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카는 조선문인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의 행적을 알고 싶었다. 한때는 열렬한 독립파였다가 지금은 친일파로 활약하고 있는 그들의 구체적인 변신 과정이 궁금했다.
조선인들이 떠드는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들의 행적은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 대충해도 될 것인데 문인들은 도통 알수가 없었다. 그들의 작품을 읽은 것도 아니고 관심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동휴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자라면 파일을 다 갖고 있을 것이니 정리해서 가져오라고 하면 만나기 전에 쉽게 그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만찬에서 주도권을 쥐고 말할 수 있겠다.
호텔 로비에 내려가니 동휴가 먼저 와 있었다. 부하 하나가 가방에서 꺼낸 서류에는 작은 사진과 함께 그들이 어떤 인물인지 적나라한 내용이 있었다.
마치 이력서처럼 사진이 왼쪽 상단에 붙고 그 옆에 생년월시부터 시작해 학력이 적혀 있고 내용은 그 다음줄 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안경을 쓴 젊은이를 호사카는 잠깐 눈여겨 보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그 내용을 읽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방으로 가져가서 천천히 읽어도 될 일이다. 그들의 어떤 과정을 거쳐 어던 행적의 괘도를 그려오고 있는지 살펴볼 참이다.
따로 부연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자료에는 문인들의 생활습관, 인간관계 특히 남자 문인의 경우 여자관계 등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까지 있어 호사카는 놀랐다.
'그래, 이렇게까지 파악하고 있단 말이오. 종로서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군요.'
호사카의 칭찬에 동휴는 어쩔 줄 몰라했다. 만족한다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 뱄다. 근래들어 누군가의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이 자들은 어디로 튈지 몰라 항상 경계의 대상입니다. 한마디로 요주의 인물이지요.'
'지금은 아니라면서요? 우리 일본에 충성한다고 들었어요.'
'네 그렇지요. 저들이 생각하기에도 조선은 끝났다고 보는 거지요.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겠지요. 자칭 천재라는 자들이니 그만한 머리는 돌아가고요.'
'그런데 사생활까지 이렇게 적은 이유가 뭐요?'
'아, 뭐 그건 우리 남자들끼리 이야기인데...'
동휴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약점을 잡아놔야 나중에 도움을 청하거나 추궁할 때 도움이 되지요. 여러모로 쓸모가 있어요. 그때 써먹기 위해 잡아둔 기록들입니다.'
동휴가 음흉한 미소를지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종로서장은 결혼했나요?'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아직 미혼입니다만 같이 사는 여자는 있어요. 아무래도 미혼이 좀 편하지요. 잔소리도 없고요. 참 일본인 이어서 고분고분합니다.
'일본이라서? 그렇지. 우리 일본인은 조선인과 달라. 달라도 한 참 다르지.'
비꼬는 투로 호사카가 말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돌았다.
동휴는 이때다 싶어 분위기도 바꿀 겸 "호사카님 내외 분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특히 마사코 님은 세련됐어요. 조선에서 따라 하려는 여자들이 이화여전 등에서 나오고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모자를 쓰고 머플러를 두르고 귀거리나 목걸이는 하는 신여성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내가 그것까지 말해야 되나?'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호사카가 반말을 하면서 동휴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닙니다. 각하. 그저 궁금해서 여쭤봤을 따름입니다.'
'내 첩보를 수집하겠다 이거지?'
'죽을 죄를 졌습니다.'
동휴가 납작 엎드렸다.
'아냐, 아냐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투철한 직업정신은 비난보다는 칭찬이 앞서야죠. 이 서류철들은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요.'
'네, 내일 만찬 후 돌려주시면 됩니다.'
'그래 그들에게는 다 연락을 취했소?'
'국내에 있는 8명은 모두 참석하기로 약속을 받았고요. 여류 문인 두 명도 나오기로 했어요.'
'대신들은요?'
'내무대신 등 세 명은 참석이 가능하나 한 명은 아파서 병치레 중이고 다른 한 명은 군산으로 내려가 있다고 해서 참석이 어려울 듯합니다.'
'알았소.'
호사카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고집을 부려 나머지들도 수소문해 다 참석시키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었다. 호사카가 담배를 권했다. 동휴가 받기위해 두 손을 공손히 내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동휴가 머뭇거렸다.
'무슨 말인지 말해 보시오. 기탄없이 하세요.'
'아닙니다. 각하.'
'말해 보래두.'
호사카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실수할까 봐 겁이 나고요. 아닙니다. 호사카님과 관련된 사안이라 말하기가 여간...'
'그래, 내 일이라면 더 말해야지. 무슨 말이든 오늘 이 자리서 나온 말이라면, 내가 거두어 두지.'
