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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든 인파 때문에 두 사람은 충분히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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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든 인파 때문에 두 사람은 충분히 눈에 띄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12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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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을 다 마쳤을 때까지도 유지는 일어나지 못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어 점례는 유지의 얼굴을 살폈다.

자고 있다. 아직 더 밤이 필요한가 보다. 어디서나 잘 자고 잘 먹는 그의 습성이 부러웠다. 아마도 오랜 전선의 경험이 환경을 탓하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난 등대면 잘 수 있어. 심지어 서서도 자.'

'서서도 잔다고요?'

'안 믿겨지지. 걸으면서 잔다면 놀라 자빠지겠네.'

'그래요?'

정말로 놀라 자빠지는 시늉을 점례가 했다.

'당신은 예민을 덜어낼 필요가 있어. 하지만 상황은 그런 예민함도 고칠 수 있지. 절박하면 인간은 거기에 따라가게 돼 있어. 몸은 언제나 정신에 압도당하거든.'

점례는 언젠가 유지가 이런 비슷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해 냈다. 서서도 자고 걸어가면서도 자는 그가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에서 누었는데 그 잠이 얼마나 달고 꿈같을까.

자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으로 점례는 유지가 깰까봐 더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준비는 다 됐다. 가져갈 그림 몇 점과 입을 옷과 가볍게 적을 만한 펜과 종이도 있다. 점례는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조선의 아침은 이제 밝아오고 있었다. 행상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먹고 살 만 할까? 불현듯 점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남들이 자고 있을 때 일어나서 일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쟁터에서도 그러는데 이곳에서 못할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점례는 죽마을 고향을 떠올리자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다가고개를 흔들었다. 소작쟁의로 끌려간 아버지의 얼굴이 흐릿하게 행상의 모습과 겹쳐졌다.

수확하고도 먹지 못하는 쌀을 보고 얼마나 사무쳤던가. 쌀은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했다. 발 빠른 상인들은 지주가 거둬들인 조선쌀을 싸게사서 비싸게 일본에 팔았다.

아버지는 한 때 농사를 포기하고 광산에 다니기도 했다. 근처 성주탄광은 유명했다. 석탄을 캐면 농사짓는 것보다 수입이 좋았다. 얼굴은 물론 옷까지 온통 까맣게 칠해 오지만 돈을 놓고 식구들이 모여앉아 웃음꽃을 피웠다.

아버지는 더 돈이 되는 일본인 소유 금광으로 갔다. 거기서 떨어진 낙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절뚝 거리며 고향땅에 왔을 때 아버지는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

한 동안 꼼짝도 못했으나 타고난 힘으로 아버지는 견뎌냈고 버텼으며 다시 소작일을 할 수 있었다. 죽마을 사정은 나아졌을까. 조선에 오니 고향이 어른 거렸다. 파리에 있을 때는 기억나면 애써 지웠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잘되지 않았다.

어깨에 닿은 유지의 손길을 느껴졌다.

'고향에 오니 기분이 다르지? 여기서 눌러 살고 싶은 생각에 빠졌던 거야?'

점례는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이렇게 변명했다.

'그럴리가요?'

점례가 어깨위로 손을 뻗어 유지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언제 세수를 하고 왔는지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결이 물에 젖어 있었다.

'이 차림으로 그냥 내려가면 되는 건가?'

'뭐 안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다 챙겨 놨거든요. 갈아 입을 시간은 충분해요. 떨리나요?'

'떨리지. 당신도 그러니까 묻는거지?'

'맞아요? 조금요. 하지만 막상 닥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도 떨리지 않아요. 참 이상하죠.'

'그것이 인간의 몸이야. 색다른 것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이라고나 할까.'

기자회견장에는 열 명 정도 기자가 와 있었다. 사진 기자는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질문은 예상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유지는 당당하고 자신감있는 태도였다. 점례는 겸손했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을 설명할 때는 열성적이었다. 자부심이 묻어났다. 사진을 찍을때는 웃었고 그림을 보여줄 때는 진지했다.

질문이 더 없으면 일어나도 되겠느냐고 유지가 물었다. 일부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짐을 챙겼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점례는 만연필을 쥔 손을 들고 있는 삼촌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림이나 글과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해도 되느냐고 점잖게 물었다. 기자들은 그가 인사동의 유명한 화랑을 운영하는 화상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기자가 아닌데도 질문을 하는 것이 어색한지 그는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느냐고 한 번 더 물었다.

