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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5-20 21:02 (월)
지금은 잔소리가 필요한 시간이라며 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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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잔소리가 필요한 시간이라며 그가 웃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1.0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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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성이 네 글자인 그분의 이력은 앞서 소개한 분과 내용이 대동소이했다. 그래서 얼굴과 이름을 지우고 보면 동일인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살아야 바른 인생이다.

점례는 자신의 생각을 일단 이런 식으로 정리했다. 그래서 호사카가 읽은 소감을 묻는다면 두루뭉술하게 처음에는 글렀으나 나중에는 방향을 바로 잡았다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숙제를 끝낸 것처럼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휴의 목록을 다시 한번 들춰 봤다. 그러나 상당수 분량이 지워져 있거나 검은 먹으로 칠해 있어 어떤 내용이 들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점례는 지워진 부분을 상상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그는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군인으로 사회에 발을 내 딛고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간도특설대에 특차로 뽑혔고 독립군 토벌 작전에 나섰다. 혁혁한 공을 세워 진급에 진급을 거듭해 초급장교의 꽃인 대위에 올랐다. 군인의 길을 걸은지 불과 3년 6개월만이었다.

그는 나머지 독립군 잔당을 쫒기 위해 경찰과 협력해 조선 팔도를 위아래로 훑고 다녔다. 부산에 있다가 어느 날은 함경도에 있고 그다음날은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몸은 고되도 하는 일이 국가를 위한 것이었기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사라진 조선 대신 일본을 위해 일하는 것은 기분 좋았다. 신식 총도 받고 몸에 어울리는 군복을 입을 때 그는 보령 죽마을 출신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더구나 친구 동휴는 경찰로 입신출세했다. 선의의 경쟁을 하자. 그런 마음으로 그는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잡은 독립군을 고문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독종을 만들었을까. 살이 찢어지고 뼈가 갈라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 조직의 수장에 대해 침묵했으며 하는 말은 오로지 조선독립을 위해서였다.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고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조선인이니까. 그 한마디로 족했다. 죽음 직전에 꿈틀거리는 육체에서 내뱉는 한 마디는 휴의의 마음을 흔들었다.

조선인은 그뿐 아니라 나도 조선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거기에 있지 않고 거기에 있는 자들을 거기에서 빼내 오는 일이었다. 그러기를 여러 날 여러달이 되풀이됐다. 눈앞에 벌건 인두를 들이대는데도 조선독립을 외칠때는 차라리 죽었으면 했다. 육체가 불쌍했다.

한 마디만 해다오. 나와 조선 독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그러면 바로 풀어 주겠다. 옷 입혀 주고 차비 줘서 돌려 보낼 테니 제발 그렇게 말해 주시오.

그 말을 들은 그는 그러지 않고 침을 그러모아 그러는 자신의 얼굴에 뱉었다. 일본의 개가 되느니 조선의 천한 백성으로 남겠다. 휴의는 침을 닦았다. 어떤 분노도 일지 않았다.

네 가족이 기다린다. 부모 형제가 얼마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애가 타겠니.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말하기 싫으면 사인만 해다오. 내가 다 만들어 왔다.

성명, 이름, 출신지, 생년월일 그 다음에 내용: 위 사람은 조선의 독립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확인하기에 여기에 서명합니다. 김남주. 여기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그리던지 점을 찍던지 아무거나 표식을 남겨 주시오.

그러면 바로 당신을 풀어 주겠소. 휴의가 말했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 더 큰 불꽃이 튀었다. 왜놈 아래서 배부르게 먹는 돼지가 되느니 조선에서 배고픈 넝마주의를 택하겠다. 다시 침이 날라왔다.

이번에는 모을 침이 없었다. 핏덩이가 휴의의 눈에 박혔다. 쓰라렸다. 에이, 씨발. 그는 이런 소리를 부지불식간에 내뱉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손에 든 인두를 살에 가져가지 않았다.

