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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의 그렁그렁한 눈에서 삶의 의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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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의 그렁그렁한 눈에서 삶의 의미를 느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15 0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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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뒤척였다. 나갔다 들어온 점례라고 생각했는지 신경쓰지 않고 다시 이불을 끌어 올렸다.

내버려 두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애써 냉정한 척 해 보았지만 머리털이 쭈뼛하고 올라선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점례는 팔뚝을 쓸어 내렸다. 닭살 돋은 피부가 눈에 띌까 두려웠다.

요동치는 심장이야 감출 수 있지만 몸의 소름은 들킬 수 있다. 창가로 가서 점례는 밖을 내다 보았다. 세상은 무심한 듯이 흘러가고 있다. 강물처럼 그렇게 낮은 곳으로 가는데 어느 순간 범람한다. 역류한다.

잘한 일인지 아닌지도 판가름이 서지 않는다.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왜 나타나서 내 가슴을 찢어 놓는가. 찢은 것을 다시 꿰맬 재간도 없으면서 왜 그러는지 점례는 휴의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고 깨진 유리컵이다. 점례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시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감은 눈은 되레 조바심만 불러 일으켰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점례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나는 쪽으로 갔다. 그런데 벌서 유지가 받고 있다. 그는 몇 마디 하고는 알았다면서 일어났다.

'누구 전화예요?'

' 총독부에서 보낸 사람인가 봐. 전화로 해도 될 것을 커피숍에 있다고 잠깐 보자고 하네. 여보, 잠깐 나갔다 올게.'

'세수라도 해야지요.'

'아냐, 아내 됐어.'

유지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점례는 얼른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아 주었다.

'눈곱은 떼고 가야지요. 아무래도 총독부에서 보낸 사람을 만나는데요.'

호사카는 찬 물기를 느끼며 인상을 치푸렸다.

'됐거든.'

그러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금방 올라 올 거지요?'

'어, 당신은 외출 준비나 하고 있어. 나가서 점심 먹고 화신백화점 가야지.'

그의 등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호사카가 나가자 점례는 안도의 안숨을 쉬었다. 그게 안도할 일인가. 어쨌든 그가 마주친 내 눈에서 흔들리는 기색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행이다. 아직은. 살면서 그에게 처음으로 속이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배신이다. 

안도는 커녕 되레 걱정이 앞섰다. 총독부 사람이라고? 처음에는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휴가 불러낸 것일까. 아니면 헌병대사령부에서 휴의를 체포했나. 별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이럴수록 침착해야지. 점례는 막사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겨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려운 경험은 새로운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이 된다. 허둥대지 말자. 소인배처럼 당황하다가는 일을 망친다. 그림이고 뭐고 다 끝장이다.

그녀는 옷장을 열었다. 좀약 냄새가 밀려 나왔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바로 손을 들이 밀어 옷을 꺼내 들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거울에 대봤다. 어울렸다. 이와 비슷한 색깔의 옷이 있다면 좋겠다. 화신백화점은 어떤 모습일까.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다.

고급지다고 했다. 서양의 어떤 백화점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호사카는 줄곳 조선에 가면 그곳에 가서 쇼핑을 하자고 노래 불렀다. 점례는 다시 옷을 걸어 두고 문을 닫았다.

쇼핑에 집중하자. 아니다. 그녀는 전화기 옆으로 가 메모지와 연필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창가에 앉았다. 슥슥 그려 나갔다. 거침이 없었다. 어느 새 호사카의 얼굴이 그려지고 수건을 든 점례가 다가가 얼굴을 닦아주는 모습이 완성됐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호사카가 들어왔다. 그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점례는 그의 표정에서 무슨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나가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누구에요?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레 일정은 전에 말한 일본각 있지? 거기서 정오에 하기로 했어. 별 것 아닌 걸 가지고 오라가라 해.'

'그래도 전화로 하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총독님이 신경 쓴 것이니 고맙게 받아요.'

'그래야지. 여보, 어서 준비해요. 나갑시다. 오늘은 돈 좀 써야지.'

'당신 옷도 사고... 내 옷은 됐어요.'

호사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호사카는 소리는 웃었지만 실제로는 웃지 않았다. 그가 만난 사람은 점례가 예측 범위에 두었던 종로서장이었다. 그는 휴의가 점례와 내통할 거라는 첩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조심하시고요. 그런 낌새가 보이면 즉시 알려 주세요. 호사카님의 안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일본 제국에 관한 일이니까요.'

