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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도 타지 않고 시장통으로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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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도 타지 않고 시장통으로 걸어 들어왔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2.12.2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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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는 인왕산의 중턱에서 총독 일행이 탄 검은 차량이 들어오는 것을 작은 망원경으로 보았다. 그보다 앞서 경비차량이 들어왔고 그 뒤로 대신들이 찬 차가 뒤따랐다.

그는 손을 들었다. 손목시계, 주석이 준 시계였다. 11시 50분이었다. 심호흡을 했다. 길게 한 두 번 더 그렇게 호흡을 하고 휴의는 시계에서 눈을 뗐다. 검은차가 시야에 다시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총독이 안으로 걸어야 가야 한다. 그러면 끝이다. 네 운명도 여기서 끝장이다. 호흡이 조금 가빠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차가 멈추고도 총독은 내릴 기미가 없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방향을 돌려 왔던 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틀렸다. 작전 실패다. 이건 뭐지? 휴의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나른해서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자고 싶었다.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그도 험난하고 이해 어려운 경험을 많이 했지만 이것은 이해불가였다.

왔다가 다시 가다니. 그물에 걸렸다 빠져 나가는 고기도 있는가. 휴의는 허탈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나머지 차량도 총독의 차를 뒤따랐다.

이건 뭐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휴의는 안정을 찾고 제일 먼저 바뀐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행동을 했다. 음식점 주방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두 명의 대원에게 급히 무전을 쳤다.

암호였다. 돼지 탈출, 똥 돼지 탈출, 우리를 뚫고 나갔다. 오버. 그쪽에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작전실패. 철수다. 바로 현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라.

주모는 대원들이 서둘러 떠나는 것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원수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몰라했다. 휴의보다 더 당황했다. 

급히 몸을 돌렸던 대원 중 한 명이 주모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아니오.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조용히 기다리시오.'

사라지는 대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모는 음식점 식칼을 들고 성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병력들도 철수하고 있다. 경호 병력은 총독 일행이 떠나고 나서도 한 동안 머물러 있었으나 귀대하라는 명령을 받고 트럭에 올라탔다.

뒷 처리를 위해 형사 한 명과 초급 장교 한 명이 남아 있다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음식 냄새에 맡으며 남은 음식은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그러기 전에 조금 요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주모는 칼을 든 채 넋이 나간 상태에 있어 그들이 들어오고 어떤 말을 했는데 기억할 수 없었다.

'어이, 주모 그 칼 내려놓고 밥 좀 주소. 그리고 남은 음식은 잘 챙겨 놓으시오. 종로서와 헌병대로 보낼 것이오.'

그들은 호기롭게 탁자에 앉았다. 형사는 마실 술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고 장교는 권총집을 풀어서 식탁 위에 놓았다. 주모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속에서 불이 타올랐다.

'여기 술 한 병 가져와.'

머리가 벗겨진 형사가 불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모는 대답 없이 막걸리와 잔을 놓았다.

'이거 왜 이리, 술집 년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자식뻘 되는 형사가 함부로 말했다. 일본군 장교 역시 하대하면서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냈다.

'저런 빠가야로 같은 년.'

장교는 주모가 등을 보이고 돌아서자 들으라는 듯이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서 욕을 했다. 주모는 가지런히 썬 수육과 방금전에 무친 겉저리를 안주로 내놓았다.

그는 다시 식칼을 들었다. 작전이 끝났다고. 총독도 살고 내무대신인가 뭔가 하는 자의 아들도 살았다고. 다 끝났다. 주모는 손안에 든 원수를 처단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도 된 것처럼 이를 갈았다.

'어이, 주모. 돼지고기 식었다. 따뜻한 걸로 내와.'

이번에도 조선 형사가 소리쳤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고기를 담은 쟁반 위에 식칼을 얹어 놓았다.

'여기 대령했어요. 많이들 잡수세요. 고생이 많아요.'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늙은 년이 예의가 없어.'

