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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07:46 (금)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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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1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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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다시 온 휴의를 주모는 알아보지 못했다. 옷을 바꿔입고 안경을 썼기 때문이다. 허름해 보이는 차림이나 왠지 깔끔한 인상도 드는 복장이었다.

'여기 막걸이 한 병하고 메밀전 하나 주시오.'

굵고 묵직한 음성에 안쪽에 있던 주모가 황급히 나왔다. 예, 예 대답을 하면서 주모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항아리 속의 막걸리를 주전자에 담았다.

휴의는 젊은이 서 넛이 좁은 시장통을 지나가자 가만히 있기도 뭐해 '주모 어서 가져 와요' 하고 다소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접대를 그 모양으로 해서 되겠느냐는 핀잔이 섞여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렸거나 자긴보다 늦게 온 사람에게 음식을 먼저 가져다 준 것에 대한 항의 같은 표현이었다. 그러나 나직하고 조용하게 말해 옆 자리의 손님도 알아 듣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의 주목을 일부러 끌 필요는 없었다. 급히 손을 놀리던 주모가 미안했던지 다시 한번 예예,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요,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도 한 참 미안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청년들은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

'주모도 한잔하시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술은 못한다고요.'

'주모가 술을 못하면 누가 한단 말이오.'

휴의가 비운 자신의 잔에 반잔 쯤 따라 주었다. 그리고는 아까보다도 더 나직이 그 왜 할머니 아시지요. 작년에 같이 뵈었는데요. 주모의 눈이 작아졌다.

'조선에 가면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데요.'

주모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 왔던 양반이네.'

'나머지 두 명은 어디 갔소.'

'어디 가긴. 제갈 길 갔지요.'

'나를 모르시 겠소?'

'혹시 상하이에서 보낸 요원이오.'

쉿, 휴의가 손가락을 입에 갔다 대는 시늉을 했다.

'작년에 할머니와 여기 와서 술을 먹었소. 이제 기억이 나오?'

'그래요. 어렴풋이. 그런데 왜 또 왔소. 그때보다 지금이 더 위험하단 말이오.'

주모가 걱정스러운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옆자리 손님이 일어서 나갔다. 주모가 고개를 길게 뺐다.

'그러게요. 나도 모르겠어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좀 도와주시오. 일본각에 음식을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요. 그렇게 어제 말했지요.'

'그 음식 거리는 어떻게 날라요.'

'머리에 이고 가지요.'

'잘 됐소. 내가 주는 것을 음식 사이에 넣어서 가져가시오. 그리고 남의 눈에 안 띄게 잘 보관하셔야 합니다.'

휴의는 주모의 눈을 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고 검은 동공이 제대로 박혔다.

주모가 눈길을 피하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야야, 동호야, 손님에게 술 한 병 더 내오라.'

남자의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젊은 청년 하나가 주전자를 내밀었다.

'이름이 동휴요? 아니오 동요.'

'왼손잡이 군요.'

'그래요.'

그가 슬쩍 휴의를 보더니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꺼리는 듯한 태도였다.

'저 애가 손가락을 다쳤어요.'

주모가 그 말을 하면서 말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주모의 눈에 슬픔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휴의는 가슴이 저렸다. 조선에 오기 전에 그는 주모의 내력을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남편이 징용에 끌려가 죽었어요. 어디서 죽었는지 모르지요. 일본 광산이라고 하는데 어딘지는 모르지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이라고 했소. 어쨌든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어요. 그리고 딸도 그렇게 됐는데 고향 떠나고 벌써 6년째 소식이 없어요. 다들 죽은 걸로 알고 있어요. 남편 죽고 딸은 생사 불명이 됐지요. 하나 남은 아들이 학도병에 끌려갈 나이가 되자 결단을 내렸어요. 어느 날 자고 있는 아들의 손가락 세 개를 잘랐어요. 고기써는 바로 그 칼로. 총을 쏠 수 있는 오른손이었지요. 이놈마저 죽일 수 없어 그렇게 했어요. 참 독한 사람이지요. 이년이 참 독해요. 어쨌든 그 일로 내 아들은 징용을 피해 살아남았어요. 소문에는 어미를 도와 돼지머리를 자르다 잘못해서 생긴 사고라고 하는데 어미는 그 말을 하면서 피눈물을 흘립니다. 정말 눈물에 피가 섞여 있었다니까요.'

여기까지가 휴의가 알고 있는 주모의 내력이었다. 휴의는 막걸리 한 잔을 더 걸쳤다. 취기가 올랐으나 자신을 방어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다.

그만둘 때 딱 그만 두고 자리를 떴다. 그는 미행하는 자가 없음을 알았으나 혹시나 해서 경희궁까지 갔다가 아지트로 돌아왔다. 주모는 믿을 만 했다. 지난 번 보다 더 강단있어 보였다.

그 시각 점례는 잠을 쉬 자지 못했다. 이제 이틀 남았다. 가부간 일이 벌어질 것이다. 성공이든 실패든 결판이 난다.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가. 만찬장에는 총독뿐만 아니라 호사카도 있다.

자신도 있고 배 아픔이 임신이라면 아기도 있다. 그에게 실토할까. 휴의를 만났다고. 조선에서 제일 몸값이 높은 악명높은 독립군 휴의를 만났다고. 그래서 그에게 총독 만찬 장소를 알려 줬다고.

아니다, 그건 아니다. 아무리 호사카라고 해도 그런 후에는 이것으로 끝장이다. 휴의도 마찬가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내일 열리는 전시회에 그가 참석할지 모른다.

