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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07:46 (금)
숨은 병력이 있다면 가볍게 따돌리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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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병력이 있다면 가볍게 따돌리자고 다짐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20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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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유령의 얼굴에 점을 찍었다. 몇 개의 점만으로 사람의 형상이 어렴풋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은 나가지 않았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의 굉음이 들렸기 때문이다.

연필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그 순간 무수한 파편들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먼지가 하늘을 덮고 잔해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비명이 들렸다.

호카사가 외쳤다. 살려줘, 나를 꺼내줘. 이 한마디로 모든 게 분명해 졌다. 점례는 벌떡 일어섰다. 그를 구해야 한다. 내 전부인 그를 살려야 한다. 그가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휘청거리는 몸을 끌고 점례는 거실로 나왔다. 무언가 부딪쳤다. 또다시 폭발인가. 점례는 머리를 만졌다. 다행히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엎드린 채로 울었다. 흐느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점례는 알았다.

실수였다. 장소를 알려준 것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다. 악마가 그의 입을 빌린 것이다. 점례는 떨어진 연필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아까 듣고 보았던 굉음과 파편과 먼지와 잔해와 그 아래 깔린 호사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동공이 흔들렸다. 사물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점례는 그림을 찢었다. 여러차례 찢은 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무언가 따뜻한 것이 몸을 감싸 안았다. 창밖으로 스며든 해가 붓으로 얼굴을 간질이듯이 이리저리 매만졌다. 점례는 일어났다. 그리고 찢어진 스케치를 보았다.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갈가리 찢긴 것을 수습했다. 호사카가 하품을 길게 하면서 나왔다.

'준비합시다. 벽에 걸린 당신 그림을 보러 갑시다. 어서 어서.'

그가 노래하듯이 중얼거렸다.

'그새 일어나서 그린 거요?'

점례가 대답이 없자 그가 물었다.

'그래요.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그녀는 들고 있던 찢어진 스케치를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어서 준비하자고. 삼촌이 기다려.  아니, 당신 팬들이 어서 오라고 눈이 빠질 지경이야.'

'농담 그만해요. 당신은 그 차림으로 갈려고요? 그걸 아는 사람의 복장이 왜 그래요?'

호사카가 잠옷 차림을 내려다보더니 아차, 내 정신 좀 봐.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인사동 갤러리는 외부 손님을 위해 일 층에서 계단을 타고 삼층까지 올라가도록 설계됐다. 애초에 신축을 하면서 내실을 거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손님들은 대개 이 계단을 이용했다. 동휴가 보낸 끄나풀들은 사전에 삼촌과 약속이 된 듯이 무난하게 이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올라갔다가 내려 왔다가 간혹 그렇게 왕복을 했다.

좁은 계단을 통해 마주치는 사람과는 가벼운 목례를 했다. 삼촌은 거개가 다 아는 사람들이어서 일단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의 경우 미리 준비된 사인을 통해 동휴에게 전달했다.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이 휴의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었다. 점례가 휴의와 내통하고 있다면 오늘 갤러리 초대 손님 가운데 녀석이 올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암호로 연락을 주고받을지도 몰랐다.

호사카와 점례가 도착했다. 갤러리를 가득 채운 백 여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점례는 설명했다. 메인 그림 앞에선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했다.

그들 가운데 샤갈의 그림을 본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조선에 살거나 다니러 온 일본인이었으나 서양 예술에 밝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도판을 통해 하늘을 날고 있는 그림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손님 가운데 하나가 마치 조선의 샤갈이 탄생한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점례는 그런 말에도 이미 대답할 준비가 되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러시아 작가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걸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나서 보니 그가 먼저 그렸다는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소재와 내용이 아주 달라요.'

'말하자면 모방에서 창조를 한 거지.'

삼촌이 옆에서 거들었다.

'어떤 작품도 모방 없는 것은 없어요.'

점례가 말을 이으면서 고맙다는 뜻으로 삼촌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가 가볍게 웃어 주었다. 그는 주인답게 거침이 없었다. 목포에서 왔다는 한 화랑이 그 그림을 적극 관심을 보였다.

호탕하게 거액을 제시했다. 질문한 남자는 어색했던지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

'아이구 선생님, 그런 말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하시지요. 어쨌든 일단 선생님이 찜한 것으로 정해 놓겠습니다.'