형사가 또 한마디 했다. 주모는 참지 않았다. 돌아서더니 쟁반에 있던 식칼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그리고 막 젓가락에 담은 돼지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 순간 고기 대신 칼날을 박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형사는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고 붉은 피를 벌컥 벌컷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이 미친년이' 하고 욕을 해댔다.

장교가 식탁 위에 있는 권총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손목을 향해 식칼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주모가 한발 빨랐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손목이 잘려 나갔다.

잘린 손목이 살아서 막 잡은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이놈, 너도 죽어봐라.'

주모가 달려들어 멀쩡한 한 손으로 피가 나는 팔목을 잡으려는 장교의 목을 찔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아수라장에 식탁은 난장판이 됐다. 괴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산속에서 대원과 합류한 휴의는 그 소리를 들었다.

'주모가 일을 저질렀군. 우리가 할 것은 주모가 했어. 어서 여기를 뜨세.'

총독 경호를 마친 동휴가 막 종로서에 도착했을 무렵 일본각에서 벌어진 참사 소식이 전해졌다.

'뭐시여, 이것이.'

동휴는 밥도 먹지 못해 국밥을 생각하면서 인사동 쪽으로 내려갈까 하다 말고 급히 일본각으로 돌아왔다.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동휴는 사건이 벌어진 내막을 세 명의 시체 앞에서 복기했다.

'일이 이렇게 됐군. 술집 년이 먼저 형사를 죽이고 장교 손목을 자른 다음 목을 찔렀다. 그리고 나서 자신도 그 칼을 썼다. 간단하군. 그런데 이 조선년의 정체는 뭐지. 그래 통인시장에서 국밥을 팔던 년이라고. 그래. 그 년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 짓을 벌인거야.'

사건을 정확히 파악한 동휴도 원인에 대해서는 종잡을 수 없었다.

'이건 이해 불가야.  아무리 방심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경찰과 군인이 아녀자에게 죽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훈련된 사람이 늙은 여자에게 당해. 그 년이 태권도라도 배웠단 말인가. 아니면 특수훈련이라도 했나.'

동휴는 손을 머리위에 뻗어 절구 찧듯이 머리를 찧었다.

'이것 역시 휴의가 개입한 것 아닌가. 그러면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동휴는 자신이 이번에도 휴의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총독이 무사하고 각하가 안전하다. 이 정도 사건은 내 선에서 마무리 지어도 된다. 굳이 상부에 보고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가 동휴는 머리를 굴리더니 아냐, 보고해야지. 총독에게 보고하는 거야. 일이 벌어졌다고. 내무대신 각하가 병원에 가는 바람에 더 큰 위험을 막았다고. 그러면 총독은 기분 나쁜 마음이 싹 가시겠지. 내무대신 아들에게 가졌던 나쁜 인상을 지우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기뻐하겠지. 아니야, 불똥은 나에게 떨어질지 몰라. 두 명이 죽었다. 경찰과 장교. 이를 어쩌나.'

동휴의 걱정은 그러나 쉽게 해결됐다. 헌병대 쪽에서 나온 수사관이 이 사건은 종로서와 우리만 아는 것으로 하고 조용히 끝내자고 사령관이 지시했다는 것이다.

'괜한 고민을 했군. 그렇게 기록해.'

동휴는 옆에 있는 부하에게 사건이 보고되지 않고 현장에서 종결된 것은 조선헌병대사령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일이 끝났지만 동휴는 입맛이 썼다.

그러다 주모가 국밥집을 한다는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 집에서 국밥이나 먹고 가자.'

그는 차도 타지 않고 걸어서 통인시장으로 들어왔다. 같이 가려는 부하는 먼저 서로 돌려보냈다. 보고서를 작성해 놓으라고 지시해 놓고는 그는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왼손을 쓰는 청년이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했다. 보아하니 오른 손은 움직임이 둔했다. 아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엉거주춤한 오른 손 때문에 당연히 도마질이 서툴렀다. 그러나 연습을 많이 한 때문인지 순대를 써는 것이 느려 터지지는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버럭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으나 동휴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주모에게 병신 자식이 있었네. 그래 네 어미가 두 사람을 죽였다. 살인자 자식의 기분이 어떠냐.'

