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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평화와 평등, 인간의 가치를 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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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평화와 평등, 인간의 가치를 재는 것이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05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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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에서 점례는 그런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한 생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코가 석자였고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급했다. 계속 살아야 할지 여기서 바로 끝장내야 할 지 고민의 연속이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한 시기였다.

그런 판국이었으니 이런 고민은 있을 수 없었고 만에 하나 있었다면 사치 그 이상이었다. 다행히 그런 사치는 점례에게 오지 않았다. 파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서는 오로지 그림이었다. 유럽 화단의 분위기를 익히고 나만의 화풍을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살기 위해 먹는 것처럼 인정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 지난 일 년간의 조선 생활도 그랬다. 미술 전람회 출품 준비로 눈코 틀새 없이 바빴고 결과는 수상으로 돌아와 보답했다.

그에게 독립이니 투쟁이니 친일이니 이런 것들은 낯선 우주의 언어였다. 그런데 이차 귀국에서 점례는 정체성의 혼란 그 자체와 마주쳤다. 위기와 두려움이 잠깐잠깐 그의 인식속으로 진흙논의 미꾸라지처럼 파고들었다.

휴의는 보이지 않아도 늘 옆에 있는 존재였다. 그가 하는 일이 위험하지만 옳은 일로 보일 때도 있었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을 그가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자랑스럽기보다는 하필 왜 오빠인가 하고 나무라기도 했다.

그런 반면 동휴의 일은 거만했고 나쁜 일로 여겼다.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조국이니 애국을 외쳤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그만한 눈치를 채기까지 점례는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위세를 드러내면서 뻐기는 것을 점례는 선천적으로 혐오했다. 더구나 그것은 학문으로 쌓은 것이 아니고 오로지 힘이었다. 총칼이 없다면 동휴의 거친 언행은 부는 바람 속은 작은 먼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고 눈 여겨 보지 않은 그런 하찮은 것.

이래저래 점례는 성숙해 지고 있었다. 정신의 폭발적인 성장이 그녀를 어지럽혔으나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은 아니었다. 그녀 특유의 뚝심은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듯이 시간이 좀 걸려도 풀어나갈 자신감이 있었다.

휴의가 하는 위험한 일의 계획을 사전에 알았을 때도 고뇌는 있었으나 나름대로 잘 대처했다. 나 잘하고 있지? 잘하는 거지? 점례는 늘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이런 자기 다짐을 했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주문같은 것이었고 이는 때때로 힘을 발휘했다. 동휴는 멀리하고 싶은 인간이었다. 죽마을에서도 왠지 섬뜩한 기운으로 집안 상견례가 있던 날에는 심하게 울기도 했다.

그와 결혼 직전까지 간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살아서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여러번 기도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긴 사람이었다. 더구나 지금 점례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휴의 말고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이용해 휴의를 잡기 위해 덫을 놓고 있다. 휴의를 잡으면 나를 잡겠지. 그러기 전에 내가 너를 잡으마. 그렇지, 어림없지. 너 같은 존재에게 잡힐 휴의가 아니다. 나 역시도 네가 꾸미는 일을 손바닥에서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다. 그러니 기다려라. 내가 웃고 네가 우는 꼴을 보기까지 종착점은 멀지 않았다.

호사카의 심중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열 길 물속 가운데 아홉 길은 보고 있으나 나머지 한 길에서 막히고 있다. 그러나 그와 나는 신뢰를 가지고 있다.

서로 어느 선까지 넘지 않으며 지켜 줄 것은 지켜준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는 사람이다. 더구나 침략주의자도 아니다. 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조선의 식민지 상태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는 그도 세상사보다는 글에 집중하고 있다. 일부러 외면하고 안 보려는 것은 그것이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예술을 향한 집념은 칭찬해줘야 한다.

여보, 소감을 좀 교환해 볼까.

당신이 먼저 해요.

그럴까. 어차피 저녁은 길고 시간은 많아. 내일 면담의 성공을 위해서는 우리가 입을 맞출 필요도 있고. 그가 남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나도 대화에 끼어드나요. 당신이 질문하고 참석자들이 답변하는 식이 아니었나요? 그것만으로도 쪽수가 많아 두어 시간은 금방 지나갈 텐데요.

혼자 떠들어 대라고. 웃는 것은 내가 할 테니. 여보, 그러지 마. 내가 당신에게 토스하는 경우가 제법 있을 거야. 피하기 없기.

점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었다.

웃는 것은 내게 맡겨요. 빼지 않을게요. 당신에게 유감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요즘 한가하거든요. 아주 아주 한가해요~.

점례는 요즘 유행하는 조선식 말을 쓰면서 억양도 연극 대본 읽듯이 했다. 말에 리듬이 실려 있었다.