'그럼요. 하세요.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가장 유명한 화상이지잖아요?'

유지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하지요. 유지 호사카님은 작전장교로 전선에서 공을 세우신 걸로 알고 있어요. 프랑스는 얼마전에 해방됐고요. 태평양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끝나리라고 보시나요. 그리고 지금 조선에서는 독립에 대한 소규모의 반발이 있어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극소수 인사들이 식민정첵에 반대하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는 지요?'

잠시 술렁였다. 그러나 유지는 그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이 일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그런 분위기는 파리에서 느낄 수 있고 여기와보니 더 그런 확신이 선다고 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점례에게 양보했다. 조선독립은 저보다는... 하고 점례에게 하라는 듯한 눈치를 보였다.

'조선 사람이 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기자 중 한 명이 점례를 보고 말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점례가 입을 뗐다.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점례가 역으로 기자들을 향해 질문을 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점례가 말했다.

'독립을 원하는 사람이 여기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조선과 일본은 하나에요. 그러니 편가르기 하는 식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려습니다. 이만하면 됐죠?'

이것으로 기자회견은 어색하게 마무리 됐다.

저녁에 삼촌 집에 초대받은 유지와 점례는 집이 삼층으로 개축된 것을 보고 놀랐다. 삼층 전체는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는데 삼촌은 여기서 점례의 그림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하겠지?'

'네, 백점도 걸 수 있겠는데요.'

점례가 말했다.

'점례 그림이 개축한 후 첫 전시회 작품이지. 일부러 내가 그러려고 다른 작품은 걸지 않았어.'

'대단한 영광이네요.'

점례가 또 말했다.

'여기가 메인 작품이 걸릴 장소로 어때?'

삼촌이 의견을 묻는다기보다는 이미 정해 놓고 통보하는 식으로 물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들어오면 정면에서 보이고 공간도 크고 넓어서 딱 들어 맞는 장소에요.'

이번에도 점례가 말했다. 유지는 팔짱을 끼고 듣고만 있었다.

'가서 저녁 먹자.'

'그래요. 전 국밥요.'

유지가 발빠르게 대답했다.

'또 국밥이에요?'

점례가 나무랐다.

'국밥이 최고야. 따뜻한 국물에 고기가 있고 익은 무나 김치를 먹으면 식감이 최고야. 건강에도 좋고. 그걸 먹으면 소화가 잘돼. 잠도 잘오고.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잔 것은 어제 무교동에서 국밥을 먹었기 때문이야.'

유지가 입가를 훔치는 시늉을 했다.

'못말려. 당신은.'

점례가 가볍게 눈을 흘기면서 그러면 자신도 국밥을 먹겠다고 거들었다.

'그런데 삼촌, 왜 그런 질문을 했어요? 어울리지 않게. 그냥 해본 건가요? 아니면 조선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한 가요?'

'모르겠어. 겉은 조용한데 안에서는 펄펄 끓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조만간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지난번 총독부 공격 때문에 경을 쳤잖아. 다행히 총독님이나 형님은 무사했으니 망정이니. 언론도 잘 틀어 막아서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조차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그런데 왠일인지 총독이나 총감 등의 신변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감이 와.'

'참, 삼촌도. 감으로 그런 판단을 한다고요. 삼촌, 그림에나 신경쓰지 왠 정치에요.'

유지가 막걸리를 벌꺽 들이키면서 말했다. 입맛을 다시면서 유지는 그렇잖아도 아버지 편지 때문에 고심했어요. 삼촌은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우리는 오직 예술입니다.'

그가 점례를 쳐다보면서 빛바란 노란색 양은 잔을 들어 올렸다. 셋은 간바이 하면서 잔을 부딪쳤다.

'전시회가 모레니 사흘 후에는 총독님을 한 번 방문해야지. 총독부에서 어제 사람이 왔더라. 유지님이 오면 방문 날짜를 알려 달라고. 아마 내일 쯤이면 호텔로 사람이 갈거야. 찾아 뵙는게 도리지. 형님이 미리 연락을 해 놓으셔서 네 조선행을 총독부가 다 알고 있어. 형님이 내무대신으로 승진하시고 다음 수상의 유력 후보로 떠올랐으니 총독도 형님을 깎듯이 모시는 분위기야. 참의원 당시와는 달라.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

'예, 알았어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또 전쟁이니 조선독립이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겠어요? 저는 오로지 예술만 말하고 싶은데.'

'이 사람은 정치에는 손을 대고 싶지 않아해요. 인생은 예술이다. 이런 신조를 갖고 있거든요.'