'이것은 조선에 있기 아까운 그림입니다. 본국 박물관에 가 있어야 하지요. 도쿄 국립 박물관에 전시하면 볼 만 할 겁니다. 그럼요, 그럼요.'

목포 상인이 입에 침이 말랐다.

'위에 있는 저분은 그런데 누구이신지?'

그가 점례의 목마를 탄 장교복을 입은 일본군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아, 참 내가 소개를 안 했군요. 그림의 인물은 정말로 실존합니다. 거창한 사람이지요. 실제 태평양 전투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고요. 부상으로 전역한 예비역 장성 입니다. 호사카, 이리와요. 내 자랑스런 조카입니다. 여러분 잠시 여기로 모여 보세요.'

삼촌이 갤러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소개할 사람이 있어요. 이분이 바로 본국 내무대신의 외아들입니다. 장차 수상이 되실 분의 자제분이시지요. 총독님이 가장 아끼시는 분이시고요.'

호사카가 가볍게 목례했다.

'목마를 태운 여성이 조선 제일의 미녀, 즉 그림의 주인공 점례 마사코입니다. 이리와요.'

삼촌이 점례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심스럽게 점례가 호사카 옆에 섰다. 따로 인사할 기회가 있을 테지만 지금 모인 김에 소개한 겁니다.

삼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이 박수를쳤다. 일부는 감히 내부대신의 아들과 한자리에 있다는 영광 때문인지 아까보다도 더 조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들을 그림을 보면서도 힐끗힐끗 호사카를 보고 또 그 눈으로 또 점례를 보았다.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리고 옷은 또 얼마나 세련되게 입었는지.

점례의 모자는 그 자리에서도 빛이 났다. 사람들은 그 얼굴에 맞는 그 모자라는 듯이 황홀한 표정으로 곁눈질했다. 그림은 여러 점이 팔렸다. 이같은 추세라면 남은 것도 오늘 중으로 다 팔릴 것으로 보인다.

삼촌은 구체적으로 가격을 제시하지 않았다. 가격은 점점 올라갈 것이다. 누가 봐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목포에서 왔다는 거상은 메인 작품 외에도 서너 점을 더 거래했다.

오후들어 분위기는 더 달아올랐다. 바람잡이 역할을 한 목포에서 온 거상의 역할이 컸다. 그는 상상 이상의 가격대를 옆 사람이 들으라는 듯이 흘렸다.

사 놓기만 하면 일 년 내에 서너 배는 더 뛴다는 말도 했다. 그와 동행이 아닌 듯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은 한 패였다. 모두 종로서 형사인 그들은 미리 삼촌과 짜고 가격을 올리려는 흥정을 벌였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번잡한 틈에서 범인을 찾는 것이 더 쉽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오랜 경험에서 오는 직감은 수상한 자를 발견하는데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휴의는 망설였다. 점례가 오라고 한 날이 바로 오늘이다. 갤러리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점례는 약속 장소가 바뀔지 모른다면서 그때 오면 정확한 일정을 말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각 말고 다른 만찬장을 휴의는 생각하지 않았다. 장소를 바꿀 이유가 없었고 굳이 안전이 염려된다면 병력을 깔면 될 것이다. 그들은 폭약설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더구나 시한폭탄에 의한 폭파에 대한 대비는 전무한 상태다. 수류탄 투척 거리 이내나 유효 사거리 내에는 병력이 진을 치고 있다. 더구나 일본각은 사방이 트여 있다.

높은 곳에 있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방어하기에 좋다. 뒤는 산이다. 산은 이미 헌병대가 접수했을 터. 이보다 더 안전할 수는 없는데 굳이 장소를 변경한다고.

점례가 거짓말을 했나. 휴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대원 하나가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지 마시고 같이 고민하면 풀릴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말했다. 휴의는 비밀로 하려다 말고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장소가 바뀌면 어쩌지? 하고 정말로 의견을 묻듯이 물었다.

'그럴리 가요. 초청받은 당사자한테 직접 들었는데 틀릴 리가 있나요? 그것도 바로 이틀 전에 받았잖아요.'

'그러게. 내말이 그 말이야.'

