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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06:02 (금)
그는 해보니 안 되더라는 말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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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해보니 안 되더라는 말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07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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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는 배개를 가슴에 대고 방에 엎드려 있다. 대원 두 명은 편안하게 누워있다. 가볍게 코를 골면서 세상일 잊었다. 휴의는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러다가 다시 읽기를 멈추고 일어나 앉았다. 잠깐 쉬면서 생각읗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희미하게만 보였던 눈앞의 세상이 점차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시작한 운동에 대한 이론적 확신이 서고 있다. 일어선 그것은 죽지않고 단단하게 자신의 몸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래, 이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애벌레였다. 이제 날개를 말린 한 마리 왕벌이다. 

휴의는 무한한 자신감이 용광로의 쇳물처럼 끓어 올랐다. 책을 잡은 손이 잡은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꿩 아니면 닭이라고 했지? 그러나 그 닭들은 꿩만큼의 가치가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가볍게 그는 몸을 떨었다. 일이 성사됐을 때 나오는 그런 만족감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보다 몇 곱절은 더할 것을 생각하니 미소보다는 결기가 더 굳어졌다.

청일전쟁이니 러일전쟁이니 러시아혁명이니 중국공산당이니 하는 것들의 태동은 그에게 조선이 어떤 식으로 식민지가 됐는지를 일깨워줬다.

부패한 황실은 외세에 침략기회를 주고 막아내지 못했다. 무능한 정부에 대한 분노가 솟았다. 제 백성을 쥐어짤지만 알았지 외세의 침략에는 무능했던 왕실에 대한 적개심이 새삼 솟았다.

'무능하고 부패한 세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휴의는 이 구절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민중은 여전히 황실과의 유대관계를 원하고 있다. 느슨하기는 하지만 언제든지 이어질 수 있는 폭발력이 있었다.

3.1 만세 운동 때 보지 않았던가. 하나로 모을 힘이 필요하다. 구심점이 없는 투쟁은 의미가 없다. 임정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일제를 물리치고 나면 임정이 새 정부가 되어 운동 중에 죽은 수많은 넋들에 대한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사분오열된 왕실의 끄나풀이 다시 외세를 등에 업고 허수아비 왕으로 복귀할까. 휴의는 물음표를 던지면서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기어이 해답을 찾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나라의 붕괴는 외세의 침략 이전에 내부 붕괴로부터 시작한다.'

그래, 그렇지.

일제가 오기 전에 조선은 이미 낡은 기와집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허술한 다리는 언제든 가라안지. 철거하고 다시 설치하거나 보수를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 아니 그러려는 생각조차 없었던 거지.

전쟁이 나자 왕실은 도망을 쳤고 고위관리들은 제 목숨 지키려고 숨기에 바빴지. 핍박받던 무지렁이들이 창이며 낫을 들고 싸웠어. 도망간 그들이 오고 숨었던 그들이 다시 활개 칠 수 있도록 제 목숨을 바쳤던 거지.

휴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점에서 휴의가 두려운 것은 조선왕실의 복귀였다.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인재들이었다. 그들을 대체할 세력이 아직은 없다.

임정도 하나로 뭉치기보다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독립운동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한인애국단도 세력이 너무 약하다. 어디하나 기댈 언덕이 없다.

일제는 그에 비해 너무 강하다. 무단통치에서 문인통치로 돌아선 그들은 영리하다 못해 영악해. 그들을 받쳐주는 조선 지식인들은 기고 만장하고 있어. 

민족의 배신도 모자라 민족성마저 비웃고 있어. 게으르고 나태한 민족은 개조해서 일본에 협조하면서 사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그래 그런 자들은 차고 넘쳐. 강한 일본에 저항하는 무모한 짓을 멈추고 하나된 일본에서 누리며 살자고? 좋은 말이다. 누리는 것은 너희뿐이라는 것은 왜 밝히지 못하니? 

스님은 말했어.