'그게, 저... 마사코님 말입니다.'
'그래, 뭐가? 뭐가 있느냐.'
'네, 그게 우리가 쫓는 휴의라는 자 있지 않습니까. 독립운동하는?'
'하도 유명하니 나도 그 이름은 듣고 있소. 상하이 임정의 김구보다도 몸값이 높다면서요?'
'맞습니다. 바로 그자와 마사코님이 아는 사이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호사카가 구미가 당긴다는 듯 이번에는 동휴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너는 나가 있어?'
동휴가 서류철을 들고 있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저쪽 문밖에 기다리고 있어라.'
부하가 하이를 외치며 일어섰다.
'그게 말입니다. 이건 순전히 감입니다만 마사코님이 휴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증거는 있느냐?'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감입니다. 오랜 형사 생활이 가져온 촉이라고나 할까요.'
'감 말고 다른 건 없느냐?'
'글쎄요. 제가 인사동 삼촌 집을 늘 감시하고 있는데요. 감시가 아니라 경호하고 있습니다만.'
동휴가 말을 급히 바꾸면서 그때 휴의란 자가 화랑 근처를 배회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사코님이 나오면 뒤를 따르고요. 전에는 잠깐 길에서 만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전이라니?'
'아마 일 년 전쯤 일 겁니다. 그때 호사카님은 전선에 있었고요. 마사코님이 먼저 와 있었을 때요.'
'만난 시간은 얼마나 되느냐? 글쎄요. 워낙 순식간이라서요. 한 삼십 초쯤 됐을까요.'
'삼십 초. 그 정도 시간이면 길가는 사람이 장소를 물어봤을 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이 스쳐 갈 수 있는 정도밖에 더 되느냐. 그런 걸 아는 사람끼리 만났다고 단정할 수 있어?'
'그게 아니고요. 확실히 멈춰 서서 두 눈을 보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두 눈으로 그것을 똑똑히 봤습니다.'
동휴는 그들이 잠시 껴앉았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호사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럼 왜 체포하지 않았으냐? 이번에는 동휴가 멈칫했다.
'왜 그랬어? 잡지 않고 왜 그대로 두었냐고.'
당황한 기색이 동휴 얼굴에 역력했다.
'알고도 잡지 않다니. 서장이 직무유기 한것 아니요. 당장 파면감이다. 아니 영창에 집어넣어도 상관없다.'
호사카가 목소리를 낮추고 강하게 말했다. 눈에서는 어떤 살기가 느껴졌다. 적을 제압할 때 보이는 그런 눈이었다. 내가 이놈아 이래 봬도 태평양 전쟁의 작전 최고 책임자였다. 네 놈 하나 못 해볼 줄아느냐.
호사카가 만족한 듯 등을 뒤로 젖혔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각하. 그때는 생각이 짧았습니다. 상하이에서 온 불순 불자가 휴의 말고도 일당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뒤를 캐서 일망타진하려고 일부러 놔준 것이었고요.'
'일망타진 됐나요?'
호사카가 점잖게 물었다.
'그 뒤로 놈들이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경성부 일대를 이 잡듯이 뒤졌으나 놓쳤습니다. 이것은 호사카님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 겁니다.'
'정보를 줘서 내가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니?'
'아닙니다. 각하.'
'그래, 너를 어떻게 해주면 은혜를 갚을래. 네 죄는 네가 실토했으니 거짓은 없을 것이고. 자백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을 너도 알겠지.'
호사카가 부하 다루듯이 반말로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때 체포하지 않은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래, 죽여 주래?'
호사카가 권총을 살짝 꺼냈다.
'네가 준 이 총으로 너를 죽여줄까. 여기 이 호텔 로비에서. 아니면 총독부에서 발행하는 매일신보에 네 비위를 대문짝만하게 실어줄까? 상판대기와 함께. 총독님도 좋아하시겠지. 종로서장 할 사람은 조선천지에 널려있다. 모르지. 내일 만나는 문인 가운데서 시켜만 주면 하겠다고 나서는 작가가 있을지도. 아마도 종로서장보다 못하지는 않겠지.'
'각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놀렸습니다. 눈이 삐었습니다. 그때 제가 본것은 마사코 님도 휴의도 아니었어요. 그저 잡고 싶은 욕망이 헛것을 본 것이지요.'
'알았다. 알았어. 네 충성심은 내가 알지. 그나저나 내일 모임에 차질 없도록 준비 철저히 하고. 특히 여류 문인들은 차를 보내 깍듯이 모셔와라.'
'하이.'
동휴가 감격해서 말했다.
'호사카님을 위해 죽도록 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