그래서 고기타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날 밤 휴의는 앓았다. 속에서 열이 났다. 조선인이 뭐 별건가. 세계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는 마당에 내선일체면 그것으로 족하지 왜나 조선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아니야, 조선 사람은 조선땅에서 살고 일본 사람은 일본 땅에서 살아야지. 왜 일본 사람이 조선땅에 와서 주인행세를 하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니고. 강제로 쳐들어와서는 봐, 높은 자리는 죄다 왜놈들이 차지하고 있잖아.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도 일본놈이다. 아니야, 조선놈이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왜놈은 월급이라도 주지. 조선 관리는 그런 게  있었나.

제놈들 뱃속을 채우려고 곯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탈해 갔잖아. 그래도 그렇지. 뺏기더라도 조선놈에게 뺏겨야 기분이 덜 나빠. 휴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두 마녀가 서로 자기 쪽으로 오라고 당기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능지처참처럼 왼쪽 팔과 오른쪽 팔이 따로 놀지 모른다. 고문은 내 체질이 아냐. 더는 인두질을 못하겠어. 고기타는 냄새도 구역질이 나고.

그만두자. 이 짓 말고 다른 짓을 해도 목에 거미줄이 칠까. 군인이 된 뒤로 처음으로 휴의는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꼈다. 하고 많은 일 중에 왜 하필 자기 민족 괴롭히는 일로 밥벌이를 해야 하지.

그날 밤 내내 휴의는 이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 깬 그는 물 물 물을 가늘게 외치는 늘어진 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도 되지만 그날 따라 휴의는 동정심을 느꼈다.

그는 주전자의 물을 따라 그에게 건네려다 컵을 잡을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직접 입에 갖다 댔다. 그가 침대신 고맙소하고 말했다. 그 말이 여간 고맙게 들리지 않았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이었다. 가식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고맙소라는 그 말은 생명의 은인에게나 하는 말과 같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늘의 별은 그날따라 크고 낮게 깔려 있었다.

휴의는 다가갔다. 그리고 손에 감긴 수갑을 풀었다. 가시오. 가고 싶은 대로 가시오.

나와 함께 갑시다. 당신은 조선사람 아니오. 거기까지 휴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따라 나서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시간이 없었다.

곧 동이 터 올 것이고 병사들이 잠을 깰 것이다. 그는 권총 두 자루를 챙겼다. 실탄도 넣고 관물대에 숨겨 놓은 돈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같이 갑시다.

이것이 휴의가 군인에서 독립투사가 된 경위였다.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동휴가 여러 경로를 통해 받은 휴의에 대한 첩보를 상상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정도만 해도 휴의가 왜 일제 장교에서 독립투사가 됐는지 파악하는 단초는 됐다. 인간의 심리는 묘한 것이다. 아주 작은 것에서 큰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점례는 휴의의 복잡한 심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어릴 때부터 봐왔던, 그에게는 어떤 신의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배가 고파도 먼저 동생을 챙겼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꺼리는 일은 도맡았다. 양보할 줄 알고 배려하는 힘이 남달랐다.

그런 바탕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 오빠가 하는 일은 언제나 칭찬을 받았고 믿음직스러웠지. 그렇다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 전혀. 그렇다고 비난할 생각도 없어.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운명은 그에게 어떤 선택을 내릴지 아무도 모르잖아.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점례는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일부러 많은 말을 했다. 기분 좋은 얼굴로 와인도 한잔했다.

내일 만찬에 대한 의견도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호탕하게 웃으며 호사카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받았다. 예상이 맞아떨어졌을 때 웃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당신은요? 나도 엇비슷해. 조선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는 일본사람으로 사는 게 더 문명적이잖아. 안 그래?

맞아요.

그리고 호사카가 잠깐 사람을 만나겠다며 자리를 뜨자 점례는 바로 호텔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마 동휴를 만나겠지. 나를 따돌리고 둘이 은밀한 밀담을 하겠지.