그런 말로 혹세무민하는 조선 천재 두 명에게 호통을 쳤어. 스님도 내 편으로 끌어 모으자, 둘은 의기 투합했던 조선의 천재 문장가 두 명은 그러나 바로 쫓겨났어. 배신자 소리를 들었지. 너희놈들은 이미 죽어서 내가 장사 지낸지 오래다. 

너희 놈들은 일제의 개가 되어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비록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 남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죽겠다. 서슬퍼런 스님의 소리에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지.

그러면서 이렇게 한 마디 했어.

땡중 놈이 세상을 알아.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염불이나 열심히 해라. 잿밥은 우리가 먹으마. 그들은 후회의 눈물대신 엿으나 먹으라고 종주먹을 들이댄거야. 

휴의는 하,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구멍이 간질간질해 찬물이라도 들이켜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그래, 너희들의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주마.

그러나 지금까지는 잘 해왔지만 앞으로는 안 될 걸.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마. 그래, 입만 열면 민족을 위해 산다고 했지, 그러니 민족을 위해 죽어라. 너희들의 애국이 그런 것이었듯 내 식의 애국은 이런 거야. 그러니 탓하지 마라. 식이 다르다고 해서.

내일 만찬이 있어. 폭약은 지붕위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지. 독립운동은 죽은 거야.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로스케나 짱개나 양키나 다들 조선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보고 있어. 문화통치의 덕이지. 네 놈들은 앞장서서 그것을 퍼트렸어. 사이토 총독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겠지. 그래 죽어서라도 그 고마움을 갚아라. 

조선민을 존중한다고. 조선의 문화를 지키고 계승하세 해 준다고. 너희 같은 유명인이 그렇게 떠들고 다니니 흰옷 입은 사람들은 믿고 있지. 철썩 같이. 나도 한 때는 독립투사였소. 그러나 해보니 안 됩디다. 안 되는 이유는 일본은 세고 조선은 약하기 때문이오.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선진국이 된 일본을 우리 조선은 따라야 하오. 조선인으로 살기 보다는 일본인으로 살아야 행복하단 말이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이런 식의 연설을 했다.

해보니 안되더라.

그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 조선민들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해 본 사람의 말을 믿었다. 저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도층이 하라면 따라 하는 게 이득이다. 

당신은 해봤어? 해보지도 않고 말로만 수군대지. 뒤에서 욕하고 손가락질 하지. 네가 조선독립을 위해 일 해 본 적이 있느냐고. 

핏대를 올리며 말하는 그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해보지도 않은 무지렁이들은 그 즉시 찌그러졌다. 

휴의는 다시 엎어졌다. 그러나 책에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그럴만도 하지. 지도층의 변심을 이해해야지. 별 수 있나.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잖아. 왕실은 흔적만 남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조직은 일제가 장악했어.

사람들도 이름을 바꾸고 쓰는 말도 일본어가 대세로 자리 잡고 있어. 학교에서는 국어가 일본말이다.

내일이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겠지. 민심은 술렁이겠지. 조선은 숨통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지만 인공호흡으로 벌떡 일어났다고. 누가 알겠어. 그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떠들어 대는 사람이 나올지.

그래 그거 하나만이면 충분해. 내가 할 일은 거기까지야. 일깨워 주는 거지. 조선 백성들아, 죽지 않은 조선인들도 있다. 변절자의 말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만천하에 알려준다.

세계도 발칵 뒤집어 지겠지. 그 결과를 누가 따먹을까. 임정이 외교력을 발휘할 만한 능력이 있을까. 내가 아는 주석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까.

조선의 생환일까, 궤멸일까. 다시 철권 통치로 회귀할까. 치안유지법은 강화되고 둘 만 보이면 바로 체포될까. 역시 조센싱은 말로 해서는 안돼. 몽둥이가 약이야. 총칼을 들고 마구 휘둘러 댈까.

