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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내밀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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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내밀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0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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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할 때면 점례는 그림을 그렸다. 마구 그렸다. 그러다보면 천근 같던 몸이 봄 강물의 얼음처럼 서서히 풀렸다. 그런 날은 시간도 빨리 갔다.

스케치는 쉽게 완성됐다. 샤갈이 보면 자신의 그림을 패러디했다고 화를 낼지 칭찬을 할지 모르겠다. 새 신을 신고 뛰는 듯 나는 유지와 새 모자를 쓰고 그 옆에서 천사처럼 날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왠지 그의 화풍을 담았다.

그러려고 그런 것이 아닌데 그렇게 됐다. 기왕지사 그렇게 된 마당에 가난한 화가들이 사는 벌집 화실에 들러 잠깐 봤던 그의 또 다른 그림을 본떠 보고 싶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이다. 점례는 사람을 그릴 때면 대개 두 명을 넣었는데 자신과 유지였다. 점례는 한복을 입고 있다. 정확히는 조선에 사는 평범한 아녀자의 흰옷이었다.

짚신을 신은 그녀는 치마 사이로 한쪽 종아리만 드러냈다. 허리는 끈으로 강하게 조였고 그래서 숨이 막히는지 표정은 억지로 참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챙이 큰 모자를 썼음에도 뒤로 젖혔으므로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점례는 자신의 얼굴 가운데 이마를 가장 먼저 쳤다. 눈이 나 코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이미가 넓고 두드러졌으며 거기에 하얀빛이 났다.

거울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이마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도 얼굴의 중심은 눈이 아닌 이마다. 손에는 깃발을 하나 들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허전해서 그려 넣은 것인데 어느 순간 태극기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네 괘를 얼른 지웠다. 그리고 원의 곡선을 없애고 붉게 칠했다.

일장기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경한 짓을 했다. 호사카가 오해할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점례의 다른 한 손은 한쪽 눈을 가리고 있다.

다른 쪽 눈은 가린 눈을 합쳐 놓은 듯이 크고 또렷했다. 손 사이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왔다.

이층에는 목마를 탄 호사카가 웃고 있다. 점례는 힘들다는 기색이 없다. 목은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듯이 구부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다.

유지의 발이 허리께에 걸쳐 있다. 새 신이 아닌 군홧발이다. 한쪽 군화는 풀어 헤쳐져 있다. 벗으려고 하는 행동인지 신으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는 군복을 입고 있다. 자랑스러운 대일본 제국의 최고위 장교 제복이다.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다.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거물 장교의 모습이다. 얼굴은 상기됐다.

어디서 봤더라. 지휘하는 프랑스 여전사의 그림이다. 여기저기 마구 짬뽕이군. 그녀는 실없이 웃었다. 대충 그림이 완성됐다. 색칠을 하자. 스케치 후 바로 그런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다. 호사카 유지가 돌아오기 전까지 완성하자. 선물이다. 그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을 주기 위한 나의 작은 배려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점례의 손길은 바빠졌다.

처음에는 거칠게, 덧칠할 때는 종이를 뚫고 지나갈 정도로 눈에 힘을 주면서 세밀하게 칠해 나갔다. 어둡다. 비가 오려나. 허리를 펴고 점례는 시간을 보았다.

벌써 이렇게 됐나. 저녁이다. 그래서 어두워졌다. 서너 시간을 점례는 한시도 쉬지 그림에 매달렸다. 완성됐다. 전체적으로는 환하다. 색칠의 마술사를 본뜬 것처럼 화려하고 날렵하다. 이것을 그에게 주자. 퇴근하는 그에게 안겨 주자.

그가 어떤 식으로 대답할지 미리 상상하지 말자. 점례는 기다렸다. 식사도 하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꼼짝 않고 그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린다. 유지다. 내 사랑, 그가 왔다. 점례가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여보, 당신에게 줄게 있어요. 어서요. 빨리 들어와요.'

그러나 유지는 서두르지 않았다. 일부러 애간장을 태우려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점례가 문을 열고 그가 신발을 벗고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어두워, 불을 켜야지.'

'아니, 잠시만요. 등을 뒤로 돌리고 있어요. 아니면 두 손으로 눈을 감던지요.'

