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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8:51 (금)
작은 거울 하나를 미리 챙겨 그녀는 가방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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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울 하나를 미리 챙겨 그녀는 가방에 넣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06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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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이라고 했지만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어수선한 시국이 문제였다. 비행기 편은 더더욱 어려웠다. 이번에도 영사관이 나섰다.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겨우 나온 제일 빠른 날짜가 보름 뒤였다.

'잘됐어. 서두르다가 빠트리는 게 있거든.'

유지가 말했다. 언제나 그는 결론이 나면 그것을 자기것으로 해석했다. 부정해 봐야 달리 이득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점례의 마음에도 들었다. 

'그래요.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에 실 꿰어 쓸 수 없어요.'

유지는 질문 대신 그냥 웃었다. 역시 대단한 여자야. 어떤 상황이든 문장을 끌어다 쓰는 능력이 탁월했다. 아무리 바빠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겠지.

점례도 웃음을 뜻을 알아듣고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때로는 그것이 중요했다. 물어 보지 않는 것이 자꾸 말하면 아는 체 하는 지각없는 사람으로 보일지 모를 일이다.

상황이 정리되자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 동료나 지인들에게 조선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동안 고마웠어. 보름 후에 난 조선으로 돌아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조선이라는 말에 유지의 동료들은 잘 알지 못해 너 일본사람 아니냐고 물었다.

'그래, 조선도 우리나라야. 일본과 조선은 내선일체거든. 35년째 같이 생활하고 있어. 그러니 이제는 한나라라고 해도 무방해.'

'식민지로군.'

'말하자면 그렇지.'

'전쟁 후에도 그렇게 될까?'

'그야 모르지. 상대가 원하면 그렇게 해야겠지. 아직 조선은 스스로 무슨 일을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일본이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야 해.'

'맞어. 때로는 그것이 필요해. 우리 같은 나라야 독일의 식민지든 우리가 독일을 식민지로 삼든 문제가 되지만 조선처럼 일본을 기꺼이 받아 들인다면 문명을 전파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거든.'

이런 말들을 주고 받으면서 유지는 작가 모임 회원들에게 일일히 악수를 나눴다. 한 잔 술을 하자고, 말하자면 이별주를 권하면 짐을 싸야 한다면서 자리를 떴다.

술이야 어디서든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조선 막걸리가 술 중에는 최고다. 숭늉처럼 구수하면서도 뒷맛이 깨끗한 조선 막걸리를 생각하면서 유지는 입맛을 다셨다. 

점례는 가까운 지인에게만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만나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나중에 알더라도 서운하지 않도록 미리 방책을 세웠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유지처럼 발이 넓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는 많은 사람을 상대하기 보다는 소수의 사람과 어울렸다. 그것이 자신의 성격과도 맞았고 그림을 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그녀는 사람보다는 집과 세간살이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챙기는데 더 열중했다. 짐은 가지고 갈 수 없으니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녀는 눈에 넣어가겠다는 듯이 붉은 기와의 이층 집을 고개가 아플 정도로 올려다 봤다. 두고 떠나는 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렸다.

죽마을 초가집과는 차원이 다른 아픔이었다. 그때는 어서 돈 벌어 오겠다는 일념에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이 집을 살아생전에 다시 볼 수 있을까. 거실이며 부엌이며 쇼파며 유지와 자신의 체취가 남은 방들을 둘러 보는 점례의 마음은 착잡했다. 여기서는 어디서든 마음이 가벼웠다.

이방인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손가락질 하지 않았고 눈흘기며 쳐다 보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예술혼만이 그들이 추앙하는 가치였다.

가져갈 것은 많지 않았다. 작은 손거울 하나만 일단 생각나는 대로 들고 갈 손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그림이 있는 작은 방으로 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화단 때문이었다.

청소하지 못한 화단에 플라타너스 잎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여기에 눈이 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눈은 아직 내릴 기미가 없었다. 날은 12월인데 늦가을 날씨가 이어졌다.

여름 꽃이 지지 않고 몽우리를 터트리는 것도 있었다. 검고 큰 나비가 날아 다녔다. 저들만 본다면 봄과 다를바 없는 날씨였다. 그녀는 봄에 심기로 한 찔레꽃 위치를 확인하고 그 넝쿨이 담을 타고 넘어가는 장면을 그려봤다.

지금이라도 심어볼까, 하다가 점례는 그만 두었다. 싹이 나왔다 하더라도 자라지는 못할 것이다. 초록의 줄기가 얼어서 회색이 되고 그것이 부서지는 꼴은 보지 않는 게 낫다.

가고 싶지 않다. 조선에 가고 싶지 않다. 여기에 익숙해 지고 있는데. 점례는 날짜가 다가오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준비는 다 해놨다. 벌집에 가서 유명인, 비 유명인, 막 떠오르는 신예와 초보들의 그림을 가져갈 있을 만큼 구입했다.

자신것과 합치면 백여점 가까이 됐다. 종이로 둘둘 말아도 제법 짐이라고 할 만했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꼭 필요한 짐만 챙기자 삼일 후에는 할 일이 없어졌다.

영사관 사람들이 짐 꾸리는 것을 도와주러 왔다가 차만 먹고 갔다. 마침 집에 돌아온 유지는 그 사람들을 보고 적어도 한 달 후면 돌아온다고 집을 처분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

'이 집은 우리가 살 집이요. 그러니 우리가 떠난 후에도 다른 사람 들이지 마시오.'

부영사관에게 유지는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그가 하이 하이를 외치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유지만 본다면 그가 굽신거린다고 표현할 만큼 과도하게 친절을 베출 이유는 없었다.

다 아버지 후광 때문이다. 내무대신은 아들이 조선에 다녀 간다는 말을 듣고 즉시 영사관을 연결해 비행기 표 등 일체의 편의를 부탁했다.

'에펠탑도 못 올랐어요. 다행인 것은 성당에는 들른 거지요.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라가서 맥주한 잔 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당신은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미술관 빼고요.'

'나는 카페지. 노랑카페. 거기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 예술이 뭔지도 예술가의 자세가 뭔지도. 그리고 영감도 얻고. 그 사람들과 떨어지는 것이 싫어.'

유지는 조선행을 반가워 하지 않고 있다. 처음에 서두르더니 이제는 작별이 아쉬운 모양이다. 굳이 그가 조선행을 택할 이유는 없었다. 조선에 가서 딱히 할 일도 없다. 그런 모양새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말대로 한 달 쯤 후에는 다시 이곳에 있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이군요. 기대 이상이라고 표해도 되겠죠. 그곳에 데려 간다고 하고 아직 못갔어요. 다음에 오면 꼭 가요.'

'어, 당연.'

유지가 미안한 듯 바로 말했다.

'여기 경험은 돈주고 살 수 없는 겁니다. 조선에 가면 더 자신감 있게 터치하겠지요. 그리고 언제 일지는 모르지만 파리 살롱전에서 대상을 차지해야지요.'

'당신을 믿어. 그 자신감은 근거가 있거든.'

'나도 당신을 믿어요. 노벨상을 품어야지요.'

'그 정도는 아닐거야.'

'아니에요. 당신말고 그 상을 탈 사람은 없어요.'

유지가 껄껄 웃었다.

'심사위원이 당신같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점례도 따라 웃었다. 그들은 그렇게 파리와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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