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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생명존중 세계 평화를 적어 주던 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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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 세계 평화를 적어 주던 때가 떠올랐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09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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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의 눈은 안내장에 가 있었다. 한문이 제법 그럴싸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서예의 대가로도 손색이 없다. 예서는 물론 행서에도 일가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누가 썼나 살펴보니 총리대신이라는 직함이 보인다. 총리대신 정도면 이 정도는 해야 하나.

호사카는 식순을 죽 읽어 내려갔다. 자신이 인사말을 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인사말은 가볍게 하자. 내 인사말은 면담 내내 이어질 것이다. 사회도 보고 주제 발표도 한다. 말할 기회가 무수히 있으니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학생의 축하 노래도 있다. 제목은 나와있지 않다. 참석자들의 명단은 그 아래 있다. 알만한 인물들이군. 종로서장이 준 파일에 나와 있어 한결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름옆에 사진도 있다. 흐릿하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어서 낯이 익다. 그래 미리 알아서 나쁠 게 없지. 그는 안내장을 접으려다 말고 내선일체를 뜻하는 ‘두 땅이 한 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는 조선어를 접했다.

조선글도 잘 쓰는군. 명필이야 명필.

호사카는 그렇게 중얼 거리면서 옆에 있는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날을 살피는 눈으로 끝에서부터 손잡이까지 손으로 가볍게 쓸어 내렸다.

여보, 그걸 또 꺼냈어요?

점례가 위험한 물건이라는 듯이 눈쌀을 치푸렸다. 

늘 옆에 차고 있는데도 늘 그리워. 이 금속이 주는 차가움은 내 심장을 뛰게해. 이걸 쓸 일이 없기를 바라는 거지. 칼이 춤추면 사람 목숨은 날아가는 거거든.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말아요? 생명은 중요해요. 평생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런 생각이야.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만 되는 것 아니지 않소.

그래도요. 참을 인자를 늘 새기세요.

염려 붙어 맵시다.

호사카가 이러고 있을 때 상하이의 말수는 닥쳐오는 앞날에 대한 압박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였다.

변화는 안정된 사람에게 일종의 두려움이다. 말수는 자신에게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이 악몽을 꾸고 난 후에 보는 검은 색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안주하고 싶은 마음에 그것은 새로운 걱정거리였다.

포목점 집주인과 어울리면서 말수는 세상 물정에 눈을 떴다. 국제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곰곰이 생각했다.

결과는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패망을 조심스럽게 예견했다. 돌아가는 행태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정세분석은 아주 없지는 않다는 희박성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불과 두서너 달 전만 해도 그런 말은 먹혀들지 않았다. 미친놈 취급을 받거나 반대세력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밤새 술과 정치로 시간을 보낸 말수는 집에 돌아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잡지를 보고 방송을 듣고 신문을 훓었다. 포목점집 주인의 말을 검증했다. 상하이에서는 미국 신문들을 어렵지 않게 구해 볼 수 있었다. 일본 언론과 비교해 볼 수 있고 그것은 그에게 어떤 판단력을 새롭게 요구하지 않았다.

여보, 무얼 그리 열심히 읽어요. 나도 알려줘요. 좋은 소식 있나요?

별거 아니요.

어제는 몇 시에 들어왔어요? 기다리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당신이 옆에 있어요. 안심은 됐지만 요새 무리하는 것아니에요? 당신.

용희가 가볍게 스치듯이 물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오후에 수술 있나?

공사장에서 다친 노동자 재수술 한 건 생각 안나요?

그것 말고는?

없어요.

왜 또 어디 가게요.

잠깐 시내에 나갔다 오려고.

당신 요즘 병원보다는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있어요. 그건 알고 있지요.

그래 알고말고. 당신이 있으니 그러지.

하지만 병원장이 낮에 자리를 자주 비우면 어떡해요. 급한 환자가 오면 어쩌려고요.

당신을 믿어. 그리고 페이닥터 진군도 일을 잘하니.

말수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요즘 병원보다는 용희 말마따나 다른 일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병원 개업의 초심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관심은 온통 전쟁에 쏠려 있었다.

그렇게 혐오했고 한 발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전쟁에 그는 발을 깊숙이 들여놓고 있었다. 그것이 갑갑한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리에 맞았다.

