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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3:17 (금)
사령관은 자신의 표현에 만족감을 드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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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은 자신의 표현에 만족감을 드려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1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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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의가 그런 상념에 빠진 것은 어떤 운명의 힘 같은 것이 자신을 다른 곳으로 끌고 있다는 확신때문이었다. 왜, 감이 온다고 하지 않던가. 그 감은 자신은 이제 이 일로 부터 떨어져 있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심신의 피로나 안전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소임은 이것으로 끝났다. 높은 곳에 사는 제우스의 신탁 같은 것이고 하느님의 계시와도 같은 것이다. 신 내림 받아야 할 무당의 사명이었다.

이 일만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 휴의는 마지막 임무 수행을 위해 점례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리라고 하니 왠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라스트 댄스는 화려해야 한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끝이 좋으면 시작과 중간의 과정이 험란했어도 행복하다고. 휴의는 그것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을 끌어 들였다. 자신을 도와 달라고. 딱 한 번 남았다고. 

그래서 인지 기자회견 장에서 점례가 한 말이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다. 되레 이해한다는 심정이었다.

'조선독립을 원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물론 있다. 당연히 한 사람 이상이고 그 이상에 자신도 포함돼 있다. 그녀의 다부지고 똑부러진 대답을 듣고 역으로 휴의는 조선독립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반증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그는 회견장에 조금 늦게 들어와 점례가 그 말을 마치자 마자 자리를 떴다. 하마터면 듣지 못할 그 말이 왠지 어떤 좋은 징후로 다가왔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바로 엘리베이터 대신 회견장 옆의 계단을 이용해 윗층으로 몸을 숨겼다.

그도 조선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삼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피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비상 계단의 푯말이 보였고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던 걸음을 틀었을 뿐이다.

계단을 오르면서 휴의는 이러기를 잘했다고 자신에게 칭찬했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 밀착하다 보면 못보던 것까지 볼 수 있고 변장한 자신의 모습이 들통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동휴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아침에 헌병대사령관이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고 찾아서 갔다오다 그렇게 됐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회견은 이미 끝났고 휴의는 자리를 막 뜬 사이였다.

간발의 차이로 둘은 또다시 만나는 것을 뒤로 미뤘다. 체포당하거나 빠져 나가는 것을 만난다고 표현하니 죽마을 옛친구의 해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체포든 아니든 만나는 것은 만나는 것이다.

늦었어도 동휴도 휴의처럼 얻은게 있었다. 점례가 마지막으로 한 말 조선독립에 대한 그의 확고한 태도 다시 말해 조선 독립을 원하는 사람이 있나요? 하는 대목이었다.

휴의와 동휴는 동시에 그 말을 들었으나 움직임은 휴의가 한 발 빨랐다. 늦게 왔으니 조금 늦장을 부린 것이 휴의를 놓친 이유인데 동휴가 그것을 알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그렇지, 점례라면 그럴거야.' 하는 기대가 들어 맞은 것에 만족할 뿐이었다. 만족한 것은 동휴 뿐만이 아니었다. 

공개석상에서 한 그 말은 다음날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조선 제일의 화가 귀국 일성은 조선 독립 필요 없다' 였다. 굵은 글자로 세로 두 줄로 밝힌 신문을 유지도 보았다.

'이것점 봐, 역시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그는 점례에게 신문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점례가 받아들고는 '예술이 주가 아니라 정치가 그 자리를 차지했네요. 다행히 우리 사진 밑에 그림이 실려 있어요.' 점례가 만족한 듯이 말했다.

'잘됐어. 이 정도면 만족이야. 그런데 모레 있을 총독님과 만찬에 당신도 참석할 거지.'

'당연하지요. 당신만 좋다면요. 아니면 불편한 자리라고 생각되면 저는 빠질게요.'

'아냐, 무슨 소리.'

유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없는 만찬은 의미가 없을 거요. 당신은 그 자리에서도 주인공이 틀림없어. 당신만한 미모가 어디 조선땅에서 찾을 수 있겠어요. 총독도 보고 싶어할 거야.'

유지가 점례의 기자회견장 말투를 흉내내면서 추어 올렸다.

'그러지 말아요. 난 미모와는 거리가 멀어요. 다만 당신이 사준 모자를 쓰고 간다면 부족한 면이 조금은 커버 되겠지요.'

'좋을대로.'

'그런데 장소는 어디예요?'

'응, 아직 통보받지 못했어.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총독부에서 연락이 오겠지. 높으신 분들이 다 참석하는 모양이야.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아니 당신 때문이지, 다 당신을 보려고 몰려드는 거야.'

'그만, 그 얘기라면 그 정도면 됐고요. 그나저나 당신 오늘 뭐, 일정이 있어요? 없다면 화신백화점에 들러볼까하고요. 당신 양복 좀 하나 사게요. 조선 날씨가 좀 쌀쌀하네요. 동복이 필요해요. 그에 어울리는 코트가 있어야 하고요.'

