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몇 시지요?
호사카가 선잠에서 깼는지 기지개 켜는 소리를 듣고 점례가 물었다.
응, 그거. 당신이 알지 내가 어찌 알아.
손목을 들어 보세요.
내원 참.
귀찮은 듯이 호사카가 손목시계에 눈을 주고는 퍽이나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잠깐 자려고 했는데 두 시간을 잤네.
그러게요.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가뿐해, 몸이. 저녁은 다 잤는걸.
점례 옆으로 다가온 그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여보, 근데 말이에요.
그래 말해봐.
아니 됐어요.
말해 보래두. 뭔데.
내가 이화여전에 다녔잖아요. 당신이 오기 전에 한 육개월 정도.
그 애긴 오래전에 했잖아. 삼촌이 배려해 줘서 청강을 들었다고. 그래서?
그때 그 선생님이 생각나요. 김선생님. 학감을 하셔서 나와도 조금 사적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나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어요. 그 당시 미국 유학을 갔다 오셨어요. 난 열등감을 느꼈어요.
대단한 분이군. 김선생이라면 조선 사람인가?
네, 불행히도 여성분이고요.
불행이라니?
아마 남자 선생이었으면 내가 빠졌을지도 몰라요.
허허 그 정도로 인격자였나?
그럼요. 모두 존경했으니까요.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도 깊어서 저도 잠깐 두 손 모아 기도했어요. 성경책도 선물로 주셨고요.
그렇군. 그런데?
호사카가 다음 말을 기다린다는 듯이 물었다.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하냐는 투였다.
파일에 선생님이 있어요.
아, 그렇군. 당연하겠지. 그런 정도의 인품이라면 우리 일본 편에서 조선인들을 교화해야겠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그가 어, 나 좀 씻고 올게. 눈곱은 떼고 저녁을 먹어야지 하면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례는 호사카의 체온이 남아 있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다시 서류철로 눈을 돌렸다. 할 일이 없어 마지 못해 본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눈길이 닫자 다시 호기심이 발동했다.
다부진 얼굴이었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장군이 됐을까. 여장부가 따로 없다. 광대뼈도 나왔고 눈이 매섭다. 출세욕이 보인다. 콧대도 높다. 동휴는 그녀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녀의 실체를 알기 위해 점례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파일철을 눈 앞으로 당겼다.
인천에서 태어났군. 세례명이 헬렌이고 창씨개명한 이름이 천성활약 마라기 키스란 이네. 미국 이름으로 불러도 들어서 좋은 이름이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활약했군.
그래 그만큼 배우고도 이런 직책 하나 없다면 욕심이 없는 거지. 군자라 해도 자리 하나는 있어야 체면이 서지. 안경을 썼네. 재수 없다고 욕을 먹어도 신경을 안 쓰는 스타일이니 벗을 이유도 없겠지.
정말 당당해. 여성에게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실례되지만 어쨌든 보는 사진은 그것 말고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워.
글을 보다 점례는 다시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두꺼운 입술이 벌어지며 역시 두꺼운 이빨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 사이로 혀가 들락이면서 말이 새어 나왔다.
점례는 기억을 더듬었다.
학생 여러분, 배꽃 높이 높이 휘날리며 우리는 전선으로 가야 합니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정신대 모집에 앞서 지원합시다. 붉은 혀가 들락거렸다. 화사처럼 마치 징그러운 그것처럼 그녀의 입은 거침 없었다.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나는 감히 학생 여러분에게 명령한다. 이것이 선생이 제자에게 하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고 무조건 따라야 한다. 대일본 제국을 위해 전선으로 가자. 가서 지친 병사들을 위안하자.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느님 아버지. 천황의 승리를 위해 사랑하는 나의 제자를 싸움터로 보냅니다. 우리 제자들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여성도 전사입니다. 총 들지 않았어도 총 든 남자를 위안하면 그것이 바로 전사 다름아닙니까?
여기 배워서 똑똑한 처녀들이 있습니다. 공물로 하느님께 바칩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가 너도나도 지원해 전선으로 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눈물을 흘리는 학생이 있는 것 같았다. 점례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태평양 전선에서 행했던 나의 위안 행위는 애국인가. 그런 식으로 나는 애국을 했다. 그렇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떠들고 자랑해야 마땅한가.
이런 질문을 하는데 독감에 든 것처럼 몸이 자꾸 떨려왔다. 막사의 모포를 머리까지 덮어쓰고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지원서에 서명하는 이들은 알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정신이 무엇이고 위안이 무엇인지.
