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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신문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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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신문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14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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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큼은 내가 모던걸이다. 용희는 그런 마음이었다. 마음만이 아니다. 보이는 외모도 상당하다. 상하이 제일가는 모던걸이 납시는데 주변이 환하지 않으면 이상하다.

이곳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낮 동안 눈치를 보던 생명들이 어둠 속에서 제멋대로 활개친다. 전쟁은 남의 일이고 내 일은 아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갔던 외국인들도 슬금슬금 어디갔다 이제 오는지 모이기 시작한다.

환락 앞세서 총칼도 시들었는지 귀신같이 포성도 들리지 않는다. 저쪽에서 말수가 손을 흔든다. 불빛을 받은 손목이 반짝하고 빛난다. 병원 개업 2주년을 맞아 용희가 준 손목시계가 제 구실을 하고 있다.

과한 것 아니오.

당신 품위를 생각한다면 그 정도는 괜찮아요.

언제 모은 거요?

한 달에 한 번씩 일정 금액을 떼어 놨어요. 이 년 모은 거예요.

놀라는 말수는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었던지 시계를 보는 눈이 마치 자식을 보는 것 같은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용희는 그런 모습이 좋았다.

활짝 웃을 때는 이마도 넓어지고 눈도 커진다. 너그러운 사람이 그 순간 말수였다.

난 미안해요. 여보 준비하지 못했어?

당신이 열심히 해준 것만 해도 차고 넘치는 선물이란 거 알잖아요?

그건 그거고. 미안해, 정말.

말수가 정말로 미안한 표정으로 눈은 시계에 가 있으나 말은 입 밖으로 나왔다.

정 그러면 적당한 시간에 대세계에서 식사한 번해요.

그런 거 말고.

그거면 충분해요.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말이 나온 김에 한 약속을 오늘 지킨 것이다. 그역시 오늘은 모던보이다.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손을 맞잡고 고급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인파를 벗어난 부부는 안내를 받으면 미리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음악이 흘렀다.

부드러운 음악, 뭐더라. 베이토벤인가.

말수가 아는 체를 했다.

용희는 그러게요. 아마 그럴걸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이런 자리에서 군가는 어울리지 않아.

여보, 군가라니요?

차라리 황성옛터가 낫지요.

해 본 소리야.

알아요. 알고 있다고요.

만족한 것은 이런 것이다. 이 기분 더 이어가야 한다. 용희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낮에 조금 언찮았던 일들을 저녁에 풀고 싶었다. 일에 바쁘고 서로에게 그동안 무관심했다.

말수가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말수도 내가 너무 심했어, 그런 말을 받아 준다면 일은 쉽게 풀린다. 받아 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용희의 도움 없이는 나는 반쪽에 불과하다. 적당한 때를 봐서 내가 도움의 손을 내밀자. 말수는 용희가 그러는 것처럼 기회를 보고 있다. 서로 이런 마음으로 만났으니 대화는 술술 풀렸다.

서로는 거슬리지 않은 말로 서로를 위하고 다독였다. 마치 호감 가는 연인들이 첫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아첨과도 같은 것이어서 달콤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여보, 당신 일은 내가 전적으로 찬성인 거 아시죠.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은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지 반대하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니란 말이예요.

랍스터의 집게발을 헤집으며 용희가 말했다.

내가 왜 그걸 모르겠어. 내가 심한 말을 해도 이해해줘서 고마워. 내 감정을 내가 다스리지 못할 때가 있거든. 새로운 일을 할 때는 너무 흥분해서 주체를 못하는 내 잘못이지.

늘 앞서가는 말수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건배합시다.

그러지요.

잔이 서로 오갔다. 말수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지만 이런 데서 40도의 술을 찾을 수는 없었다. 우아하게, 로마에 왔으니 로마법을 따르지 뭐, 그런 심산이었다.

모처럼 마신 술에 용희는 취기가 오르는지 말을 할 때 한순간 혀가 뒤틀리는 경험을 했다.

오늘 몇 사람을 만났구려.

그래 잘 됐나요.

안 될 것도 없지 뭐. 내가 당을 하나 만들어야겠어. 아니면 당에 들어가서 당수를 한 번 하려고.

망설이던 말을 말수가 꺼냈다. 편한 상태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대화여서 용희는 놀라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말이 나왔어도 이해할 정도였다.

병원 일은 어쩌려고요? 하고 묻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분위기가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말수에게 주도권이 있다. 그가 잡은 기회를 다 쓸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예의다. 그래서 부드럽게 받았다.

어느 당에 들어가려고요?

글쎄. 아직은 저울질하는 중이야. 세가 우세한 쪽에 아니면 지금은 아니어도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곳에 발을 담그려고. 첫발인데 아무렴 제대로 담가야지.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매듭이 지어질 거야. 내 얘기는 종전이 임박했다는 거지. 미국이 물러나든 일본이 항복하든 러시아가 참전하든 가부간 큰 그림이 그려질 거야. 최대한 본심을 숨기고 싶어. 드러내 놓고 내가 이런 사람이오 하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거든.

당신에게 그런 장점이 있는 줄 몰랐어요.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친화력이 있는 줄은요.

나도 몰랐다니까. 글쎄, 내가 정치할 줄 누가 알았겠어. 정치인 말수라니.

그도 우스운지 허허하고 웃었다.

세상의 운명은 모르는 거야. 배를 탈 때는 평생 배만 탈 줄 알았고 광산일 할때는 광부로 생을 마칠 줄 알았지. 의사를 하고는 내 평생 직업이 의사고 천직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포목점 집주인을 만나고부터는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 이쪽저쪽 이야기를 들어보고 신문을 읽다 보니 판세가 눈에 보여. 마치 미래를 보는 점쟁이처럼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것이 내 눈에는 보인단 말이오.