휴의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반신반의했다. 그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면서 대원들에게 흩어져 있으라 명령했다.

'저녁에 다시 여기서 만나자.'

'잘 다녀오시오. 언제나 거사 전날이 문제가 되니 몸조심하시고요.'

휴의는 광화문을 거쳐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거리에는 점례의 귀국과 조선 일등 여류화가의 전시회 일정이 담긴 플랑카드가 걸려 있었다. 휴의는 그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그것 때문에 자신의 발길이 다른 곳으로 갈 리는 없다.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구부정한 허리는 똑바로 펴져 있었으나 흰 머리는 그대여서 청년이 아닌 중년의 나이였다.

호떡을 파는 상인 앞에서 휴의는 하나를 주문하면서 간이 의자에 앉았다. 지나는 행인들이 제법 있었다. 지게를 진 사람은 나무의 무게 때문인지 등을 새우처럼 하고는 땅만 보고 걸었다. 그런데도 행인들을 용케도 피해갔다.

대각선으로 점례의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가 보였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들어가고 또 일부는 나왔다. 일반에게 무료 개방이어서 그런지 호기심 있는 사람은 가다가 뒤돌아서 올라가기도 했다.

심지어 장사꾼 차림의 허름한 사람도 있었는지 쫓겨날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호떡을 다 먹고 나서도 그는 올라간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

그림 감상이 다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휴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골목길에서 한 사나이가 휴의에게 다가왔다. 둘은 악수를 했다. 그리고 뭐라고 몇 마디 주고받더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밀정은 그 전에 휴의를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걸으면서 곁눈질로 자꾸 쳐다봤다. 갤러리 앞에서 휴의는 올라가는 그를 보고는 성급히 파고다 공원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계속 그 길을 가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다. 낙원상가에 들어가 떡을 사 먹고 다시 나와 청량이 쪽으로 갔다고 길을 건너 다시 종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약속한 삼 십 분이 흘렀다. 아까 만났던 밀정이 저 쪽에서 모자를 벗었다 다시 썼다. 인파 속에서 그 행동은 휴의의 눈에 띄었다.

'점례를 만나 보았는가.'

'봤어요. 미인이대요. 호사카인가 하는 사람도 잘생겼어요. 둘이 잘 어울려요.'

휴의가 인상을 찌뿌렸다.

'그것 보라고 간 것 아니잖아요. 장소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어요.'

'갤러리 사장이 말하데요. 거기 있는 사람 다 들었어요. 내일 총독이 만찬을 연다고요. 언덕 위에서. 그 말을 듣고 바로 나왔지요. 여류 화가하고는 한 마디도 섞지 않았어요.'

'휴의가 보냈어요. 장소 변경됐나요? 이렇게 딱 두 마디 물으라고 하셨지요? 안 물어보길 잘했어요?'

밀정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았어요. 어서 여기를 뜨세요.'

이 말을 하고 휴의는 종로 삼가에서 광교로 발길을 돌렸다. 삼촌이라면 알만하다. 언덕 위라면 일본각이 틀림없다. 헌병대 사령부도 남산 언덕위에 있지만 거기는 아니다.

총독 관저에서 멀기도 하고 굳이 거기까지 나들이할 필요가 없다. 휴의는 확신했다. 점례를 못 만 난건 아쉽다. 그러나 그와 나의 관계는 여기까지다. 둘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 만나겠지.

지금은 아니다. 가까운 미래도 아니다. 그런데. 휴의는 점례가 과연 그 시각에 일본각에 올지 어떨지 그것 때문에 마음이 답답했다. 총독의 초대인데 약속을 어길 수 없다. 시간도 그렇다.

그렇다면 점례도 죽는다. 내 손으로 점례를 죽인다. 그녀를 죽일 만큼 내 임무가 크고 막중한가. 대의가 내 사랑보다 큰가. 조선독립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독립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휴의는 그런 원초적인 질문을 되풀이했다. 수없이 했던 질문을 또 하고 또한다. 확신할 수 없는 마음. 그는 흔들렸다. 지금까지 늘 그렇듯이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마다 이런 노래가 귀에 들렸다.

