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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0 06:03 (토)
잠이 안 오면 스케치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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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오면 스케치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요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08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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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짐을 풀고 유지는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삼촌은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다짜고짜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았다고 화를 냈으나 이내 진정하고 점례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어떻게 하다니요?'

'어, 아니 편지 내용을 말했느냐고?'

당황스러운 목소리였다.

'말 안 했어요.'

'잘했다. 다 내게 생각이 있다. 지금 조선은 겉으로는 잘 통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용광로처럼 끓고 있다. 당장 제압하지 않으면 화를 면키 어렵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하자. 내가 저녁에 그리고 가마. 만날 사람도 있으니.'

수건을 걸치고 점례가 나오다 막 전화기를 내려놓는 유지를 보았다. 머리를 털고 있는 점례에게 유지는 삼촌이라며 저녁에 온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곳으로 온다는 구료.'

'우리가 거기로 갈 걸 그랬어요. 미안하잖아요.'

'아니야, 삼촌이 여기서 볼 일이 있대.'

'잘됐네요. 같이 보는 거죠?' 

'물론이지. 아마 삼촌은 나보다 당신이 더 보고 싶을거야.'

'글쎄요. 그림이 더 우선이겠지요. 삼촌은 예술에 강한 애착이 있어요. 제 그림에 어떤 평가를 내일지 궁금해요.'

'그리고 오늘 신문을 봤는데 내일 아침 기자회견을 한다는 내용이 있어. 당신이 신문사에 연락했을 리는 없는데, 아마 이것도 삼촌이 일정은 잡은 모양이야.'

'우리가 딱히 할 일이 없어. 다 알아서 하시니.'

유지가 걸터 앉은 침대에서 등을 뒤로 뉘며 푸념했다. 그러게요.

'그나저나 기자회견을 하면 기자들이 어떤 질문을 할까요?'

'뻔하지 뭐.'

'그래도 준비는 해야지요?'

'준비랄 게 뭐 있겠어. 당신 그림과 내 글에 대한 것이겠지?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알아서 잘들 쓸거야.'

'피곤하면 눈 좀 붙이세요.'

'근데 말이야, 여기 호텔은 프랑스 호텔만큼이나 깔끔하고 좋아. 방에 욕실도 딸려 있고. 전화기도 있고. 엘리베이터도 조용하네. 무엇하나 부족한게 없어.'

'일본 작품이지요. 조선은 일본 때문에 많이 문명화되고 있어요.'

'그렇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지가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

'당연한 걸 뭘 물어요. 이런 호텔은 아직도 조선이었다면 언감생심이지요. 아, 이건 사자성어예요. 일본 아니면 감히 바랄 수 없다는 뜻이죠.'

'그래, 일본이 조선에 참 좋은 일 많이 하고 있지.'

유지가 다시 들어 누었다.

'여기 이방이 어떤 방인지 알아?'

뜬끔없는 질문이었다.

'글쎄요. 어떤 방이라니요?' 

'이곳이 히로히토 황태자가 묵은 방이야. 예약할 때 돈을 더 주고 이방을 고집했어. 그러니 더 의미가 있지.'

점례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황궁을 향해 참배를 드려야 할까 봐요. 감동했어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 말고.'

그러더니 유지는 참배는 하지 않고 이내 가는 코를 골았다. 여행의 시차와 피로 때문이었다. 노곤한 몸에 점례도 한 잠 잤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창가 쪽으로 갔다.

아래쪽으로 기와를 얹은 삼층 건물의 환구단이 보였다. 날개를 편 지붕선이 고왔다. 사각형의 건물도 보기 좋지만 기와가 가져다 주는 편한 시선도 마음에 들었다.

덕수궁 건물도 보였고 그 아래 넓은 길에는 전차가 지나갔다. 자동차도 있고 인력거도 있고 보행하는 사람도 있고 경성은 활기차 보였다.

그러나 점례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만약 휴의가 상하이에서 조선 땅으로 잠입했다면 신문에 연거푸 난 자신의 귀국 소식과 기자회견 소식을 모를리 없다.

묵고 있는 호텔까지 신문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곳 직원들이 아는 기자에게 알린 모양이었다. 아니면 들락날락하다 우연히 한 기자가 알아냈는지도 모른다.

조선호텔은 조선 대표 호텔로 외국의 유명인사들이 오면 묵는 호텔이었다. 사신이든 부자든 세력가들에게 조선호텔은 신분에 맞는 위상을 지켜 주는 적당한 장소였다. 

저 아래에 휴의가 있을까. 어쩌면 호텔외곽이나 아니면 일층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다. 점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번 그와 짧은 만남에서 가졌던 입맞춤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점례는 휴의의 따뜻한 가슴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혀지리라 생각했으나 질긴 인연처럼 그녀는 그 장면을 한시도 지울 수 없었다.

지우려고 하면 되레 더 살아나서 가슴을 압박해 오는 것이었다. 마음은 문을 열고 일 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는 아닌 척하면서 주변을 흘끔 살펴본다.

특히 홀로 있는 남자라면 더 시선을 끌 것이다. 달려간다. 저기 휴의가 있다.

'피해요, 어서. 경찰이 당신을 추격하고 있어요. 여기는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어서요. 달려요. 죽마을 백사장을 달릴 때처럼 전속력으로 질주해요. 놈들이 따라와요. 고개를 숙여요. 어서요. 권총을 재고 있어요.'