나보다 당신이야. 역시 못 말려. 굳이 말리지 않을 거야. 세상 물정에 밝은 당신이 내일 면담의 프리마돈나야. 하지만 오늘은 내가 먼저 내 생각을 말할게. 서류를 보다가 번뜩하고 떠올랐거든.

점례가 호사카 옆에 한복 치마를 감싸면서 자리를 잡았다. 하오리 끈을 만지작거리면서 호사카가 자, 이제 본격적으로 연설을 해보지요, 하고 운율을 살렸다.

얼씨구나. 좋구나, 점례가 박자를 넣었다.

인간은 세 부류가 있어. 원래는 독립된 나라였다가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면 그 나라 국민은 정확히 이 셋으로 갈라지지. 첫 번째는 적극적인 협조자야. 쉽게 그냥 친일파라고 하지. 그들은 눈치가 빠르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어. 지위가 높고 배운 자들이 대개 이 부류에 속해. 파일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들이 대개 여기에 있어.

다음은 방관자. 어느 쪽에도 붙지 않고 기회를 엿본다는 점에서 친일파와 별반 다를 바 없지. 침묵은 동조와 다름없다는 것을 당신도 알지. 적극적인 친일과 소극적인 친일. 현재 조선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어.

이는 피정복국에 나타나는 현상이야. 선진국이라는 프랑스 봐봐. 독일 점령 4년 만에 완전히 갈라졌어. 부역자와 저항파와 침묵하는 자, 그러니 조선만의 특이한 상황은 아니지. 호사카가 자신의 말이 객관성이 있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여보, 오늘은 말이 좀 되네요.

그렇지,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연설도 했어.

정말요. 몰랐어요. 두 손을 들고 때로는 책상을 치며 이 연서 어쩌고저쩌고하는 그런 연설 말인가요.

정확해.

저도 포두주 한 잔 주세요.

좋지. 당신은 타이밍의 귀재야.

잘 모른다고 놀리지 말아요.

자, 건배하자고.

세 번째는 휴의 같은 독립투사들이지. 그들에게 투사라는 단어는 전투 의욕을 불러일으켜. 대단한 호칭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죽음을 각오하는 그 정성이 대단해.

내 나라를 찾겠다는 신념은 막기가 어려워. 정복자에 대한 피압자의 정당한 권리. 당신 파리에 있을 때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해 많이 들었잖아.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우는 것은 가슴의 피가 부글부글 끓기 때문이지.

뜨거운 피 하나로 덤비는 거야. 생각해 봐, 누가 세겠어. 휴의와 동휴. 둘은 플라이급과 헤비급으로 게임이 안돼. 죽기로 싸운다면 죽기밖에 더하겠어. 그러나 간혹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길게 늘어지는 경우가 있어.

다들 1회를 못넘 길 거라고 예상하지만 중반전을 넘어서도 버티잖아. 조선이 그래. 참 질긴 민족이야. 무려 30년이 넘게 지배를 받고 있는데도 굴복하지 않아. 무릎꿇기 보다는 코가 깨지는 것을 바라거든. 비록 적은 수지만 그들은 다수보다 힘이 세.

점례가 끼어들었다. 호사카가 더 말을 하지 않고 마른 침을 삼키면서 자신의 차례라고 눈짓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막힐 게 없었다.

당신과 나는 조금 달라요. 내선일체라고는 하지만 태생이 난 조센징 이잖아요. 그래서 조금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어요.

그래 그거야. 당신은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논리적으로 나온다니까. 내가 원하는 당신의 모습은 그거야. 난 감성도 좋지만 논리를 더 좋아해.

만약이라는 수식어를 써볼게요. 역사에서 그것이 통용된다면 말이죠. 만약 일본이 침략이든 평화를 위해서든 아니면 지원을 위해서든 조선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런 식의 인간 나누기는 의미가 없겠죠.

지당한 말씀.

그래서 그런데요. 일본은 조선에 와서 많은 일을 했어요. 전기가 들어왔고요. 전차가 다니고요. 신식 건물이 생기고 주택이 개량됐어요. 도로가 넓어지고 신문이 나오고 방송도 생겼어요. 한마디로 조선은 일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지요.

숨 넘어가겠어. 당신 발음이 좋은 건 알겠지만 천천히 그러나 빨리.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둘은 상반되는 개념이잖아요.

아냐, 난 이 말이 좋아. 천천히 빨리.

알았어요. 어쨌든 후진이나 긴 정체에 빠진 조선에 일본이 온 것은 전진을 의미해요. 처음에 파일을 읽을 때 나는 친일파에 조금 분노했던 게 사실이에요.