그를 만날 수도 있다. 인파 속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말을 걸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설명하면서 잘못 나온 소리라는 듯이 장소 변경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다.

눈치껏 그가 알아듣는다. 그 다음은? 다음은 나도 모른다. 그는 빠르게 갤러리를 빠져나간다. 거짓 정보를 듣고 어뚱한 곳에서 나를 원망할 수 있다.

아니다. 장소는 또 바뀔 수 있다. 그는 결코 나를 원망할 수 없다. 그래, 그것이 최고의방법이다. 어디로 할까. 그냥 총독부라고 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뻔해.  그래, 좋아. 헌병대사령부라고 하자. 거기라면 총독이 만찬을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장소다. 마침 신사참배도 할 수 있으니 더 없는 장소다.

'장소가 바뀌었어요. 남산 헌병대사령부 만찬장. 정오.'

이 짧은 한 문장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은 전과 같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주일 후 나는 조선을 떠나 다시 파리로 간다. 그와 인연은 더는 없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점례는 편안해졌다. 그래, 내일 일은 그렇게 정리해 두자.

호사카가 등을 돌렸다. 자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 뒤늦게 시차가 오나보다.

'당신 안 자고 있지. 뭘 그렇게 생각해.'

'조선에 오니 그런가 봐요.'

'그럴 만도 하지. 참, 죽마을에 한 번 갔다 오지 그래.'

'아니에요. 거긴 이제 아무도 없어요.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일가붙이도 없는데 가서 뭘 하겠어요?'

'미안해.'

'그러라고 말한 게 아니잖아요.'

'알아주니 고맙군. 그나저나 난 당신이 필요해. 잠이 필요하다고.'

그가 점례에게 가까이 왔다.

'당신 몸도 생각해야지요. 바로 어제 일이잖아요.'

'아직은 팔팔한 30대라고.'

'사십이 낼모레라는 걸 잊지 말아요.'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점례는 눈을 감았다. 그도 잠이 필요했다. 몸이 노곤하면 그런대로 숙면에 빠질 수 있다.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되레 화합했다. 밤은 깊어 갔고 인경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잠이 들었다 점례는 다시 깼다.

’왜 나타나서 날 괴롭히나요. 오빠, 인연은 이미 끝났다고요. 변장을 하고 위험한 짓을 하는 것은 자유지만 거기에 날 끌어들이지 마세요. 난 조선독립과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조선이든 일본이든 마찬가지라는 걸 오빠도 잘 알잖아요. 당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어땠나요? 조선사람이 통치해서 잘먹고 잘 살았나요? 일본이 들어와 더 어려워졌나요? 아무려나 난 관심 없어요. 죽마을 일은 잊어요. 아니 그곳에서도 난 오빠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그러니 착각하지 말아요. 증오해요. 사랑 같은 것은 애초에 없어요. 내 행복이 부러운가요? 그래서 위험한 일에 목숨을 거나요? 거창한 일을 하면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마침내 돌아올까 봐서요. 천만에요. 난 그림을 그려야 하고 지금의 나로 만족해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요. 싸움의 한 복판에서 나를 빼주세요. 내 삶은 이제 새로운 길로 접어 섰고 오빠는 오빠의 길을 가요. 왜 날 힘들게 해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요. 그래요.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작별인사가 필요하다고요? 난 그것과 상관없어요. 이미 마지막 굿바이, 손을 흔들었어요.'

'알아, 안다고.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그리고 네 인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점례야,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네 행복이야. 오빠는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빌고 또 빌어. 부탁이다. 이번 딱 한 번이야. 제발. 조선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주석은 말했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조선은 독립할 수 있대. 생각해봐. 독립된 나라의 주인으로 사는 모습을.'

'싫어요. 생각 안 해요. 독립해도 난 주인이 아니에요. 당신도요. 주인은 따로 있고 우리는 종이에요. 난 파리로 가요. 조선은 이제 나와는 연을 다했어요.'

'그래 알았다. 점례야, 네 뜻이 그렇다면 더는 이 문제로 괴롭히지 않으마. 그동안 고마웠다. 혹시 아니. 파리 생젤리제 거리를 걷다가 오빠를 만나게 될지도. 그 때는 오빠가 아는 체하지 않을게. 그냥 잘 살아주고 있어 고맙다고, 앞으로도 잘 살라고 그렇게 빌어만 줄게.’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점례는 조용히 일어났다. 목욕을 했다.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지도 않고 수건 한 장 만 걸쳤다. 그리고 연필을 들고 하얀 백지에 쓱쓱 줄을 그어 나갔다.

왼쪽에는 이 층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그 오른쪽에는 조선식 한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 건물을 사이에 두고 총독과 사람들이 모여서 만찬을 즐기고 있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은 호사카였다. 총독보다도 더 잘생겼고 근엄했고 당당했다. 그를 호위하듯이 총독의 대신들과 장관들이 도열 했고 그들을 호위하는 헌병대사령부의 군인들이 긴 칼을 차고 담장을 치듯이 둘러서 있었다.

동휴의 모습도 보였다. 깃을 세우고 머리를 짧게 세운 그가 군중 속에서 붉은 눈으로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독립군 복장의 휴의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은 호사카가 아니라 동휴와 휴의였다. 맞대결을 펼치는 듯한 자세가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들 것처럼 긴장감이 돌았다. 점례는 스케치를 완성하지 않았다.

뭉쳐 있는 사람들은 점례가 아니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형상이었다. 손가락을 짚으면서 호사카는 여기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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