그래요. 그럴 때가 있어요. 그 때는 머뭇거리지 말고 잡아도 괜찮아요.

맞장구치며 용희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알고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아. 더구나 나는 아직은 젊은 피가 있어.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구도 있고. 병원 일에만 매달리기에는 그릇이 다르다고나 할까.

그가 먼저 병원을 꺼내들자 용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병원은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난감하다는 듯이 꺼내 들었다. 미쳐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수는 당신 있잖아? 페이 닥터도 잘하고 있고. 나도 틈나면 일을 도울 수 있어. 병원은 나의 후광이니 아예 접을 수가 없어. 한 번 의사는 영원한 의사야. 실패하면 다시 의사질 하면 되지 뭐. 정치라는 것이 시작도 그렇지만 언제 그만둘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래요. 당신은 의사로 탁월했어요. 정치는 검증이 필요하지만 의사는 오래전에 끝난 일이에요. 탁월로도 부족하고 최고예요. 이곳 상하이에서 외과의사로 당신만한 사람 있나요? 큰 병원에서 수술 실수하고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 우리병원 이잖아요. 망가진 몸을 재수술로 재활시킨 것이 한 두 건이 아니고요.

알아. 여보 비행기 그만 띄워. 멀미가 날 지경이야.

내 말은 그것은 그것대로 살려두자는 거고요.

자, 이제 그 이야기는 중간에서 접고 어쨌든 당신 건강 잘 챙기기요.

물론. 자, 재미없는 정치 이야기는 그만두고 아까 보았던 서커스 이야기나 해볼까.

뭐 길게 할 게 있나요? 인간이 정말 죽여 주네요.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래? 어쩜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죽여주는 인간들이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 우린 예술감상을 해도 같은 생각이네요.

그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요.

비장하군.

난 언제나 당신 편이고요.

미투.

그런데요. 일단 저도 내용을 좀 알아야 하니까요. 당신이 큰 결정을 하기 전에는 저와도 좀 상의 좀해요. 결정하고 나서 통보하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고요. 그래야 뜻대로 안 되도 나에게 핑계를 댈 수 있잖아요.

고마워.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고. 변수가 너무 많아. 어떻게 단칼에 정리할 수 없어.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는 말아요. 그게 좋겠어요.

그래, 브레이크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잡아줘. 다시 정치로 돌아왔네. 여기서 스톱. 내일이 휴일이니 일단 환자 걱정말고 마십시다.

마시자고요.

그런데 말이요. 조선에서 폭동이 일어난 모양이오. 여기 신문에도 났어요. 폭발물이 터져 거기 유명 인사들 상당수가 죽거나 다친 모양이에요.

그 정도로 치안이 안 좋은가요?

치안이야 좋지. 기습공격을 당한 거지. 독립군 일부가 강을 넘어 조선에 침투한 모양이요. 한 달 전쯤에 도착한 그들은 기회를 보다가 총독 암살에 실패하고 조선의 문인과 정부 인사들로 테러 방향을 바꾼 모양이오.

꿩 대신 닭이라도 잡자, 이런 심산이었던 모양이오.

문인이나 관리라면 그들은 조선인 아닌가요?

친일파 들이지. 독립군에게 친일파는 일본인과 같은 급이거나 더 악질로 분류돼.

그렇군요. 친일파에 대한 독립군의 테러라. 책임자가 휴의라는 자라는데. 고향이 보령 죽마을이라고 나와 있어. 그러고 보니 당신도 거기잖아.

말수가 용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용희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누군가 사전 경고도 없이 주먹으로 명치 부분을 강하게 가격한 것 같았다. 숨쉬기가 어려웠다.

아는 사람인가.

글쎄요. 동명 이인 일수도 있고...

휴의라면 창씨개명은 아닌 것 같고.

고향 떠나온 지 벌써 오 년째라서요.

벌써라는 표현이 맞군, 그렇게 됐나. 그럼 나도 타향살이 오 년째네.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애매해요. 이름은 확실한데 얼굴은 없으니 그렇다고 확신할 순 없어요.

사진도 나와 있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수가 손가락으로 얼굴 모양을 그렸다. 비록 희미하지만.

어디요? 어디 봐요.

용희가 사진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면서 재촉했다.

잠깐만, 기다려.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 못 꿰어. 어 여기 있군.

말수가 가방을 열고 신문을 꺼내 용희에게 건네주었다. 몇 번을 읽었는지 접혀진 부분에 바로 조선의 소요 사태 유명인 다수 사망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한쪽에 소요의 주동인물 휴의라고 설명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알아보겠어.

사진이 너무 흐릿해서요. 그리고 머리 모양이나 안경 등이 잘 판단이 서지 않네요. 짧은 머리였고 안경은 없었거든요. 헤어질 때는.

변장을 했다면 알아보기 힘들지. 하지만 형태는 있잖아.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니고.

사이라는 말에 용희는 조금 움찔했다. 연관이 있는 사람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사이랄 게 뭐 있겠어요. 그냥 동네에 사니 오고 가다 몇 차례 본 것뿐이지요. 하지만 긴 것도 같아요. 눈매며 콧날이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라는 거야. 긴거야 아닌 거야. 그걸로는 부족하지. 그래 그럴 거야.

상하이 신문 말고 다른 곳에서 기사 난 것 있나요?

그래서 영자지도 사고 일본 측에도 알아봤으나 다른 내용은 아직 몰라. 일본은 일부러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뺌하고 있어. 그런 것이 알려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나라도 안 알릴 거야.

말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용희에게서 신문을 받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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