누군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하고 누군 양지를 위해 친일을 하느냐고요. 따지고 싶었지요. 그런데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세 부류의 인간에 대해 어떤 인간이 우월하고 열등하고 아니면 더 좋은 인간인지를 판단하기를 유보했어요.

먼저 독립파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이유는 하나니까요. 조선의 독립 말고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없어요. 그러나 친일파는 다르죠. 그들은 국민을 계몽해요. 백성을 일깨워요. 교육자들만 해도 그렇죠.

그들의 열성이 없었다면 조선 각지에서 그런 훌륭한 인물들이 나올 수 없죠. 김선생님을 욕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분이 그런 결정을 내릴 때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나요.

욕을 할 줄만 알지 배우고 때로 익히면서 자신을 단련시키지는 못했죠. 이름만 세 글자인 그 분에 대한 비난도 수정되어야 하고요. 지식인의 애국 방법을 놓고 방향에 대한 지적은 있을 수 있으나 총체적으로 매도해서는 곤란해요.

듣고 보니 내가 할 말을 당신이 하는군. 말하자면 당신은 친일 쪽에 기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같은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 느낌이 맞는 거지? 친일 편이지?

글쎄요.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당신이 분류한 세 부류 중 어디에 속하나요?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곤란해. 딱 부러지게 나눌 수가 없거든. 독립파는 아냐, 그렇다고 적극적인 친일도 아니고 방관자 쪽에 속하지만 그 역시도 미적지근해. 당신은 네 번째 부류라고 해야 할까. 속을 모르는 인간.

하하하 점례가 크게 웃었다.

그래요,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휴의 애기가 나오면 동점심과 두려움이 일고요. 동휴가 등장하면 마음이 편하면서도 괴로워요. 회색인가요? 나는?

그러면, 점례가 호사카를 쳐다봤다. 눈이 반짝 빛났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적당한 말을 찾는 듯 했다.

대답을 유보하겠어. 당신도 모르는 당신을 내가 알기는 어렵다는 이유를 댔다. 대신 나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게.

호사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난 일본 사람이니까 당연히 친일파지.

일본 사람 조선사람이 어딨어요? 우린 내선일체잖아요.

맞아, 미안, 미안 미안해. 가락에 맞춰 노래 부르듯이 이번에도 또 호사카가 노래 부르듯 대꾸했다. 재미들린 듯 했다.

친일파지만 독립파에 대한 이해도 있어. 역지사지인 거지 말하자면. 조선이 일본을 침략했다고 반대로 생각해봐. 난 어땠을까. 독립파가 됐을까 아니면 친조파가 됐을까.

아마도 친조파 쪽일 거야. 그러면 글은 사치가 되는 거지. 나라가 먼저지 글이 먼저냐고 따지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까. 당연히 나라가 먼저요. 내 소원은 글 잘 쓰는 소설가가 아니라 완전한 일본의 독립이오 하고 말하겠지.

난, 거기까진 나가지 못했네요. 그래요. 저도 어쩌면 당신과 같은 편일지 몰라요. 똑 부러지게 친일파는 아니지만 그들을 비난할 자격은 내게 없어요. 독립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친일이니까요.

친일이 그렇게 어렵다고 봐?

그럼요. 그들이 그 길을 가는 과정이 얼마나 험란한지는 당사자 말고는 모를 겁니다. 꽃길만 간다고 생각하지만 아닐걸요? 쏟아지는 숱한 눈초리를 견뎌야 하는 힘을 얻기까지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겠어요?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 맷집은 어렵게 만들어지지. 내가 이것만은 약속할게. 당신이 조선인 대표라고 생각하고. 차별을 없앨게. 우린 동족이야. 같은 민족이라고.

조선인의 많은 수가 일본을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해. 장교 빼고는 병사 전부가 조선인으로 구성된 443부대 알지? 그 부대는 전과가 대단해. 일본인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오겠어. 난 미국과 영국이 미울 뿐이지 조선은 아냐. 

그렇군요. 그들에 대한 변명이라고나 할까요. 역지사지 말씀하셨죠? 나라면 어떨까. 내가 그 입장이라면. 이런 상태가 되면 품이 넓어져 이해해 줄 때도 있고요. 레지스탕스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줬는데 친일파를 이해하니 좀 얼떨떨 하기는 하지만 난 프랑스인이 아니잖아요.

휴의의 영향도 조금은 작용했겠지.

호사카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는 말을 삼키느라 목을 한 번 움찔했다. 그러나 꺼내지 않았다.

프랑스에 레지스탕스가 없고 조선에 독립운동이 없다고 생각해 봐. 그런 민족이 민족이겠어. 미개인이나 야만족에 다름없지.조선사람이 민족으로 우대받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저항하는 소수 때문에 가능해. 역설적이지.