휴의는 내일 이후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 동족을 팔아먹고 제 일신의 안위를 누리는 자들에 대한 준엄한 공격이라는 데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들은 죽어도 싸다. 동족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고 있으니. 본 이득을 토해내야 한다. 유명세를 바탕으로 조선을 일본에 바칠 결과에 대한 벌을 받아야한다.

내가 내리는 벌이 아니다. 하늘이 내리는 형벌이다. 신은 때로는 정의를 위해 일을 하고 하늘은 그런 신을 때로는 돕는다. 휴의는 신은 내편이라고, 이번만큼은 반드시 우리 편이라고 믿었다. 밤은 깊어가고 있다.

휴의는 다시 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어느 여성 문인의 열띤 연설이 눈앞에 버티고 섰다. 남자들이 사라진 자리에 이번에는 여류 문인이 앞을 가로 막았다. 

조선의 어머니들이여, 황군으로 입대하라. 가서 싸우고 장렬히 전사하라. 그것이 조선민이 일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다. 아들은 총으로, 여성들은 정신으로 황군을 위문하라.

여성도 전사다, 정신대에 하루 빨리 입대하라. 위는 흰옷을 아래는 검은 치마를 입은 그 여류 문인은 제 흥에 겨워 앞에 있는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연단 아래서도 소리가 들렸다. 저 정도 강도라면 주먹이 아플 것이다. 휴의는 저 여류 문인의 손은 괜찮을까. 혹시 손이 다쳐 글을 쓰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저 손은 그냥 손이 아니다. 아무나 갖고 있는 그런 손이 아니라 조선민이 일본민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손이다. 매일신보에 그녀는 내리친 그 손으로 이렇게 쓴다.

나는 어제 광화문 광장에서 조선민들에게 호소했다. 간절한 내 호소는 먹혀들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청년들이 자원입대를 위한 서류에 인장을 꽉 찍었다. 어떤 청년은 인장대신 손을 깨물어 혈서로 맹세했다.

가미카제 특공대에 자원합니다.

어린 소녀는, 아직 이마에 피도 제대로 마르지 않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녀는 정신대 입대는 황군의 기세를 올려줄 더 없는 기회라면서 울면서 서류에 이름을 적었다.

여류문인은 연설하느라 목이 터져 피가 나왔으나 그들이 이런 식으로 보답하자 아픈 목이 자고 일어나니 씻을 듯이 나았다. 손도 멀쩡하다.

그렇지. 멀쩡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겠나. 내일은 수원으로 간다. 그리고 하루걸러 하루씩 천안 홍성 군산을 거쳐 목포로 간다. 황군을 향한 나의 열정은 쉴틈이 없다.

휴의는 다른 장면으로 눈을 돌렸다. 안경을 쓴 잘생긴 얼굴의 그녀는 언제나 조선 최초를 달고 살았다. 미국 유학도 최초요, 박사 학위도 최초다. 그가 연단에 오르자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하나의 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칼을 찬 순사들이 그들을 제지했다. 얼치기 수 천보다 한 사람의 인재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가 입었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일본은 오천년 조선 역사보다 더 길고 긴 수만 년을 우리 조선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 것이다. 일본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 세고 강해 미국이나 영국도 결국 우리 일본 앞에 무릎을 꿇을 날이 오고야 만다.

그날이 내일일지 모레일지 모르나 확실한 것은 멀지 않은 미래하는 것이다.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일본 국민으로 성스러운 전투에 나서고 있는 황군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합니다.

황군의 승리는 조선의 승리이고 조선의 승리는 우리 일본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둘이 아닌 한 몸 입니다. 이제 조선이라는 말은 입에도 담지 맙시다.

우리 일본을 위해 우리 조국 일본을 위해 다 같이 총을 들고 폭탄을 메고 적진으로 돌격합시다.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정신대 앞으로 진군 합시다. 그녀는 연설을 마치고 순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연단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며 박수를 치는 군중의 환호에 화답했다.

잠시 후 그녀는 대기하고 있던 검은 차를 타고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갔다. 다음 목적지인 YMCA로 향했다. 시간이 늦었다. 열변을 토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거기에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군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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