'무슨 일인데 그래. 나 놀라는 것 싫어.'

유지가 세살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며 등을 돌렸다.

주변이 환하게 밝아왔다. 점례가 말했다.

'이제 돌아서 봐요.'

똑바로 선 그에게 점례는 들고 있던 그림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 선물이에요. 그 말도 하지 않았다. 유지는 잠자코 그림을 보았다. 칭찬 세례를 기대했으나 아니었다.

'여보, 너무 정치적이야. 일장기에 군복에 권총이라니.'

그가 책망하는 듯이 말했다.

'전쟁은 끝났거나 끝나고 있어.난 군복을 벗은지 오래야. 그리고 여긴 파리고.'

'맞아요, 너무나도 정치적이죠.'

점례는 풀이 죽었다.

'이런 그림 하나쯤은 남겨 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군복 입은 모습, 그리고 나의 모습.'

'그런데 당신은 옷이 왜 그렇지. 세련된 차림 많잖아. 조선식의 흰옷은 좀 촌스러워.'

'맞아요. 그렇지만 그게 나인걸요.'

'아냐, 당신은 조선의 점례가 아니라 점례 마사코야.'

유지가 조금 화를 냈다. 앞으로 가지 않고 간혹 뒤돌아 가는 점례에 대해 유지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다 잊었는데 새삼스럽게 과거를 꺼내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이 좋은가? 그럴 리가. 그때 점례는 자결을 시도했다. 그런데 왜? 이런 그림을. 그녀가 과거를 제압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과거를 다스려야지, 상기시키면 안돼. 유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점례가 풀이 죽자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유지는 주제만 빼고는 근사하다고 뒤늦은 칭찬을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난 뒤였다. 점례의 기분은 다시 착잡했다. 유지가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지?'

유지가 식탁에 앉으면서 편지를 들었다.

'인사동 삼촌에게 왔어요.'

'그렇군. 맞아 삼촌이야.'

주소를 읽어 내려가던 유지가 말하면서 편지를 뜯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읽어 내려갔다.

'여보, 조선에 가봐야겠어. 삼촌이 찾아. 당신이 보고 싶은가봐.'

'당신도 참'

'그런 게 아니고 그림을 좀 가져오래. 지난번 당신 그림이 조선에서 최고가에 팔렸대. 그리고 전시회에 출품하라는데.'

'조선은 멀어요. 몽마르트르를 가는 게 아니잖아요.'

점례가 입을 내밀었다. 그가 편지를 내밀었다.

'읽어봐. 거짓말 아니거든. 그리고 판단해.'

점례는 편지를 읽었다. 유지가 말한 그대로였다. 그림을 가져오라는 것과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라는 것 두 가지가 요지였다.

'그런 거라면 짐으로 부칠 수 있잖아요.'

'삼촌은 그렇게 안 해. 삼촌 스타일 알잖아. 작품이 손상될까 봐 그렇지. 더구나 지금 이 시기에 짐은 서너 달 걸릴 수도 있고. 분실 위험도 크고. 그리고 당신도 그렇지. 생명과 같은 당신 그림을 마구 실어 보낼 수 있어.'

유지가 이런저런 이유를 댔다. 가게 하려는 의도였다.

'삼촌은 당신 그림 말고 파리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그림을 사오라는 거야.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이름난 사람들 그림을 살 수 있을 만큼 사라는 거지.'

점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리 결정하고 밀어 붙이고 있다. 유지는 적극엉은 어디서 나오는가. 점례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유지는 틈을 주지 않았다.

'아는 화가들 많잖아. 배고픈 화가들 그림을 사주면 서로 좋은 거 아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요.'

기분 전환을 위해 점례가 거들었다.

'그래 어쨌든 좋은 거잖아. 서로에게.'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해요. 내일 해도 되고요.'

점례는 뭐가 뭔지 몰랐다. 유지가 자신을 떼어 내려고 그러는가. 등떠미는 이유가 뭐지? 그것은 아니다. 한 번도 유지는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불쾌한 시선을 보낸 적이 없다.