옛날의 말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으나 피는 속일 수 없었다. 뱃사람의 기질과 광산 노무자로 잔뼈가 굵었던 그는 병원의 잔일보다는( 그는 환자를 상대하는 것을 그렇게 불렀다.) 큰일을 하고 싶었다.

일본은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았으나 자신을 살린 것도 일본이었다. 상해서 병원을 개업한 것은 일본 장군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신분 세탁을 눈감아 주고 인정해 준것도 그였다.

그런 일본이 무너지는 것은 그에게 어떤 마음의 빚을 영영 값지 못하는 찜찜한 기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승승장구하는 일본이라면 병원 일에만 신경을 써도 된다.

하지만 돌아가는 형세는 분명 불리해 지고 있다. 진주만의 기습이후 기세가 올랐으나 그것 때문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미국의 개입은 일본에게 불리하다.

말수는 본능적으로 일본이 상대할 적으로 미국은 너무 셌다. 중국과 러시아와는 또 다른 상대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이 버티고는 있으나 세력 면에서는 일본이 해 볼 만하다. 그러나 미국은 아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미국 세상이다. 그는 미국 신문과 잡지를 읽으면서 일본의 열세를 인정했다. 포목점 집 주인은 여전히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아무리 판단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너는 도대체 누구니? 묻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순간순간 변했다. 독립을 지지 했다가 어떤 때는 친일로 돌아섰다. 중국을 응원하다가도 갑자기 러시아를 밀었고 미국이 정의롭다고 말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분석하는 판세는 대체로 맞았다. 그는 어느 한 편에 서기 보다는 유리한 쪽에 붙는 사람이었다. 말수는 그가 부러웠다. 심중을 아무렇게나 드러내지만 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는 사람이 포목점 집 주인이었다. 

일본의 지고 있지요? 어떻게 보세요. 형님은.

나 말인가. 나도 동생 의견과 비슷해.

포목점 집 주인이 술병을 열었다. 

선생도 알다시피 지금 일본은 아니라고 하지만 뒤로 자꾸 밀리고 있어. 줄다리기를 하다보면 알잖아. 한 번 밀리면 따라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 대개는 그대로 게임이 끝나는 수가 많지.

포목점 집 주인은 동생이라고 했다가 선생이라고 했다가 말수에 대한 호칭을 제멋대로 부르면서 오늘은 일본이 열세라고 주장했다.

그래요, 일본이 밀리는데요. 어쩌면 좋아요.

아니 동생은 친일파인가요? 밀리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말수는 순간 당황했다.

그렇다기보다는 이기다가 지고 있으니 그런 거지요. 딱히 지지할 이유는 없어요. 알잖아요. 이국땅에서 조선사람은 다 애국자에요. 

친일은 애국이 아니고? 

포목점집 주인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말수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런데 말이요. 의사 선생. 일본이 밀리는 데는 독립군의 힘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소? 요즘 독립군의 위세가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보다는 대단하게 크고 있어요. 따로 군기지를 마련했고 거기서 광복군 3개 사단이 훈련하고 있어요.

3개 사단이라고요? 그렇게 많이요? 

그 수를 일본 밀정은 최근에야 파악했어요.

그 많은 인원을 훈련하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요. 독립군에 그런 거금이 있나요?

그래서 말인데요. 의사 선생이 일본의 부진을 두려워한다면 간혹 상해 조선인 단체에 기부하는 돈 있잖아요. 그걸 당장 끊으시오.

내가 얼마나 낸다고요.

십시일반이라는 것 모르나요?

나도 어쩔 수 없이 내고 있지만 지난달부터는 끊었어요. 그게 다 독립군 자금으로 들어가요. 알겠어요.

그가 술을 따랐다. 독한 빼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둘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 말이요. 그 독립군 수장이라는 임정 주석 말이오. 그 사람이 지금 조선에 폭파 전문가를 파견한 것, 알고 있나요? 주석이 일차 조선 총독부를 공격했고 지금은 이차를 준비하고 있어요. 아마 지금쯤 터졌는지도 모르고요.

배후가 주석이라는 건가요?

내가 언젠가 말했지요. 그 휴의라는 놈이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조선에 급파됐어요. 미군의 특수 훈련을 받고 잠입에 성공했는데 아마 조선발로 큰 뉴스가 곧 올 겁니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쉿, 그가 덥수룩한 콧털 아래에 검지를 세우면서 주의를 주었다.

