡지를 통해 확인했어요. 일전에 미술관 전시회에 갔었지요? 거기서 점례의 사진을 봤어요.

당시에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수가 묻는 듯한 표정을 짓자 용희는 모든 게 불확실 했거든요. 그리고 내 마음도 정리가 안 됐고요. 가슴이 뛰어서 말을 한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어요. 진정하는데 이 만큼 시간이 걸린 거지요.

당신이 아는 만큼 점례와 동휴가 당신의 사정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네.

글쎄요. 내 편지를 점례가 받았다면 점례는 나를 충분히 이해할 거에요. 그도 나처럼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고 상하이에서 의사로 성장해 남편과 함께 병원을 하고 있다고 하면 나만큼 흥분해 있을 거에요.

점례라는 그 친구는 결혼을 했나?

글쎄요. 시집을 갔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동지로 소개되는 남자가 있는데....

용희는 그 남자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고 내무대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바로 말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뜸을 들이는 것인데 밥맛을 좋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숨이 벅차 왔던 것이다. 점례는 한 템포 쉬었다. 

일본인이고 내무대신의 아들이라고 소개가 됐더군요.

내무대신의 아들?

말수는 점입가경이라는 듯이 충격을 조금 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경성에서 헤어진 여자가 내부 대신의 아들의 동지가 됐어. 일본으로 유학 간 경성제국대 출신이나 이화여전 출신의 수재였나.

유학 간 것은 아니고요. 돈 벌러 일본 공장에 갔어요. 아니 간다고 했어요. 저처럼.

용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저처럼이라는 말은 괜히 한 것 같아 후회 되기도 했다.

인생이란 모르는 거잖아요? 갑판에서 당신을 처음 봤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처럼.

용희는 말이 많을수록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는 것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안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억지로 참을 이유가 없었다.

동휴는 내가 떠나올 당시 순사였어요. 시골 순사가 종로서장이 됐으니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지요.

말수는 용난것은 당신도, 휴의도, 점례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만 입을 봉해버렸다. 어이가 없을 때는 그런 것이다. 자신도 나름대로 살아왔다고 여겼는데 용희 친구들은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어디서 여우에게 단단히 홀린 기분이었다. 정치인이 되겠다고 나서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 꼴처럼 당황스러웠다. 이야기를 듣다가 말수는 오기가 생겼다. 어떤 경쟁심이 일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속으로만 말하고 있어요. 무안하게. 상대방이 하나도 들을 수 없으니.

용희가 저도 모르게 중얼 거리고 있는 말수에게 한마디 했다.

그런 말을 하고도 당신은 너무 태연해.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하지만 가슴은 마구 뛰고 있어요. 그러니 나는 당신이 다루기 쉬운 사람이죠.

노노, 말수가 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웨이터가 계산서를 들고 왔다.

혹시 삼두마차를 불러 줄 수 있어요? 말수는 계산서를 받아들고 넉넉한 팁을 주면서 말했다. 고개를 깊이 숙인 그가 알았다면서 급히 카운터 쪽으로 갔다.

걸어갈 수도 있는데요. 모처럼 팔짱 끼고 데이트도 할 겸요.

기분 좀 냅시다. 우리도 그럴 정도는 되잖아.

말수가 귀족이라도 되는 듯이 조금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나쁠거 없지요. 저도 오늘만큼은 귀부인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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