'그러지, 뭐. 간 김에 당신 옷도 하나 사구려. 조선 옷 품질이 어떻지 모르지만. 본국에서 수입한 것도 많이 있을 거에요. 모르지요. 여기서 파리의 옷을 구입하게 될른 지도요.'

' 메인드 인 프랑스라. 기분이 어떨까.'

이런 말들이 오고 갈 때 휴의는 3층 자기 방에서 미리 준비한 변장품으로 몸을 조금 바꿨다. 흰 머리를 감추기 위해 쓴 모자를 벗고 대신 안경을 썼다.

어두운 풀테 안경은 그를 더 늙은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지팡이를 챙기고 신문을 들었다. 누가 봐도 노신사였다. 거울 앞에서 휴의는 가진 게 엄청 많아 죽기 전에 다 쓰고 가겠다는 부자 다운 거드름을 보였다.

이 정도면 조선호텔에서 지낼만 했다. 어제는 점례를 만나지 못했다. 둘이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어 좀처럼 틈을 내기 어려웠다. 그는 다시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뒤적였다. 묵직한 커피향이 목에서 멈췄다. 신문을 놓고 다시 잔을 들었다.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것은 몸을 타고 뜨거운 기운을 남겼다.

점례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앞에 앉아 점례와 커피맛을 서로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전부터 휴의는 그것을 꿈꿔왔다. 누구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점례 아닌가.

오래전부터 점례가 자신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목울대를 타고 내려간 검은 액체가 인사동에서 입맞춤 할 때처럼 뜨겁게 달아 올랐다. 아, 어쩌란 말인가. 흩어지는 이 마음을. 휴의는 동요했다.

그러나 다시 신문을 들고 점례의 기사를 읽었다. 일고 또 읽어 아예 문장을 외울 정도가 됐다. 그는 이완용 패거리와는 다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변절한 것과 살기 위해 하는 단순한 말과는 다르다.

그는 이미 점례를 이해했다. 감히 용서할 자격은 없다. 용서라니 가당치도 않다. 점례의 잘못은 1도 없다. 민초들의 그런 말은 나라를 팔아 먹은 조선의 고위 관료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그에 비하면 점레는 어떤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해도 된다. 점례는 조선에서 녹을 먹은 게 없다.

되레 그를 팔아 먹은 것은 조선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점례가 더 그리웠다. 죽마을 해당화 핀 하얀 백사장을 다시 걸을 날이 올까. 달려나갈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오면 좋겠지만 그걸 기대할 수는 없다. 그가 내려오면 좋겠다.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으로 가뿐하게 걸어와서 내 앞에 앉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녀는 오지 않고 있다. 내 가슴은 이렇게 타들어 가는데 점례는 그걸 모른다.

휴의가 휴우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웠다.  그래 모자, 그 모자가 어울렸다. 파리에서 살아도 그녀는 부족함이 없다. 말은 또 얼마나 잘하는가. 무대위의 주인공이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글자에 박힌 눈을 휴의는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눈을 아래로 돌렸다. 흑백으로 흐릿했으나 아래의 여자와 위의 남자는 행복해 보였다. 하늘을 날고 있는 듯이 아니면 꿈속을 여행하는 듯이 두 사람은 순결했다.

남자가 그가 아니고 나였으면, 휴의는 감상에 빠져들었다. 폭파 전문가의 강인함은 어디가고 여인을 사랑하는 심약한 남자가 바로 휴의였다. 폭파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점례다. 생각은 더 앞서 나갔다.

삼엄한 감시의 현장보다 더 삼엄해진 머릿속이 어지럽다. 가슴이 아프다. 이 아픈 가슴을 어쩌란 말인가. 인생은 아름다운 것인데 나는 어찌하여 이리 살고 있는가.

왜 이리도 위험한 일에 끼어들었는가. 조상이, 나라가 내게 준 것이 있고 그래서 내가 갚아야 할 빚이 있는가. 아니다, 하나도 없다. 아무리 기억해도 없는 건 없다.

아버지는 밭을 갈았다. 돌 밭을 일궜다. 한 겨울 얼은 땅을 팠다. 곡괭이가 튀어 올라도 아버지는 그렇게 일했다. 그런데도 굶주렸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휴의는 애통했다. 따뜻한 밥 그릇 대접하고 싶다.

이러는 나를 부모님은 이해하실까. 칭찬할까. 꾸중할까. 아니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할 만큼 성장했다. 가는 길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다. 마지막이다.

이 일로 나는 은퇴한다. 독립운동을 떠난다. 그와 동시에 운동을 할 필요없는 독립된 나라가 온다면 좋겠다. 그러면 나아질까. 일본이 물러가고 나라가 세워지면 우리같은 서민들의 삶은 좋아질까.