선생 생각은 어때요? 그런 독립활동은 일제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너무 뻔한 질문이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말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그 모든 책임에 임정이 있고 최종 결정권자가 주석인가요? 하고 물었다.

말해 뭣해요. 선생은 병원에만 있으니 세상이 어둡게 보이지만 말이요. 한 발만 밖으로 나오면 온 세상의 일들이 다 보입니다. 나처럼요. 일본이 패전한다면 임정 때문일 수도 있어요. 여기 상하이는 물론 만주 연해주 북간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독립군이 득시글해요. 내가 파악한 군기지만 해도 세 곳입니다.

한 곳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세 곳이라고요? 

그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국내에 진입하는 것은 시간문제에요. 국경 지역의 일본 경찰서는 심심찮게 공격을 받고 있어요. 홍범도의 봉오동,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를 뛰어넘는 전과를 올려요. 지난 총독부 급습 때 중국 장개석 정부는 충칭으로 임정 주석을 초청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을 내놓았어요. 4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조선 사람 몇 명이 하고 있다면서요.

장개석과 임정은 수시로 만나고 있나요?

한때 서먹하고 소원했던 관계는 총독부 공격이 임정의 배후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급속하게 친해지고 있어요. 장개석이 임정을 세게 밀고 있어요. 임정의 다른 조직은 러시아 혁명 조직과도 손잡고 연합군 구성을 목표로 하고 있고요.

아하, 일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군요.

일제는 현상금을 걸었지만 임정 요인들을 체포하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있어요. 그들은 신취귀몰해서 한 사람이 성을 열한 개나 쓰고 이름을 다섯 개나 쓰는 등 변장에 능해요.

성이 열 한개고 이름이 다섯이라고요?

그러나 임정은 사실 알고 보면 껍데기에요.

무슨 말씀이세요?

일본 패망이면 임정 때문이라고 두려워하더니 아니라니요?

그게 주석 하나만 없애면 와르르 무너지는 모래성이란 말이오. 우리 조선 사람들은 개인은 뛰어나지만 뭉치면 모래알이라는 걸 선생도 아시잖아요. 서로 우두머리를 하려고 이전투구가 말도 못해요. 당수가 되려고 당을 만든 것이 열 손가락도 부족할 만큼 많아요. 거기다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싸움도 하루도 그칠 날 없고요.

좌우 대립이 그 정도로 심각해요?

그러니 우두머리 하나만 제거하면 일본의 근심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조선 본토에 광복군 사단이 침투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곤란해요. 일본은 전쟁에 지기 전에 조선 전투에서 패망합니다.

결정적으로 말씀 하시는 군요?

퇴로를 잃은 일본은 어디서 식량을 보급할까요. 배급 선이 끊기면 만주의 일본군은 괴멸입니다. 태평양 전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고요.

말수는 정신없이 말에 빨려 들어갔다. 일본이 지면 조선이 독립하는 건가. 그러면 나는? 우리 병원은? 그리고 용희와 아들은? 나의 과거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

의사 자격증도 가짜로 따고 일본인 행세하다가 중국인으로 다시 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삶도 송두리째 부정된다. 병원을 잃을 수도 있다. 말수는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데 최악의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고 있었다.

지난번에 본 몸 안의 상처는 권총 탄환의 흔적이었다. 약간만 빗나갔어도 총알은 내장을 관통해 생존하기 어려웠다. 그는 강한 생명력으로 누구나 죽는다는 말을 뒤집었다.

의사는 무려 4시간 동안 지켜보다가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있자 수술을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사람이다. 말수는 그를 알고 있다. 이미 치료한 경험이 있다.

흰 옷을 허리 위로 걷어 올렸을 때 보았던 선명한 흉터자국. 손가락 만한 구멍이 한 눈에도 총알이 뚫고 지나간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복통을 호소하던 그는 나중에 나타나서 의사 선생 때문에 만성 소화불량이 해소 됐다며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서류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생명존중 세계평화라는 여덟 글자가 세로로 가지런하게 씌여 있었다. 선생이 임정에 주는 관심에 대한 작은 보답 입니다. 글자가 조금 흔들려 보이지요. 남들은 이것을 떨림체라고 하나 나는 총알체라고 부릅니다.

그 날의 일이 말수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그 글씨는 말수의 병원 책상 위에 표구된 채로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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