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어, 이거. 사람들에 대한 기록물. 당신도 한 번 읽어 봐요. 아무래도 예술은 사람들 이야기니까 도움이 될 거야.'
점례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군요.'
'미리 정보를 알고 가면 도움이 되겠지.'
'총독에게 감사할 일이 생겼네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일정이 예정대로 됐으면 지금쯤 우린 파리에 거의 도착해 있을 거야. 이런 좋은 대화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세상일이란 참 묘해요. 어긋난 약속이 뜻밖의 선물을 주니까요. 세옹지마라니까요.'
'어, 그거. 나중에 설명해 주면 안 될까. 지금 흥미로운 부분에 도달했거든.'
'인생사 돌고 돈다는 뜻이지요. 완전한 기쁨이나 완전한 슬픔은 없는 법이지요.'
'그런 거지, 나도 대충 그렇게 짐작했어.'
호사카가 조금 건들거리는 몸짓으로 말했다. 맞아 떨어진 것에 대한 만족감의 표시였다.
'조선 남자치고는 잘 생겼는걸. 훤칠한 이마에 두상이 스님을 해도 괜찮겠어. 더구나 눈썹도 중눈썹으로 볼만해. 뿔테 너머 눈빛은 얼마나 또렷한지. 얼굴이 증명한다니까. 나 조선 천재요 하고. 그런데 이자의 이름이 향산광랑이군. 가야마 미츠로. 창씨개명 하라고 하기도 전에 서둘러 조선 이름을 버렸네. 이유가 그럴싸해. 조선식 이름 세글자로는 천황의 신민으로 부족해서 천황에 좀 더 가까이 가야한다는 핑계를 댔군. 내선일체 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일본 이름이 좋다나. 그건 맞는 말이지.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결정이라고.'
하아, 호사카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만족감의 표시인지 아쉬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대동아 일주년을 맞은 나의 결의’ 제목이 좋군. 폐하의 성업에 감사 또 감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 한 몸 천황에게 바치네.'
호사카는 적극적으로 친일로 돌아선 그가 한 때 2.8 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멜레온이 따로 없군. 글도 참 많이 썼네. 문인 가운데 압도적으로 친일을 찬양했어. 이 정도면 광신적 친일파네. 어쩔 수 없이 친일한 자가 아니군. 참으로 친일한 자가 있다면 이 자일세. 그러니 임정 활동을 하고도 귀국한 후에 체포되지 않았지. 아마도 우리 일본의 첩자나 스파이로 활동한 거로군. 그래 총독부 기관지에 이름을 본 거 같아. 연재 소설을 썼지 아마. 조선인들이 그 소설에 열광했어. 이제 기억 나는군. 정나미 떨어지는 그 소설. 열광할 정도는 아닌데, 초대형 베스트셀러 라니. 문장도 그렇고 과정이나 결말도 세계적 작품과는 질이 많이 떨어져. 이 자는 세상 물을 더 먹어야지. 파리로 데려갈까. 귀찮아. 생각하기도 싫어. 난 지조 있는 인간이 좋아. 점례의 발끝도 못따라가, 그렇고 말고. 그녀는 배신을 안 해. 왔다 갔다는 하는 인간은 난 딱 질색이야. 어쨌든 글도 수준 이하야. 하지만 이 정도도 어디야. 이런 자들이 가득 넘쳐야지.'
호사카의 입이 옆으로 벌어졌다. '민족 개조론'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조선민들은 일본인에 비해 열등하지. 타고나기를 그렇게 한 거야. 열악한 민족정신으로 쇠퇴 또 쇠퇴라고. 게으르고 머리도 나빠. 음, 이걸 친일이라고해야 할까. 아니면 민족개조를 넘어선 동족 혐오라고 해야 하나. 이 정도 인물이라면 조선문인협회장을 하는 건 당연하겠지. 또 흥미로운 게 있네. 이혼을 했어. 난 놈은 난 놈이야. 신여성과 재혼을 했네. 조선 최초의 산부인과 의사라고. 그런데 또 여류 화가와 바람을 피웠네. 시인, 조각가, 조선 최초의 페미니스트 등 직업도 다양한 여성과. 볼 만해. 요일을 정해서 만나고 있어. 수 금과 화 목 이렇게. 그러면 토일월은 누구를 만나지. 여자들 만나는데 시간 다 쓰면 글은 언제 쓰지.'
볼펜을 굴리던 손을 놓고 호사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기묘한 생각이 났는지 아예 펜을 손에서 놓았다.
'그래 그동안 어떤 걸 썼소?'
'쓸 시간이 부족해 겨우 안경을 썼습니다.'
'하하하.'
이런 대화가 오가면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겠지. 조선 최고의 '셀럽'이 있다면 아마 이 자 일거야. 연말 연예 대상은 경쟁자가 없어. 독보적이야.
