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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참석자들은 대신 문인 화가 가수 등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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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은 대신 문인 화가 가수 등으로 정해졌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28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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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짐을 정리했다. 점례는 경쾌했다. 몸놀림도 그렇고 입도 가만히 있지 않고 흥얼거렸다.

'황성 옛터에 봄이 오니, 월색만 고요해~.'

'당신 그렇게 좋아.'

'나쁠 게 없잖아요. 행복이 별거 있나요? 아버님도 만나고요.'

'그래, 나도 그래. 좋아. 여길 떠나는 것이.'

'이구동성이군요. 룰루 랄라.'

불쾌한 기억으로부터의 도피. 점례가 일부러 더 즐거운 척 한 이유였다. 휴의와 접선 비슷하게 만난 어색한 기억, 동휴의 저주 어린 눈빛, 잊고 싶다.

호사카도 그러고 싶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별로였다. 점례와 엇 비슷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골치 아픈 식민지를 떠나 자유로운 프랑스가 눈에 어른거렸다.

'여보, 이것도 챙겨야지?'

호사카가 옷을 정리하는 점례를 보고 말했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손에 든 호랑이 가죽을 들고 그가 난감한 듯이 망설였다. 자신도 딱히 마음에 드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이니 그냥 두고 가기도 아까웠다. 아무에게나 줄 수도 없었다.

망설이고 있자니 점례가 한마디 했다.

'아버님께 선물로 드리면 어때요?'

'그거 좋은 생각이야. 진작에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내가 깔고 앉기에는 녀석이 기세가 너무 세. 아버지라면 모를까.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이니 충분히 이겨 내시겠지. 강한 분이잖아.'

호랑이 가죽은 경무총감이 보내준 것이었다. 총독과 내심 경쟁 관계에 있는 조선의 이 인자 경무총감은 해군 후배이지만 먼저 승진한 총독을 제끼고 싶어했다.

그러나 황실과 일본 귀족들은 자신보다 총독을 더 아꼈다. 그래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다음 조선 총독 자리는 자신이 하기 위해 갖은 꾀를 썼다. 연임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어 골머리를 앓던 그는 내무대신 아들을 로비 창구로 쓰기로 했다.

그래서 보내온 것이 호피였다.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입니다. 십여 년 전에 묘향산에서 잡은 것이지요. 볼수록 대단한 놈입니다. 그때 보현사 스님이 절 마당 앞으로 끌고 가는 사냥꾼에게 호통을 쳤다지요. 산신령을 잡았으니 네놈들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러자 포수 중의 한 명이 왜놈이 총 들고 시키는데 살기 위해 죽인 우리가 범보다 못하냐고 따지더랍니다. 그래서 그럼 네 놈의 목숨 대신시킨 왜놈을 작살 내겠다고 했답니다.'

'사냥은 누가 시켰는데요?'

'바로 접니다.'

경무총감이 입에 침을 흘리기라도 한 듯이 소매로 입술 주위를 닦고는 조선말은 반대로 들어야 할 때도 있다고 했다.

'스님의 말은 이 호랑이가 조선을 확실히 멸망시키고 일본 세상을 만드는 부적 같은 역할을 할 것 입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군요.

호사카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그런데요. 이것은 제가 갖고 있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그릇이 작다는 얘기지요. 그러니 이제 막 기상을 펴는 각하에게 어울리는 선물입니다.'

경무총감이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비굴했다고 여겼는지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화를 가진 범이지요. 기운이 얼마나 센지 총알을 세 발 맞고도 십 리를 도망쳤다고 해요. 사냥개 네마리를 물어 죽였지요. 길이가 무려 오 미터가 넘어요.'

양팔을 옆으로 벌린 경무총감이 이것을 두 번 하고도 남는다고 제스처를 썼다. 경무총감은 호피를 건네면서 자신이 마치 도포수가 된 양 총 쏘는 시늉을 했다.

호사카는 찜찜한 기분으로 그걸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완강히 거절했으면 했으나 이미 받은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런 스토리는 흔하잖아요. 무엇보다 당신 마음이 중요하고요.'

점례가 이때다 싶어 말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기라도 하듯이.

'나도 별로기는 하지만.'

점례가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 있는 호사카를 보면서 호랑이 가죽을 만져 보았다. 보드라웠다. 그러나 손끝의 감촉은 그것 외에도 어떤 살기가 느껴졌다.

산속 군주가 일개 포수에게 잡혀 껍질이 벗겨진 채로 있는 것이 마음 아팠다. 호랑이는 산신령 아닌가. 어릴 때부터 호랑이는 줄 곳 신이었고 악귀를 물리치는 신령스런 동물이었다.

조선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이제는 가죽으로 남아 처리하는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조선 최고의 전리품이라고 내미는데 사양하기 어려웠소. 당신 제안이 좋아요. 아버님께 드려야겠어.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겠지.'