난데없이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려다 호사카는 그만두었다. 아버지의 편지가 떠올랐다. 사실이구나. 그러면 어쩌지.

'다른 내용은 파악된 게 있나요? 내가 모르는 다른 정보를 갖고 있다면 말해주시오? 아는 것은 것은 숨기지 말고...'

'그리고요.'

종로서장이 몸을 앞으로 움직여 호사카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총독님의 만찬 장소나 시간을 혹시 사모님이 알고 계신가요?'

'글쎄요. 내가 말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에 안나요.'

'잘 더듬어 봐요. 말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안 되겠어요. 장소가 새어 나가면 위험합니다. 휴의 일당이 알아채고 무슨 짓을 꾸밀지 몰라요. 일단 그 일은 다른 전달이 있을 때 까지 함구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나를 만난 것은 아까 전화에서 말씀 드린 대로 총독부에서 왔다고 둘러 대세요. 절대로 종로서를 거론하면 안 됩니다. 조선 이름인 동휴 역시 금물이고요. 감이 안좋아요. 잡힐 듯이 안 잡히니 애가 타요.'

'아니 천하의 종로서에서 휴의가 뭔가 하는 독립운동한다는 사람하나 행방을 모른다니 말이 됩니까.'

호사카가 벌컥 화를 냈다. 종로서장이 납작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각하.'

'그만 두시오.'

호사카가 입맛을 다시면서 이럴 시간 있으면 나가서 빨리 그 자를 체포하라고 눈을 부라렸다. 마치 상관이 부하에게 하는 듯한 말투며 행동이었다.

군인 시절로 잠깐 호사카는 돌아갔다. 그러나 곧 평정심을 찾고는 장소를 그 자가 사전에 안다고 해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출입하는 사람의 신원 검사를 철저히 하고 미리 안전 장치를 해 놓으면 될 거 아니오. 총독님이 초대하는 인원은 우리 둘을 포함해 겨우 10명 정도인데요. 그 정도 인원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한다면 종로서 존재 이유가 뭔가요?'

따지듯이 묻는 말에 동휴는 시선을 피하면서 휴의라는 자는 미군 폭파 교육을 받은 자로 단순한 암살범과는 다르다고 했다.

'알았어요. 그건 됐고요.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비밀을 지키라는 것 말고 또 있어요?'

'없습니다. 각하.'

동휴가 명령을 받은 부하처럼 똑부러지게 말했다. 그러더니 작전장교 였으니 잘 아시겠지만 혹 사모님이 수상한 행동을 하면 다그치지 말고 연락을 주시거나 뒤를 좀 봐주세요.

'어, 이제는 나보고 휴의를 체포하라는 말인가요?' 

'그건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리다. 내가 잡아서 갔다 드리지요.'

화가 난 호사카는 이 말을 하고 그와 헤어졌다. 그는 많은 생각을 했으나 하나의 원칙만은 분명했다. 오늘의 일을 일절 함구할 것. 그러나 걸리는 게 있었다.

아까는 했는지 안했는지 모른다고 했지만 생각해 보니 분명히 약속장소를 말했다. 호사카는 점례처럼 이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의 오후 일정은 변하지 않았다.

둘은 화신 백화점에서 각자 두어 벌의 옷을 샀다. 호사카는 한사코 거절했으나 거듭된 점례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했다.

'저를 봐서라도 좀 사세요, 네.'

'그래, 알았어. 당신의 기품에 맞춰야지.'

'그 말은 아니고요.'

'어쨌든 그래야 겠어.'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휴의는 인파속으로 스며들었다가 일본각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두 명의 동지들이 따랐다. 인왕산 아래 서쪽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그는 앞서갔다. 두 명의 대원이 따로 따라오는 것을 의식하면서 장소 파악에 나섰다. 일본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변의 허름한 것과는 달리 서양식의 아담한 이층 주택은 눈에 확 띄었다.

그런데 그 옆에 또 하나의  건물이 붙어 있었다. 기와 지붕이 단아한 한옥이었는데 일본각 안에 들어 있어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엄연히 공간이 분리된 두 채였다.

만찬이 어느 건물에서 열릴지 알 수 없었다. 두 군데 다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야 하나. 어려운 짐이다. 건물하나도 벅찬데 두 군데라니. 이곳에서 식사나 술을 먹은 적이 있다면 대충 짐작할 수 있으나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당장 그럴수는 없었다. 사흘전이나 벌써 종로서나 총독부 요원이 안전 점검을 위해 상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상한 자가 나타나면 이유불문 즉시 체포할 것이다. 손님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것은 호랑이 굴로 발을 들여 놓는 꼴이다.