점례가 유지편에 섰다.

'둘이 짤떡 궁합이군. 그런데 너 결혼은 어떻게 되가니? 동료 의원의 참한 딸 사진을 네게 보냈다고 형님이 지난 번 말씀하시더라. 도쿄대 영문과에 다니는 재원이라고. 나도 그 집안을 안다. 우리 집안 만큼 대단해. 천황의 신임을 받는 것도 그렇고.'

점례는 못 들은척 아니면 대화에 끼고 싶지 않은 듯이 식사에 열중했다.

'아이, 삼촌도. 난 결혼 생각 없어요. 아버지 한테도 말씀드렸고요. 삼촌은 저를 불편하게 해요. 점례에게도요. 아까 기자회견장에서 조선독립 같은 질문을 하다니요. 놀랐다니까요. 다행이 점례가 잘 대답해서 잘 넘어갔지만요.'

'유지야,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현안이 어디 있니? 너도 알다시피 정치가 없으면 예술도 다 끝장이야. 전쟁터에서 무슨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니?'

삼촌이 조금 화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정치인이 있고 군인이 있잖아요. 모든 사람이 정치인이나 군인일수는 없어요. 분업을 하는 거지요. 저는 저대로의 삶이 있고요. 전시회가 끝나면 바로 출국할 겁니다. 잠깐 부모님을 뵙고 바로 파리로 가려고요.'

삼촌은 머뭇거렸다. 이렇게 나오니 대화는 자연히 다른 주제로 옯겨 가는 게 맞다.

'본국에 가면 그 여학생을 만나봐라.'

'또 그애기 예요. 그만해요. 삼촌.'

'점례 때문이냐?'

점례가 화들짝 놀라 입에 있던 밥풀이 몇 개 튀어 나왔다.

'괜찮다, 애야.'

점례가 손으로 삼촌의 얼굴에 묻은 밥풀을 떼어내려고 하자 스스로 얼굴을 빗자루로 쓸듯이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면서 삼촌이 말했다.

'저라면 신경 안쓰셔도 돼요. 저는 언제든 결혼에 찬성입니다. 저도 그 여학생 사진을 봤거든요. 천생 배필로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여보, 당신까지 이러기요.'

유지가 나머지 잔을 건배 제의도 없이 싹 비웠다.

'한 잔 더.'

내민 잔에 점례가 가득 술을 부었다.

'조선 막걸리는 입에 딱 맞아. 걸쭉한 것이 들어갈 때는 목이 시원하거든. 묵은 때도 씻고 맛도 좋고.'

'술이야 조선 술도 좋아. 하지만 사케만 하겠니?'

'아니에요. 사케도 사케지만 조선 술이 좋아요.'

'그렇구나.'

삼촌이 입맛을 다셨다. 다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방이 넉넉해. 일하는 여자는 신경쓰지 말고.'

유지가 점례를 쳐다봤다.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아니요, 삼촌. 우린 호텔에 가서 좀 할 일이 있어요. 오늘 밥값은 제가 낼게요.'

'무슨 소리?'

'아니에요. 이 사람 책 팔아서 돈이 많아요.'

점례가 삼촌의 팔을 잡았다. 내 버려두라는 뜻이었다. 이른 저녁이었다. 시계를 보니 6섯시가 조금 넘었다.

'우리 걸어가 볼까.'

차가 준비됐다는 삼촌의 제의를 유지가 뿌리치고 나오면서 말했다.

'그래요. 당신 팔짱을 끼고 인사동을 걷는 기분이 남다르죠. 파리에 가면 이 순간을 떠올리고 싶어요.'

점례가 팔짱을 켰다. 둘이 종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행인이 줄어든 인파 속에서 두 사람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들을 따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휴의였다. 그는 점례와 단둘이 있을 짧은 시간을 얻기 위해 기자회견 장 근처에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점례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어떻게든 조선에 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총독 일행의 일정을 확보해야 한다.

휴의는 그러나 그런 임무 수행보다는 점례의 팔이 다른 남자의 팔을 끼고 있는 모습에 신경이 더 쏠렸다. 뒷모습 만으로도 충분히 점례를 인식한 휴의는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색을 자신에게도 숨겼다. 이번 일이 끝나면 모든 것과 작별하리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영원히 이별이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번 이렇게 다짐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내가 죽든 살든 이번일이 마지막이다. 점례와도 그렇다. 휴의는 러시아를 염두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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