'신대한의 독립군의 백만용사여,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첫 구절이 계속 맴돌았고 그것은 어느새 입안으로 들어와 사탕처럼 녹아들었다. 달콤했다. 나는 신대한 독립군이다. 조국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 누구나 소망하는 행복과 사랑, 그것을 네게서 뺏지 않으마. 너는 말했지. 아무도 그 누구도 신이라고 할지라도 두 손에 움켜쥔 그것을 가져갈 수 없다고. 

'내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고요. 오빠, 나를 놔줘요. 떠돌이 삶은 이제 없어요. 내 몸속에는 아이가 있다고요. 그이와 나의 아기. 핏속에 내 내면에 그것이 있다고요. 아시겠어요? 내 인생에 껌딱지처럼 눌러붙은 고통이 쾌락으로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요.'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그럴 자격이 1도 없어. 너는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됐어. 대우는 물론 그에 따른 보상도 받아야지. 점례의 삶에서 고통은 없어. 짓누르는 그 어떤 것도 사라졌어. 내가 걸림돌이라고? 천만에. 난 너의 행복을 빌어 줄거야. 죽는 그 순간까지 말이야.'

그나저나 어쩌나. 그의 죽음을 알게 된 내가 그의 행복을 빌다니. 안돼. 그럴 수는 없어. 그녀는 내가 단순히 권총으로 저격하는 줄 알겠지. 그거 아냐. 바보야. 폭탄이야. 시한폭탄. 천장에서 총알 수백 개 아니 수천 개가 우수수 떨어져. 살아 나올 사람 아무도 없어. 너도 너와 함께 있는 남자도 총독도 그 누구도 생명을 이을 수 없어.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야. 닥쳐올 결과물은 뻔해. 시체들, 피묻은 시체들. 사지가 찢기고 또 찢겨 신이라도 다시 모을 수 없는 몸뚱아리들, 끝없는 비명. 죽음으로 날 데려가라고 살아 있는 자들이 외침. 난 알아.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런 광경을 그리면서 휴의는 광교 통을 지났다. 무교동으로 접어들었고 남산을 향해 언덕을 올랐다. 게딱지 같은 건물이라고 하기도 뭐한 초가들 사이로 웅장한 건물이 들어왔다.

그 뒤의 광화문은 초라했다. 그것마저도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살고있는 저 집의 주인, 그래 조선 총독이지. 네 운명도 내일이면 끝장이다. 운명을 거역할 수 없어. 신의 명령이기 때문이지.

휴의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믿기지 않았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새로움을 향해 덤벼들자. 그나저나 점례는 어쩌지. 그는 점례의 죽음만은 상상하지 않았다.

내 손으로 그를 죽일 수는 없다. 그날 오후 주모는 여러 차례 광주리를 이고 일본각을 들락거렸다. 돼지 머리도 있고 소 다리도 있고 각종 야채도 있다.

헌병들은 그녀를 누구냐고 불러세웠다. 식당 총지배인. 내일 만찬 준비를 위한 음식이라고 말할 때 주모는 떳떳했다. 헌병은 그녀는 누구냐고 다시 묻지 않았다.

그날 저녁 휴의는 대원들과 이불을 덮어 쓰도 다시 신대한의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고 부르고 또 불렀다.

'숨 막혀요.'

또 한 번 신대한의 독립군의 백만 용사여!가 시작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자 대원 하나가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그려 그만하자.'

휴의가 대답했다. 새벽 세 시다. 날래게 움직이자. 폭약 위치는 확인했다. 산을 타고 내려가자. 그러러면 자정에 움직이자. 인왕산을 타고 가자. 수성동 계곡 쯤에 병력이 있을지도 몰라.

가볍게 따돌리자. 셋은 흩어져서는 안 된다. 뭉쳐 다녀야 해. 담장을 훌쩍 타고 올라가서 지붕에 납작 엎드리자. 정오에 타이머를 맞추고 올라갔던 역순으로 내려온다. 오케이.

그 시각 점례는 일이 틀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휴의는 오지 않았다. 그의 대리인으로 의심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대체 그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분명히 장소 변경이 있을지 모르니 갤러리에 참석하라고 했고 그도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잡혔나. 잡혔다면 뉴스가 나오겠지. 겁이 났나. 어디 숨어서 망을 보고 있나. 

점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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