애국하는 일인데 왜 그렇게... 점례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그러나 멈춘다고 멈춰질 수 없었다. 나는 모르고 선생은 알까. 아는 선생을 모르는 나는 존경한다.
학생들의 박수가 들린다. 이해했으니 행동하겠다는 신호다. 기필코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다. 점례는 뒷문으로 조용히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교정을 달렸다. 책가방을 앞에 끼고 마구 달렸다. 서러움이, 무엇 때문인지 모를 서러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먹구름은 사방에서 쳐들어왔다.
점례는 화들짝 놀랐다. 화장실 문이 열리며 호사카가 나왔다. 그는 기침을 하면서 점례가 무안해 하지 않도록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여보 화장대에 로션 있어요. 가을날이 좀 쌀쌀하네요. 얼굴 트지 않도록 발라요.
점례는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물방울 하나가 서류에 떨어져 잉크가 번져 났다.
여보, 여기서 털면 어떻해요.
당신이 좀 발라 주면 여간 좋지 않소? 손이 좀 아파.
호사카가 수건을 털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여기가 아파.
그래요, 알았어요. 우리 착한 아들.
점례는 일어섰다. 그리고 로션을 손바닥에 따랐다. 그사이 자리는 바뀌어 있었다. 의자에 앉은 호사카의 시선이 번진 잉크 활자 부근에 멈춰 있었다.
이리 와요. 얼굴을 앞으로.
그래 이렇게 돌격 앞으로.
좋아요.
향긋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자요. 눈 감아요.
점례는 정성스럽게 그의 얼굴에 화장품을 발랐다. 골고루 퍼지게 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얼굴 마사지를 했다.
시원해, 당신은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호사카 싫지 않은 소리를 했다.
너무 띄우지 말아요. 금방 실망할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그렇지. 알았어. 난 좀 산책 좀 하고 올게. 7시에 로비에서 만나. 저녁은 먹어야지.
옷 잘 입고 나가세요.
하오리 끈을 잡고 있는 그에게 점례가 말했다.
감색 코트 그거 입고 가요.
점례는 하오리를 밀어 넣고 자신이 말한 옷을 손에 걸치고 나가는 호사카의 등을 보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1926년, 순종 사망: 일제는 조선인들의 집단 곡을 금지했다. 모여서 하는 곡이 시위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누구도 감히 서슬 퍼런 일제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그때 이화여전 김선생이 나섰다. 학교를 설득해 사백여 명의 학생들을 끌고 나와 덕수궁 앞에 모였다. 흰 광목옷을 입은 학생들이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가는 길을 애도했다. 일제는 김선생의 행동을 주시했다. 주시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종로서는 그녀는 체포해 옥에 가뒀다. 그들이 보기에 시건방을 떤 결과는 이렇게 참혹했다.
그 이전에 김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비밀결사는 조직해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독립투사 언저리까지 발을 들여놓았다. 깨어 있는 지식인의 참모습은 이런 것인가.
그러나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창씨개명에 이어 관제 단체에 가입하는가 하면 매일신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번 쓰기 시작한 글은 멈출 줄 모르고 이어졌다.
정신대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물론 내선일체를 앞장서 외쳤다. 말로만 하지 않고 글을 써서 제자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조선처녀를 전장으로 내몰았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했다. 징병제에 나서는 반도 여성의 각오는 대단했다. 그녀의 일제 협력은 변절이 아니라 조선과 조선민을 위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이 용감한 것처럼 친일도 용감한 행위였다. 그녀같은 지식인이, 깨우친 여성이 글을 쓰지 않고 연설을 하지 않고 교육을 하지 않고 숨어서 지냈다고 가정해 보자. 조선의 손해는 그야말로 엄청났을 것이다.
나중에 낙랑클럽을 만들어 제자들을 미군에게 소개한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외교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국익을 위한 것이지 결코 매국행위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험하고 나쁜 일은 독립운동이었다.
점례는 거기서 읽기를 멈추었다. 동점심이 일었다. 그녀를 위해 기도를 했다. 그녀는 결코 왜소하지 않았다.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까.
마치 나의 고통처럼 다가왔다. 점례는 종이를 넘겼다. 다른 장이 궁금했다기보다는 더는 흥미가 없었다. 그냥 습관처럼 눈은 따라갔지만 내용은 읽지는 못했다. 정신이 든 것은 한 참이 지난 후였다. 다시 파일에 눈이 가자 거기에도 여성 지식인이 반갑게 맞았다.
웃는 얼굴이 퍽 정감이 갔다. 성은 박이고 이름은 외국식이었다. 세글자가 아니고 네 글자의 여성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점례는 악수하는 대신 파일을 아예 덮었다. 무엇이 중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