대왕의 가죽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됐을 때 전화가 울렸다. 점례는 움찔했다. 혹시 동휴란 자가 출국 전에 어떤 음모를 꾸몄나 해서였다. 그러나 총독이라는 것이 금세 밝혀졌다.

삼 일 후 자신과 같이 본국에 들어가자는 제의였다. 내일 가기로 한 군용기가 급히 필리핀 해전에 투입된다고 했다. 배편도 마땅치 않다. 반도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안전하게 이동 하는 게 신상에 좋다고 했다.

총독은 그런 이유를 댔으나 사실상 네가 조선을 떠나는 방법은 나와 함께 가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일방적 통보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 호사카는 화를 냈다.

총독이라는 자가 본국행 비행기 하나 마련하지 못하다니. 그리고 굳이 자신과 함께 가자고. 호사카는 머리를 굴렸다. 이 시국에 왜 조선 총독을 본국에 호출하지. 이곳 사정도 그리 편하지는 않은데.

한편 전화기를 내려놓은 총독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호사카와 헤어지고 나서 본국으로 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를 해임하려고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총독은 안절부절못했다. 경무총감, 이 자식이 미리 손을 썼나. 아니면 호사카가 환대에 미흡해 나를 궁지에 몰아넣었나. 돈이 부족했나. 공 하나를 더 넣을걸.

그는 스스로 미련한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제법 세게 때렸는지 골이 띵했다. 그 덕분인지 총독은 갑자기 무슨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호사카가 타고갈 내일 비행기를 취소한 것이 그렇게 잘한 결정이라고 스스로에게 칭찬했다. 때린 머리가 미안했더니 몇 번 쓰담 듬었다.

헌병대사령관을 불러 태평양 상황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급하게 군에서 차출됐다는 핑계를 댄 것은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 잘됐다. 무척. 같이 비행하면서 하지 못한 은밀한 이야기도 하자. 지상에서 못다 한 로비는 하늘에서 하면 되는 것이고.

그나저나 이 경무총감이라는 자식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뭐, 호피를 나 몰래 호사카에게 주었다고. 괘씸한 놈. 그런다고 각하가 넘어갈까. 이 기회에 아주 작살을 내자. 조선을 떠나기 전에 처리하자.

그러면 혹시 아나. 호출 이유로 나를 해임하기로 했어도 그가 사라지면 어쩔 수 없이 나를 더 사용할지도 모른다. 총독은 그를 어떤 식으로 사라지게 할지 방법을 고민했다.

이런 고민은 다른 누구와도 상의하기가 어렵다. 방법을 정해놓고 통보하는 것이 비밀 유지에 가장 좋다. 총독부 내에도 그자의 편이 제법 있다. 자칫 비밀이 새면 내가 먼저 골로 갈 수도 있다.

제독의 경험을 살려 총독은 해전을 하는 지휘관으로 돌아가 있었다. 동휴, 이 자를 써먹자. 그도 자리가 불안할 것이다. 한때 승승장구해 백작 칭호를 받는 등 신임을 얻었으나 최근에는 이렇다 할 실적이 없다.

휴의를 체포하지도 못했다. 엊그제는 경찰과 장교 한 명이 어이없게도 주모의 식칼에 죽었다. 종로서 관할이니 서장인 그자에게 책임을 묻자면 굳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리 몰고 가자면 이유는 손가락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들 수 있다. 그래, 이런 일에는 조센징이 제격이지. 그런데 어떻게 지시하지. 대놓고 죽이라고 할 수는 없고.

함정을 파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야 하는데.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그래 내일 허수아비 조선왕과 만남이 있지. 그렇지 않아도 귀찮은데 잘됐다. 이참에 로스케놈, 양키놈을 조선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자.

그 과정에서 죽은 죽음은 순국이 되겠지. 그래 경무총감 너는 순국을 하고 나는 애국할 일이 더 많으니 이곳에서 더 있어야겠다. 총독은 일이 다 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호사카에게 어떤 뇌물을 줄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점례는 짐을 정리하다 말고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삼일을 더 보내야 하는구나. 조선 구경이나 하자고 할까. 궁궐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일전에 호사카가 말한 그런 여행도 괜찮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가 어떤 일을 할지 두고 보자. 그에게도 다 생각이 있겠지. 시간을 중시하는 사람이니 그냥 호텔에서 뒹굴지는 않을거야.

'여보, 삼 일이 덤으로 생겼군요. 공것이라고 해야 하나요.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말이 있어요.'

'나도 알아. 하지만 이건 공짜가 아니야. 비싼 돈 내고 받는 수업이지. 조선이 나를 보내고 싶지 않은가 봐. 나를 끌어당기고 있네. 사귀자고 하니 어쩌겠어. 밀당을 하더라도 해야지.'

'그래요, 좋은 거면 하세요.'

