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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4 11:56 (수)
깨어난 그는 침실을 확인한 후 가벼운 화장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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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난 그는 침실을 확인한 후 가벼운 화장을 시작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11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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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는 뒤척였다. 아무래도 낮에 잔 영향 때문에 쉽게 숙면에 들지 못했다. 유지는 낮은 코를 골았다. 그는 원래 코를 골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간혹 골았다. 오늘의 코골이는 시차의 피로와 막걸리를 먹은 탓이었다.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난 점례는 밖을 볼 수 있는 창가에 앉았다. 커튼을 열었으나 밖은 안과 비슷하게 어둠에 쌓여 있었다.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서너 개 보였을 뿐 인적이 끊긴 경성은 적막 그대로였다.

'도판을 가져온 것이 있으면 보여줄 수 있나요?'

질문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실까 봐 제가 파리에서 가져온 그림 몇 점을 이 자리에서 공개할게요. 점례는 이러면서 책상 아래에 미리 두었던 그림을 꺼내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동작을 했다.

아무래도 조선에서 하는 기자회견은 낯설었다. 그 전에 조선 미술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을 때 해 본 적이 있어도 어색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언제나 어려웠다.

'여자가 무슨 그림을 그려?' 혹은 '여자인 주제에 그리면 얼마나 그리겠어?'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조선에 온 이상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억지로라도 그런 기분을 느끼면서 회견을 해야 한다. 점례는 기왕지사 하는 거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은 다 하겠다는 듯이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겸손함만은 잃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특히 유지와 하는 공동 인터뷰이므로 시선이 자신에게 너무 쏠리지 않도록 유지를 적당한 선에서 내세워야 한다는 마음도 새롭게 가다듬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데는 유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점례 자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도판 소개가 끝나면 공을 자연스럽게 유지에게 돌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나를 해방 시켰다. 마술을 부리는 치료사로 나의 깊은 슬픔을 없에 주었다. 잠깐이 아니라 늘 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동반자 이상으로 그의 추종자다. 그러니 내가 꼭 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유지가 답변하도록 기다리자. 유지는 자신의 전부를 다 드러낼 수는 없어도 적당한 선에서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많이 가졌고 굳이 그것을 감추지 않는 자연스러운 태도는 역시 대일본 제국 내무대신의 아들답다는 찬사를 받을 것이다. 점례는 무대 위에서 선 주인공을 도와주는 조연 같은 역할 이면된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할 말은 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 상태에서 점례는 유지가 잠들어 있는 침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두 사람은 언제부터 만났나요?'

이런 질문도 나올 것이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태평양 전쟁 때부터라고. 만주에서 그림을 팔다 작전 나온 유지가 화풍에 관심을 보였고 그 이후 만남을 이어가다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면 될 것이다.

유지가 부연 설명을 해도 상관없다. 아니면 거기서 매듭이 지어질지 모른다.

'결혼할 생각이 있나요?

이 질문은 유지를 웃음 띈 얼굴로 바라는 보는 것으로 바통을 그에게 넘기자. 아마도 유지는 아버지에게 했던 것과 유사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런 사생활 질문에는 답변하지 않겠어요. 다음부터는 하지 마세요.'

그런 다음에는 좀 미안했던지 기왕 나온 질문이니 답변 하지요.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결혼한 그 어떤 부부보다도 신뢰가 깊고 그것은 서로 동지적 의리로 맺어진 까닭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림에 관한 것, 어려움이나 그곳 파리 분위기나 예술가들의 전후 움직임이나 하는 일상적인 질문이야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겠다. 단편은 전적으로 유지 담당이다.

'유지 선생이 투고 전에 미리 읽은 적이 있느냐?'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오면 그렇다고 할 것이다. 간혹 스토리에 대한 의견도 주고 받는다고 해도 유지가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 말고 글에도 소질이 있다고 들었는데 소설 쓸 생각은 없느냐?'