그러나 난 동휴보다는 호사카를 믿어. 8층을 눌렀다. 그러나 3층에서 엘리베이터는 멈췄다. 중년의 노신사가 모자에 손을 얹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서늘한 기운과 따뜻한 기운이 문이 닫히면서 좁은 공간을 에워쌌다.

휴의였다. 점례는 휴의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점례 손을 잡았다. 내일 정오 일본각 만찬에 삼십 분만 늦게 와줘. 당신과 함께 있는 호사카도 꼭 그렇게 해.

휴의는 9층을 눌렀다. 점례는 오빠하고 짧은 목소리를 냈다. 이유는 묻지 말고. 그래야 해 살려면. 오빠 믿지. 잘가 점례야.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만남이야. 더는 나를 볼 일이 없을 거야.

나로 인해 네가 피해받을 일은 없어. 난 너를 사랑하지만 넌 나를 미워해야 해. 그리고는 품에서 작은 엽서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점례야,

응.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야, 내일 삼 십 분 늦게 도착. 그것만 기억해.

응, 오빠.

점례야, 날 미워한다고 말해. 어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기 직전이다. 오빠 미워. 그녀는 나갔다. 휴의는 9층에서 내려 비상계단을 이용했다.

방으로 들어온 점례는 전등 대신 촛불을 켰다. 분위기가 제법 있었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됐다. 그녀는 엽서를 촛불 아래 갔다 댔다.

죽마을이었다. 해당화가 핀 새하얀 모래사장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엽서가 더 넓었으면, 우리 집이 나왔을까. 손을 잡은 두 사람이 등을 보이고 달려나가고 있다.

발에 밟힌 모래가 포말처럼 부서져 종아리 부근에서 흩어졌다. 나와 오빠. 잡은 손이 단단했다. 그녀는 웃었다. 아니 울었다. 소화 18년 9월 3일 휴. 점례는 휴에서 눈을 멈췄다.

오빠.

그림은 그런대로 그렸다. 프로는 아니었다. 점례는 그 순간에도 그림을 평가했다. 화가의 본능이었다. 이런 재주도 있었네. 풋,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화가가 될 수 없어. 타고나야지.

점례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촛불 앞에 엽서를 들이밀었다. 그러다 말고 다시 엽서를 촛불에서 떼어냈다. 왼쪽 상단에 노을 아니면 일출이겠지 하면서 대충 보았던 붉은 기운이 가만히 보니 아니었다.

날개를 단 폭탄이 터져 투하되는 장면이었다. 세 개의 폭탄이 하늘에서 급하게 내려오고 있다. 무엇을 암시하는 걸까. 그녀는 현미경으로 들춰 보듯이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폭탄이 떨어지는 바로 그 아래에 일본각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서양식 이층 건물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곡선이 화려한 한옥이었다. 순간 점례는 아찔했다. 그렇구나. 내일 여기에 폭탄이 떨어지는구나.

점례는 망설이지 않고 엽서를 촛불에 댔다. 불이 붙은 엽서는 거꾸로 들자 조금 주춤하다가 금세 활활 탔다. 재를 담기 위해 그녀는 재떨이를 가져왔다.

작은 엽서는 재가 되어 검은 천처럼 바람에 펄럭였다. 그녀는 그것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깨끗이 씻었다. 여러 번 씻고 또 씻었다. 재털이를 들고 나오자 그 새 호사카가 들어와 있었다.

여보, 이게 무슨 냄새야. 설마 당신도 궐련에 손을 대나. 어디 불난 거야. 그런 거야.

아마 그럴걸요. 환기 좀 해야겠네요. 재떨이에 있는 종이쪽지를 태웠어요. 실패한 삽화를 그냥 버리기가 뭐해서요. 그리고 여보, 담배를 좀 줄이면 어때요. 재떨이가 부족할 정도에요. 어제도 치웠는데 오늘도 가득이니. 당신 건강도 챙겨야지요. 만년 청년이 아니란 말이에요.

잔소리인가.

그래요. 맞아요. 지금은 잔소리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점례가 입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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