전적으로 삼촌의 말을 듣기 위해서인가.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삼촌 이상으로 유지는 삼촌에게 영향을 받은 게 없다. 파리에 와서도 삼촌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을 보면 그다지 정이 깊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인가. 나 때문이가. 그런데 내가 그림을 가지고 가면 삼촌은 팔아서 이득을 본다. 나에게는 어떤 이득인가, 그리고 유지에게는? 점례는 조선행의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행이라는 말은 잠결 내내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조선에 간다. 내 땅이다. 혹시 부모님 소식을 들을지도 모른다.

휴의는 살아 있을까. 상해에서 돌아와 조선 땅에 있을까. 동휴는? 심란한 밤이 지나가고 새벽에 들어서야 점례는 약간 눈을 붙였다. 아침이 환하게 밝았다.

유지가 먼저 일어났다. 그런 일이 없었다. 그가 조용히 이불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편지를 다시 읽었다.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그림 때문은 아니다. 뭐지? 그런데 이 편지에도 추신이 붙었다.

'유지야, 편지를 들고 해에 비춰보렴. 사쿠라 꽃이 바람에 날리는구나.'

유지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창을 열고 편지를 비춰보았다. 흐릿하지만 정말로 사쿠라 꽃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그 옆으로 이런 작은 글씨가 보였다.

점례를 급히 보내라. 이유는 묻지 마라. 조선에 긴히 쓰일 때가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을 체포할 거다. 몸값이 최고로 높은 자를 잡아야 한다. 점례가 필요하다.'

유지를 얼른 손을 내렸다. 정보 장교의 촉감으로 그는 온몸의 세포를 동원했다. 점례를 이용하는구나. 휴의라는 자를 체포하려고. 그렇다면 휴의와 둘은 아는 사이다.

단순히 그런 관계를 뛰어넘는다. 미끼로 사용할 정도라면 그 정도는 돼야 한다. 유지는 편지를 서랍에 집어넣었다. 단순한 추측을 넘어 이것은 확신에 가깝다.

유지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이유는 묻지 말라면서 이유를 다 밝힌 편지 내용에 대해 그리고 삼촌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오랜만에 하는 심각한 결정을 내야 한다.

'조선에 가봐야 해, 그러기로 결정한 거지?'

유지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점례에게 말했다.

'일어나자 마자 그 얘기에요?'

'삼촌이 서두르라고 했잖아. 가는데 하루 이틀 걸리는 것도 아니고.'

점례는 망설였다. 선뜻 그러겠다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가기 싫다면 내가 같이 갈게. 혼자 가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지? 내가 딴짓 할까봐?'

'그런 거 아니라는 것 알잖아요.'

'그럼 됐어. 다 끝난 거다.'

유지가 자신이 동행하겠다고 팔을 걷었다. 점례는 또 놀랐다.

'다음 달까지 원고를 마감한다면서요. 갔다 왔다 적어도 두어 달은 깨질 텐데요.'

'걱정마, 갔다 와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올지 누가 알겠어? 그리고 마감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머리를 식힐 겸 나도 조선에 가봐야겠어. 그리고 당신 부모님 말이야. 이번에 한 번 만나보지. 살아 계시다면 말이야.'

점례는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죽마을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봉숭아를 찾고 찔레꽃을 불렀더니 정말 고향에 가는가. 안 된다. 고향에 갈 수는 없다. 동휴가 다 알고 있다. 순사들이 집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체포할지 모른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어요. 지난번 말하지 않았던가요? 남동생 하나는 집을 떠난 지 오래됐고요. 고향에는 피붙이가 없어요. 그러니 조선에 가도 한양에만 머물까 봐요.'

점례는 유지가 함께 간다는 말에 그만 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 점례는 홀가분 했다.

'내일 출발하자.'

유지가 가볍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내일요?'

'그래 단숨에 쉿물을 빼자고.'

'그게 아니고요. 쇠뿔도 단숨에 빼자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 가려고 마음먹었으면 주저하지 말고 당장 가야지.'

유지가 웃었고 점례가 따라 웃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복종한 점례는 결론이 나자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유지는 그런 점례를 보면서 예술가 이상으로 서로는 묶여 있다고 여겼다. 서로는 서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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