휴의는 한 번 건물을 앞 뒤로 둘러 본 뒤 곧바로 시장통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 틈에 섞이는 것이 신분을 감추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두 대원과 함께 그들은 점심으로 국밥을 시켜 놓고 앉았다.

'그래, 동지들 보기에 어느 건물에서 만찬이 이뤄질 것 같소.'

'글쎄요. 서양 건물일 것 같기도 하고 한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대장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도 감이 잘 안와. 어떤게 맞을지 모르니 두 군데에 할까.'

'모험은 성공하기 어려워요.'

다른 대원이 말했다.

'확률이 낮은 게임은 안하느니만 못해요. 그걸 누가 모르나.'

그 때 주모가 막걸리를 들고 나왔다.

'안주는 필요없으신가요?'

김치 조각 몇 개를 내놓으면서 주모가 사정하듯이 말했다.  

'원래 우리는 낮 술은 안해요. 그런대도 형편을 봐서 팔아주는 겁니다.'

대원 중 키가 작은 하나가 받았다.

'세분이니 한 잔씩 한다면 표도 안날 텐데...'

주모가 힘없이 말했다. 아들 하나 있는 것이 병이 났는데 치료비가 부족하다고 했다.

'알았어요. 대신 순대는 푸짐하게 주시오.'

'네, 어련하겠어요.'

주모의 목소리가 밝았다.

'메밀 전도 하나 추가요.'

'고맙네요, 신사분들.'

신이 난 주모는 순대를 싹뚝싹뚝 소리가 나게 잘랐다.

그리고 끓는 기름에 미리 준비한 반죽을 집어 넣으면서 흥얼 거렸다.

'기왕이면 맛나게 해주시오, 주모.'

'음식 솜씨는 내가 시장통에서 최고지요. 저기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간혹 온다니까요.'

목을 빼고 주모가 총독부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사흘 후에는 가게를 못열어요. 먹고 싶어도 내 음식 맛 못본다니까요. 글쎄 일본각으로 오라고 하지 않나요? 음식 준비를 하는데 제가 뽑혔지 뭐예요.'

'무슨 말인가요? 일본각이라니.'

대원 하나가 일본각이라는 말에 반색하면서 물었다.

'아 글쎄 총독님이 간혹 사람을 초대해 만찬을 하는데 그날이 사흘 후 라고요.돈은 떼먹지 않아요. 넉넉히 주지는 않지만. 그것만 해도 황송하지요.'

'그렇군요. 거기라면 건물이 두 개인데 주로 식사는 어디서 해요?'

'왜, 그 서양식의 멋들어진 건물있잖아요. 거기서 만나 커피 먹도 다과 먹고 자기들끼리 무슨 회의 같은 것을 하고요. 그런 다음 식사는 한옥 집으로 옮겨서 해요. 그곳에서 먹어야 맛이 있다나요.'

'그럴 테지요. 내가 총독이라도 한옥에서 먹지요.'

'주모, 여기 있소. 잔돈은 아들 치료비에 보태 쓰시고.'

고맙다고 말하면서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을 주모를 두고 대원들은 시장을 빠져 나왔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 전망이다. 한옥이라면 폭약도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설치도 쉽다. 전선 처리도 어렵지 않다. 휴의는 신이 내편이라도 된 듯이 흡족한 마음이 됐다. 정리가 되자 점례가 떠올랐다. 그녀를 만나고, 첫사랑 점례를 만난 것이 신의 한수가 된 것이라고, 그녀는 내 사랑이며 삶의 은인이라고 휴의는 거듭 감사했다.

그녀의 손, 그녀의 입술 그리고 가련한 그 눈빛,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지금은 비록 호사카와 같이 있지만 언젠가 당신에게 달려 갈게요.

휴의는 점례의 그렁그렁한 눈에서 그런 말뜻을 읽었다. 자, 장소도 알았으니 이제 하루 이틀 숨어 지내자. 디데이 전날 밤 출동이다. 한 시간 안짝이면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할 수 있다.

기와지붕이 천지사방으로 날아가고 지붕이 폭삭 가라앉는 장면과 함께 엄청난 먼지가 날리는 것이 눈 앞에 선했다. 그러면, 휴의는 그 장면에서 생각을 멈췄다.

모레 전시회는 어쩌나. 위험을 무릎쓰고 가야하나. 아니면 변경될 장소가 아니라는 확신이 선 만큼 그대로 시행할까. 휴의는 두 대원에게는 이런 심란한 의중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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