이런 질문은 현장에서 생각나는데로 해도 된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 나오면 당황할까 봐 점례는 몇 가지 예상 질문을 뽑아 보았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미술대전 출품 문제나 판매에 대한 것은 삼촌에게 미루면 될 것이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예상 같은 질문은 설마 나오지 않겠지? 그러나 모를 일이다. 유지가 내부대신의 아들이고 그가 작전 장교였기 때문에 애초 기자회견과는 엉뚱한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그것은 유지가 답변해도 되고 안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유지는 답변한다.

'당연히 우리가 승리하지요? 그런 기운 여기 계신 기자 여러분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기자들은 할 말이 없어 멍하니 있다가 박수를 치거나 하이 하이를 연발하겠지. 

점례는 이 정도로 정리가 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코 고는 소리가 그쳤다. 자세를 돌린 유지가 깊은 잠에 빠졌나 보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싶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말똥말똥한 정신이 점례를 그 자리에 붙잡아 놓았다.

침대에서 자기는 틀렸다. 여기 소파에서 잠드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될 것이다. 점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등을 편하게 뒤로 기댔다. 그러나 쉬이 올 잠은 아니었다.

눈을 감은 채로 점례는 휴의를 생각했다. 만나고 싶은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마음 상태였다. 그가 다가와서 내가 알고 있는 총독 일행이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하지?

'여보, 이틀 후에 총독과 점심 약속이 종로 한양성에서 있어요. 거기에는 총무경감, 총무, 내무, 사법 등 고위 정치인, 헌병대사령관, 종로서장 등도 참석할 거요.'

이렇게 말하고 난 그 이후에 우연히든 아니든 휴의가 다가와서는 나 휴의요, 쫓기고 있어. 총독 일행이 만나면 장소를 알려 주시오. 급해요. 이렇게 다가온다면?

'내일 정오 한양성에서 점심 하기로 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부디 몸조심하시오. 독립된 조선에서 우리 만납시다.'

휴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해답을 찾은듯이 순간 환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급히 쥐었던 점례의 손을 풀고 급히 왔던 길로 사라진다. 

'아니오, 나는 그런 것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내 앞에 나서지 마시오. 지난번은 그냥 넘어갔으나 이번에는 그대로 둘 수 없어요. 바로 신고하겠어요. 그러니 조선 땅을 떠나시오. 조선독립 같은 되도 않는 일에 목숨걸지 마시오.'

어찌할 것인가. 점례는 그런 상황이 지금 당장 닥쳐온 것이나 되는 듯이 몸을 바짝 웅크리고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다가 멈췄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국밥집에서 동휴는 분명 내가 점례인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에 들어온 이후 그는 줄 곳 나를 미행했다. 아니 유지를 보호했다. 우리를 따라 다니는 이유는 분명했다.

자기 신분에 맞는 행동이었다. 신분을 감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 왜, 그는 나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을까.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점례는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그 바람에 머리칼이 눈을 찔렀다. 고개를 뒤로 젖혀 점례는 흩어진 머리를 바로 세웠다. 그것이 나에게는 잘된 일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가 내 신분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나를 이용해 휴의를 체포하려고 한다. 나는 물론 휴의도 독안에 든 쥐다. 그가 휴의를 잡고 나면 다음 순서는 내가 될 것이다. 그 이전에 유지에게 연락해 내 신분을 알리고 정중하게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 허락을 구할 것이다.

그러나 휴의와 내가 무슨 내통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단지 고향이 같기 때문이고 휴의가 신문을 보고 나를 찾아온 것뿐인데 그것이 죄가 될 리는 없다. 유지는 내 과거를 동휴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점례는 심란했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관계가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용희가 보고 싶다. 그는 나보다 더 똑부라 졌다. 그녀가 곁에 있다면 상의라고 하고 싶다. 그나저나 용희는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그리운 옛동무, 그도 가끔은 너를 생각하는 나처럼 나를 생각하겠지. 위로받고 싶다. 살갑게 대하며 웃어 주기만 해도 좋으련만.

멀리서 붉은 기운이 밝아져 왔다. 조선의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점례는 순간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오랜 잠에 빠진 것처럼 개운했다. 불과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실을 확인한 후 가벼운 화장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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