배부르고 등 따뜻할까. 오늘 따라 휴의는 마음이 구부정해졌다. 감출 필요없다. 나의 욕망, 나의 사랑을 굳이 숨길 이유없다. 나에게 조차 그런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왜 나쁜가. 나 아닌 나를 생각할 수 없다. 결코 왜곡된 시선이 아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폭파 성공에 대한 집념은 집요했다. 그런 의문을 가질수록 휴의는 간절한 마음이 깊어졌다.

반드시 성공하리라. 점레가 내려온다. 그것도 혼자다. 여기로 온다. 바라던 바다. 커피를 시킨다. 지금이 기회다. 다가간다.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담배 연기뿐이다.

점례는 어디 있는가. 휴의가 일어선다. 너무 오래 앉았다. 지팡이를 짚고 안경을 고쳐 섰다. 허리를 펼 일은 없다. 걸음걸이도 석연치 않다. 그러나 옆에서 누가 부축할 정도는 아니다.

덕수궁이나 들러볼까. 시간을 좀 죽이다 점심을 먹고 다시 들어와서 커피를 먹자. 삼일간 예약 손님 처럼 행동하자.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부자아들과 조선나들이를 한 차림으로 의심살 만 한 것은 없다.

오후에는 대원 한 명을 만나기로 했다. 바로 부자 아들이다. 그러기 전에 점례가 왔으면 좋겠다. 바로 이순간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녀가 온다면, 그것도 혼자 온다면 더 없는 기회다.

할 말은 이미 준비됐다. 점례야, 나 휴의다. 총독 일정을 말해줘. 그것이면 충분하다. 혹 유지가 본다해도 길을 물어봤다고 둘러대면 의심살 만한 행동은 아니다.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빨리 약속장소를 아는 것이 성공의 첫번째 조건이다. 폭약을 설치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 눈치채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끝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 전에는 아니면 10시간 전 쯤에는 알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전은 실패다. 무도한 정권, 합병은 강제로 이뤄진 것으므로 불법이다. 조선이 처한 상황은 그것이다. 광복군 부사령관의 임무는 그것을 깨는 것이다.

광복군 부사령관. 휴의는 조선 파병시 임정 주석에게서 받은 광복군 부사령관이라는 직책이 마음에 들었다. 사령관보다는 부사령관이 마음이 편했다. 부사령관이라. 행동은 물론 마음도 진중하게 갖자.

다시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휴의는 마치 자신이 이순신 장군 다음가는 인물과 같은 무거움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영웅인가, 나는 소영웅인가. 아니다.

나는 그냥 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존재하지만 금방 사라질 운명이다. 운이 좋으면 나는 러시아에 간다. 언젠가 보았던 러시아에 대한 나의 마음은 포근한 것이었다.

거기라면 잊을 수 있다. 그나저나 사령관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지린성에서 군사훈련을 한다는데 잘 되고 있을까. 살아서 돌아오면 폭파 요원을 훈련 시켜 달라고 사령관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었다.

'그러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사령관님도 건강하시고요.'

'부사령관, 무운을 비오.'

그는 다음 작전은 일본 왕궁에 대한 폭파 공격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일본은 이빨 빠진 호랑이요. 운이 다했다는 말이요. 그런 자들에게 우리가 당했고 당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시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합니다. 미국이 일류고 일본은 이류로 전락했어요. 지금이 적기요. 일본이 무적함대가 아니라는 말이요. 깨트려야 합니다.'

사령관은 그 말을 하고는 제법 그럴듯하게 말했다는 듯이 흡족한 얼굴로 휴의를 바라봤다. 마음에 드는 표현을 썼다는 만족함이 묻어났다. 휴의는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동경에 갈 생각은 없다. 거기까지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 임무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 할 사람이 없으면 할 수 없다. 나의 일은 조선총독 하나로 족하다.

내 임무는 거기까지고 임정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더 이상 없다. 러시아로 가련다. 거기서 다른 생을 살고 싶다. 누군가 내가 아니라도 할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말을 따르는 복종은 더이상 내 임무가 아니다. 나는 그런 의무를 지지 않겠다. 그나저나 점례는 오는가, 안 오는가.

휴의가 초조함으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8층 특실에서는 점례가 자는 유지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 10시에요. 일어나서 커피 한 잔해요. 그리고 국밥 먹으러 무교동으로 가요.'

'좀 더 자고 싶어.'

유지가 몸을 틀면서 이불을 끌어당겼다.

'당신 커피 좋아하잖아요.'

대답이 없자 점례는 '여보, 혼자 가라고요. 이 낯선 땅에 나를 혼자 두고요.'

'당신네 나라잖아.'

'어이없군요.'

유지가 다시 이불을 끌어당기더니 곧 다시 내리고는 '어젯밤에 내가 무리했어, 당신도 아는 일이고.'

점례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런 핑계 말고요. 정말 혼자 갈까요.'

'그래, 난 당신을 울타리에 가둬 놓는 사람 아냐.'

'좋아요. 그러면 삼십 분 더 자요. 딱 그 시간 지나면 군말 없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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