동휴가 입맛을 다셨다.

'어이, 여기 막걸리도 한 잔 주소.'

'네네.'

고분고분하게 청년이 대답하고는 주전자와 잔을 내밀었다.

'그런데 청년은 오른손은 왜 그러시오. 어디 다쳤소?'

'네 주방일을 하다 손가락을 베었어요. 세 개가 나갔어요. 그래서 전쟁에도 나가지 못해요.'

청년이 학도병에 차출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이 말했다.

'그래 어머니는 어디 갔소?'

'네, 오늘 일본각에서 행사가 있다고 해서 그곳 음식 때문에 갔어요. 아마 늦어서야 들어올 것 같아요.'

동휴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 병신놈아, 네 어미는 죽었다. 길바닥에 팽개쳐 있어. 어서 가서 땅에 묻어야지.'

동휴는 입에 도는 그 말 대신 잔을 단숨에 비웠다.

'자네, 술은 조금 할 줄 아나. 아니요. 저는 배우지 못했어요.'

'사양말고 한잔하세.'

'싫어요.'

'그러지 말고 이리 오래도.'

동휴가 목소리를 높였다. 청년은 마지 못해 앞에 앉아서 잔을 잡은 왼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동휴가 그 잔에 벌꺽벌꺽 쏟았다. 잔이 조금 넘쳐 흘렀다.

'핥지 마라. 술은 얼마든지 있어.'

아까운 듯이 청년이 손등에 묻은 술을 먹으려고 하자 동휴가 제지했다. 그가 잔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

'간바이, 간바이.'

'그래 애야.'

동휴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술값은 미리 내마. 내가 혹시 급히 볼 일이 있어 가더라도 술값은 계산한 거다.'

청년이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받았다.

'나머지는 용돈 써라. 그래, 너는 군대를 가고 싶으냐.'

'네, 황국신민으로 당연히 그래야지요.'

'애국자 납셨군.'

'비꼬지 마세요. 내 친구도 가서 몇 달 만에 죽었어요. 원수를 갚아야지요.'

'그래, 그래 장하다. 그래야지. 그런데 혹시 어제나 그제 아니면 며칠 전에 아저씨 뻘 되는 남자가 이곳에서 국밥에 술을 먹지 않았니? 아저씨처럼. 그리고 엄마하고 이런 저런 아는 사람처럼 얘기하지 않든?'

청년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를 한 참 생각하더니 '맞아요, 바로 어제 였어요. 이맘때쯤 세 명이서 왔어요. 국밥을 먹고 막걸리를 먹었어요. 아저씨처럼 남은 돈은 그대로 두라고 했어요. 그래서 기억이 나요.'

'어떻게 생겼든?' 

동휴가 물끄러미 청년을 바라봤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동휴는 청년이 말하는 인상에서 휴의와 그 일당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자들이 노렸군.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놈들은 아직 조선땅에 있다. 반드시 잡아야지. 내부대신 각하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산채로 잡아야지. 점례가 보는 앞에서 껍질을 벗겨주마.'

동휴는 이를 갈았다. 양은 그릇에 담긴 술잔이 출렁였다. 그가 일어섰다.

'아저씨도 일본각에서 내려왔는데 엄마가 너를 부르더라. 여기 손님이 많아서 일손이 부족하니 가게 문 닫고 어서 오라고, 신신당부 했어. 내가 깜박 잊었다. 그 애길 먼저 했어야 하는데.'

동휴는 그 말을 하고 나서 거리와 나왔다. 총독부의 첨탑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지금쯤 제 어미의 시체를 보았겠지. 그래, 통곡해라. 애미를 죽인 건 네가 목숨 바쳐 충성을 해야 할 일본국 장교와 경찰이다. 그래도 너는 전선으로 가고 싶어 애간장을 녹이겠지. 천한 놈.'

혀를 차면서 동휴가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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