여기까지 읽고 나서 호사카는 동휴에게 나머지 요일은 누굴 만나 무얼 하는지 왜 기록하지 않았으냐고 따져 물어 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보 활동이 게을러서야 어디에 써먹겠소. 형사들도 주말에는 쉬는 모양이군. 그래 쉬면서 적당히 일해.'
당황하는 그자의 모습이 보이는군.
'너도 이놈아, 이 작자와 같은 부류야. 약점이 많은 자들, 특히 사욕이 있는 자들은 독립 같은 자기를 희생하는 일에는 서툴지. 그것조차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니 왔다리갔다리, 여자에게 하듯이 양다리를 걸치는 거지. 조선인들은 좋겠네. 조선 최고의 천재 작가의 이런 행태를 알고나 있을까.'
호사카의 시선은 또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시인이다.
눈초리가 매섭다.
'촌철살인. 돌아가지 않고 핵심을 치는 자답군. 조선말을 이리도 아름답게 쓴다고. 그렇지, ‘마쓰이 오장에게 보내는 송가.’ 운율이 살아있어. 작품 속에 한 번 인용해 먹어야지. 그래 이름이 뭐더라. 달성정웅이라. 타츠시로 시즈오. 근사한 이름이군. 일제가 적어도 천만년을 간다고 하네. 조선 역사가 오천 년인데 천만년이라. 그런 생각이니 당연히 친일을 해야지. 이 자에게는 무슨 질문을 하지.'
화사카는 잠시 고민을 빠졌다는 듯이 왼손을 턱에 기댔다.
'정말 네 아비가 머슴이었니?'
'이건 좀 그래. 이런 질문은 못 하지. 점잖게 하자. 그래 네 몸뚱이는 얼마나 슬픔에 젖었길래 이토록 징그럽게 생겼니? 이것도 좀 그렇지. 이자에게는 즉석 시나 하나 읆으라고 해야지. 혹시 아나. 날 보고 세상을 구제할 미륵의 미소를 지녔다고 칭송할지.'
그것이 끝나면 고향이나 물어볼까.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인가?' 일그러질까? 아니면 환하게 펴질까. 참말로 재미있는 일정일 거야.'
대신들은 제쳐놓자. 익숙한 얼굴 앞에서 호사카는 그들과는 형식적인 인사치레만 하기로 작정하기로 미리 마음 먹었다. 문인들 뒷바라지가 필요한 대목이 나오면 그들을 한 번 호명하면 예의는 차리는 셈이다. 그 이상 별 관심이 없었다. 정말 구역질 나는 면상들이라니까. 호사카가 얼굴을 치뿌렸다.
이제 슬슬 여류 문인들로 넘어가 볼까.
'남자처럼 기골이 장대하군.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자고 하는 신조가 이럴 때면 흔들려. 이 얼굴이면 물불 가리지 않아. 여자지만 남자의 기세를 뚫고 지나가. 아, 그만 읽자. 답답해. 지금 태평양 전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다니.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어. 그런데도 가미까제 특공대를 찬양하고 학도병 모집을 열을 올려. 신의 위력으로 일어난 바람이 잦아들고 있는 이때에. 아들 가진 엄마도 울면서 보낼 만한 문장으로 피를 끓게 하는군. 어쩜 좋아. 일본은 패망이고 곧 조선 땅을 떠나게 될 거야.'
화사카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듯이 걱정 스러운 얼굴을 했다.
'새로운 조선이 들어서던지 왕조가 이어지던지 하겠지. 그러면 이 자들은 또 뭐라고 할까. 천부적인 기회주의 자세를 가졌으니 독립된 곳에서 또 다른 부와 명성을 얻겠지. 어떤 말의 잔치, 어떤 비상한 행동을 보일지 그려지는군. 권세 앞에서는 무조건 엎드린다 그것이 내 신조요. 그렇다면 할 말 없다. 복종은 이런 때 하는 것이오. 우리 같은 천재들은 범인들과 달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소. 기회주의가 왜 나쁘지요. 그래, 그들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럴 줄 몰랐소. 일본이 이렇게 쉽게 망할 줄은. 그걸 알았다면 내가 친일을 하겠소. 이제 조선 독립은 물 건너갔소. 일본 지배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일본인으로 살아갑시다. 안 그렇소?'
그러면서 대들겠지.
'너희들 중에 친일 아닌 자 있으면 나와서 나에게 돌을 던져라. 죽지 않고 숨만 쉬고 있었어도 친일 아니냐. 되레 고함을 치겠지. 들었던 돌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돌아가는 가엾은 흰옷 입은 백성들이 보이는군. 그래, 내가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다만 나는 그걸 소설로 쓰기 위해 스토리를 구성하는 중이고. 나스메 소세끼를 능가할 거야. 그 정도로 는 부족해. 위고나 모파상, 에밀 졸라 급은 돼야지. 이런 소재라면 세계인의 마음을 울릴 거야. 감동을 줄 만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