친일파는 독립파 때문에 위상이 필요 이상으로 높아진 점을 감사해야 할 거야.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친일은 눈에 띄지 않거든. 그들이 없고 오로지 친일파만 있다고 가정해봐.

그들을 우대할 이유가 없지. 작위를 주고 땅을 주고 권세를 주겠어? 생각해봐. 그것은 독립파를 견제하는 조건이야. 한편 독립파는 되레 일본의 발전에도 도움이 돼. 도전이 없는 개혁이나 발전은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있은 적이 없거든. 씨를 말리기보다는 적정한 수를 유지하는 게 일본에게도 유리하다는 거지.

새로운 논리네요. 언제 연구했나요? 당신은 강단에서서 학생들을 교육시켜도 만점 선생님이 될 거에요. 짝짝짝.

아직은 일러. 시켜주면 잠깐은 하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

기분이 좋아진 호사카가 정성을 담아 말했다.

이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나만의 논리야. 당신에게 처음으로 발표하는 거고.

영광입니다. 퍼트리면 난 욕 먹을 거야. 내무대신의 아들 자격이 없다고.

입을 꼭꼭 봉하고 있을게요. 됐죠? 누구 나말고 들은 사람 없겠죠. 점례가 과장된 몸짓으로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싱거워.

간장을 좀 줄까요? 

어, 그만 내게 손들었어. 항복이야 항복. 

호사카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이제 다 정리된 거지요?

이런 식이면 내일 대화는 훈훈하게 전개될 것 같아요. 친일파들에게 새로운 논리도 제공하고요.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니까요.

그래, 그들과 다툴 생각은 없어. 그럴 이유도 없고. 예술은 평화와 평등이거든. 인간의 가치를 재는 것이고. 전쟁을 독려하는 예술은 질이 낮아. 그 점은 지적할 거야. 그런데 또 궁금한 게 있어. 이 건 꼭 물어볼 거야. 왜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했는지? 지금은 왜 친일을 하는지? 똑같은 질문을 돌아가면서 할 거야. 대신들한테는 답변할 기회는 주지 않고. 그들은 뻔한 답을 낼 거야. 정치인들은 그렇지. 안 그래?

옳은 말씀.

점례가 동의했다. 

예술은 평화와 평등이고 전쟁을 독려하는 예술은 질이 낮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찬성해요. 여성 문인들에게 그 점을 한 번 집중적으로 캐서 물어봐요. 모성애는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 건 당신이 알아서 해. 

그럴까요. 

자, 마십시다. 대단히 진지한 하루였어. 간혹 우리 이런 토론회 하는 건 어때.

그래요. 여보. 그런데 여보?

응 말해봐.

내일 일정을 취소하면 어때요?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호사카는 말이 없었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다니. 하지만 점례는 생각이 있었다. 그들이 모두 폭약 아래에 있다면 누가 글을 쓰고 누가 그림을 그리고 정치를 하고 교육을 할지 걱정이 됐다.

조선 민중을 깨칠 사람이 없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죽는다. 죽을 만한 사람이라도 해도 그렇게 죽는 것은 조선에 어떤 이득이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핍박은 더 세질 것이고 독립투쟁은 더 어려워진다.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사 독립이 된다고 쳐도 그들이 없다면 어떻게 국가를 재건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그래요. 그냥 해본 소리에요. 술을 먹으면 아무말 대잔치처럼 말이 막 나오네요. 그들을 너무 기죽이지는 말아요. 예술인들은 자존심이 있는데 그걸 꺾으면 나쁜 인상을 주죠. 살살 하라는 의미고요.

알았어. 내일 일어나자마자 당신 말을 복기할게. 필요하다면 손에 적어서 대화 중에 펴서 살펴볼게.

미안해요. 여보. 그런데 정오잖아요. 만찬이. 우린 30분 늦게 출발해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이 호사카는 또 말하기를 주저했다.

주인이 머슴들에게 그 정도 시간을 기다리게 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겠어요.

점례가 세게 나갔다.

그래도. 약속이란 게 있잖아.

당신 체면도 있잖아요. 당신은 아버님과 동급이에요. 천황 다음이란 걸 잊지 마세요. 기다려야 하고 기다린다고 해서 불평할 수 없어요. 누를 때는 눌러야지요?

당신 요즘 이상해. 보짱은 알겠는데 갑자기 나오는 말이 기상천외하단 말이야. 상상 이상이야.

감이 안 좋아요.

미신이라면 나도 믿을 만큼 믿어. 종로서가 알아서 할 거야. 경호가 걱정이라면 말이지.

술 때문이죠.

투명한 잔을 들어 올리며 점례가 잔을 부딪쳤다.

그래 건배. 술 때문이지. 다 술이 원수지 뭐.

좋아요.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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