'아냐, 잘 모르겠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싫지도 좋지도 않은 그런 어정청한 상태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지금 방금 생각이 떠올랐어. 모레쯤 조선 문인들과 대화를 좀 했으면 해. 내가 영감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점례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인이라고. 글 쓰는 사람인가. 그래 조선에도 천재 문인들이 있다는 소식은 많이 들었다.

'굿 아이디어에요. 기왕이면 문인들 사이에 화가들도 끼워 넎으면 어때요. 흥을 돋구기 위해 회견 뒤에는 가수들이 노래를 했으면 좋겠어요.'

점례가 일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지 뭐, 못할 게 뭐 있어. 그런 제의라면 나도 오케이야. 조선 작가들이 처음에는 식민지에 너도나도 반대했잖아. 오장육부를 뒤흔드는 조선독립에 관한 글을 써서 흰옷 입은 백성들을 자극했지. 시를 쓰고 연설을 하고 아주 대단했지.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작가는 한 명도 없어. 목숨이 중한 걸 안 거야. 그런 거지. 다 일본 쪽으로 돌아섰어. 조상이 지어준 제 이름 버리고 창씨개명은 물론이고 앞장서서 출병을 호소하고 있어. 여류 작가들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아들을 전선에 내보내고 있지. 그런 극적인 변화가 궁금하기도 해.'

점례는 뜨끔했다. 바늘 하나가 손가락 끝을 찔러 대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호사카가 조선 문인들을 평가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한 번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겠다.

점례는 자신도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여보, 나도 가도 되지요?'

'그럼 안 가려고 했어? 나 혼자만 보낼려고 한거야.'

호사카가 가벼운 딴지를 걸었다.

'조선 화가도 부를 거야. 당연히 당신이 가야지. 그러려면 시간이 없네. 기자들도 수소문해야 하고 어디서 술독에 빠져있는 문인들도 찾아야 하니. 아쉬워도 총독 손을 한 번 더 빌려야겠어. 혹시 초대하고 싶은 문인이 있어? 딱 집어서 말이야.'

'전 문인들 세계는 잘 모르잖아요.'

'그래도 이광수나 최남선 등은 알고 있겠지?'

'그럼요. 조선사람 치고 조선 천재를 몰라 볼 수 있나요.'

'오케이.'

호사카는 바로 총독을 대 달라고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총독이 나왔는지 그는 총독님께 부탁할 일이 있다고 정중히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 붙들어 매세요. 내가 죄다 불러 모으지요. 특히 친일에 적극적인 인사들, 그러니까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돌아선 문인들 말이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요, 각하. 조선 대신들도 넣으면 어떤가요? 이완용을 대표주자로 하고요. 왜 조선인들이 말하는 그 을사오적을 죄다 초청하는 것이지요.'

'그것도 괜찮겠네요. 그런데 너무 많으면 대화가 안 되요. 내가 생각한 건데 그 다섯 명과 내가 지목하는 작가 10명은 꼭 넣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결같이 각하가 원하는 답변을 할 겁니다. 동류는 상구지요.'

'세모나 신춘이나 같고요.'

호사카가 호탕하게 대답했다. 호사카는 되레 출국이 늦어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가운데 아지트에 도착한 휴의 일행은 설치한 다이너마이트를 안전하게 빼돌리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

'우려했던 일이 있었어. 주모가 일을 저지르다니. 지금은 아니야. 짭새들이 서성일 거야. 군대도 복귀하지 않고 일본각 주위에 있을 거고. 시기가 안좋아.'

휴의가 디데이를 정하기 위해 미리 밑밥을 놓고 있을 때 다른 대원 하나가 말했다.

'역공을 하는 건 어때요? 방비하고 있는 틈을 타는 것이지요.'

'노 노, 소나기는 피해야지.'

'그렇다고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내 생각도 그래. 어렵게 구한 폭탄을 지붕 위에 방치할 수는 없는 거고.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데. 빨리 수거해서 다음 작전에 써먹어야 해.'

그러나 이런 걱정은 다음 날 쏙 들어갔다. 시내에 나갔다가 신문을 구한 한 대원이 휴의에게 건네면서 '호사카가 내일 일본으로 가지 않는다고 하네요. 일정이 변경됐는데 조선 대신들과 문인들을 초청한다고 해요. 격려 차원에서요. 이걸 보에요. 일본각에서 13일 정오에 모인다고 하네요.'라고 말했다.

'그래, 그것 참 잘됐군. 그런데 왜 하필 또 일본각이지.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게요. 아마도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 아닐까요.'

'참석자 명단은?'

'발표 된것 없는데 아마도 다섯 도적놈과 요즘 맹위를 떨치고 있는 천재 문인들이 아닐까요. 여류라고 하는 그런 작자들도 아마 참석 명단에 들었겠지요.'

휴의는 머리를 들었다.

'폭탄을 제거할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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