점례는 당황해 어쩔 수 몰랐다. 숨이 막혔다. 그녀는 창밖에서 시선을 뗐다. 눈을 감았다. 이 상태라면 진정할 수가 없다. 그녀는 챙겨온 수면제를 꺼내 단박에 물과 함께 마셨다.

파리에서 간혹 먹던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창밖을 내다봤으나 다 부질없다며 유지 옆에 누었다. 그리고 곧 잠에 빠져 들었다.

전화기 소리였다. 분명하다. 아까부터 여러번 울리고 있다. 노크 소리다. 그것도 여러 번 두드린다. 일어나야 한다. 머릿속은 그렇게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잘 안된다.

그래도 억지로 눈을 뜬다. 유지는 없다. 어디로 갔나. 그대로 있으면 다시 잠이 들것이다.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달리다시피 창으로 가 문을 열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대 여섯 시간을 잤다.

'당신, 어디있어요?'

정신을 차린 점례가 유지를 찾았다. 방문을 열었다. 화장실에도 없다. 어디로 갔지? 점례는 세수를 했다. 냉수를 들이켰다. 그리고 인사동 화실로 전화를 걸었다.

삼촌 대신 점원인듯한 여자가 받았다. 아니 삼촌의 여자인지도 몰랐다. 누구냐고 낯선 목소리로 묻던 여자는 점례라는 말에 그만 목소리가 바뀌더니 삼촌은 조카가 묵고 있는 조선호텔에 갔다고 말했다.

'아마 서너 시간 정도 된 것같아요.'

점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깐 단장을 했다. 파리에서 가져온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그리고 서둘러 일 층으로 내려왔다. 휴의를 생각하며 상상해 보았던 그런 로비와는 달랐다.

훨씬 더 고급지고 세련됐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 유지의 등이 보였다. 맞은편에 시가를 물고 있는 사람은 삼촌이었다. 점례는 그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삼촌 하고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말했다.

손을 들고 삼촌이 환하게 웃었다.

'점례야, 깬 거야. 보기 좋구나. 모자를 쓰니 더 예뻐 보여.'

'아, 이거요.'

점례가 모자에 한 손을 대고는 삼촌 조카님이 사 주신 거라고 말했다.

'그래 유지는 어릴적부터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좋아했지. 선물 받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나.'

점례가 앉을 수 있도록 유지가 몸을 안쪽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삼촌에게 보라는 듯이 신발을 조금 들어 올렸다.

'이건 점례가 사준 거예요. 삼촌.'

'좋구나. 그런데 내 건 없니?'

점례가 핸드백을 뒤적였다.

'왜 없겠어요? 삼촌과 잘 어울릴 거예요.'

은색 파이프였다.

'언제 산 거야 당신. 나도 모르게.'

유지가 놀란 듯이 물었다. 조선행을 결정하고 나서 그림을 사러 벌집에 들렀다 올 때 백화점에서 산 거예요. 좀 비싸요. 삼촌에게는 고급이 어울려요. 당신에게 이야기 한다는 게 깜박 했네요.'

삼촌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입에 물었던 시가를 내려 놓았다. 은빛 파이프를 입에 물고 그는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도 좋지만 네 그림이면 충분하다. 오늘 커피값은 내가 내마.'

삼촌이 환하게 웃었다. 유지가 점례를 보았다.

'이제 좀 눈이 떠진 것 같군. 아까는 반쯤 잠겨 있었어. 잠은 다 잔거지. 저녁이 걱정이군.'

'걱정말아요. 잠이 안 오면 스케치나 하고 있지요. 그나저나 당신 말도 없이 나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일어나고 보니 밖은 어두운데 당신이 없어진 거예요. 순간 무언가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잠깐 생각해 보니 삼촌이 온다는 말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내려왔고요. 제 꼴이 말이 아니지요?'

'아니다, 그만하면 충분해. 너무 좋아.'

'삼촌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내일 기자회견 하는 거 알지?'

'네 들었어요. 아마 대대적으로 나올 거야. 사회면 한 페이지를 차지할지도 몰라. 이제 점례는 조선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된 거야.'

점례가 쑥스러운 듯 손사레를 쳤다.

'그럴 자격이 있어요.'

유지가 거들었다.

'당신도 참.'

점례가 점잖을 빼자 삼촌은 그럴 것 없다면서 내일 기자회견에는 좀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진용으로 마음에 드는 그림 서너 장만 가져오라고 했다.

'네것 두 점과 샤갈이나 유명 서양화가 작품 하나가 필요하다'고 삼촌은 말했다. 점례는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해야지.'

'네, 배가 고파요. 한숨 달게 잤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네요.'

'여보, 무교동으로 곰탕먹으러가요.'

'당연히 그래야지. 파리에서 부터 먹고 싶었어. 입에서 침이 도는데 삼촌 때문에 꾹 참았어. 삼촌도 같이 가시죠.'

'아니야, 난 여기서 또 만날 사람이 있어. 화랑가 사람인데 그림을 사줄 사람이야. 유지야, 삼촌이 크게 한몫 잡게 해줄게. 조선 최고의 부자가 바로 내 눈앞에 있다.'

'최고는 싫어요. 둘째라면 몰라도요.'

점례가 말하자 두 사람은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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