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4-24 23:04 (수)
고향땅에 심었던 봉숭아꽃이 자꾸만 떠올랐다
상태바
고향땅에 심었던 봉숭아꽃이 자꾸만 떠올랐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04 1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큰길로 나왔다. 군용트럭들이 여전히 많았다. 꽁무니에 시커먼 매연을 뿜으면서 굉장한 소음을 울렸다. 마치 폭발음과도 같은 소리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쉬지 않고 울려댔다.

정리할 게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서진 것은 고치고 새로운 것이 자꾸 생겨났다. 유지는 그 길로 잠깐 사람을 만나겠다며 길을 건넜다.

그러기 전에 앞 건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가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신다고 했다. 기분 전환에 더없이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유지는 정말로 즐거운 표정이었다.

'왜, 잘 안 나올 때가 있잖아. 나만 그런 게 아닌가 봐. 유명인들도 거기 와서 막 수다를 떨어.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르면 그대로 나가버려.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마구 써 갈기지. 혼자 우두커니 한 시간 째 앉아 있는 사람도 있어. 무슨 무언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코미디를 연주하는 기분이 들기도 해. 그런 사람을 관찰하면 인물을 묘사할 때 도움이 돼.'

'그래요, 그 심정 알 것 같아요. 당신도 누군가에게 관찰의 대상이 되겠네요. 가능하면 주인공이 됐으면 해요. 복수극을 펼치는 그런 강인한 사람 말고 용서해 주는 마음 좋은 주인공요.'

'그런 식이면 안 팔려. 복수는 잔인할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아마도 지금쯤 누군가는 독일에 엄청난 복수를 하는 소설을 쓰고 있을 거야. 또 누군가는 지하로 잠적한 비시 정부 요인들을 찾아내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스토리를 구상할 거야. 어떤 것이 세상에 발표될지 벌써부터 긴장돼. 전쟁은 때로는 인간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겨 주거든.'

'소설은 정말 끝이 없어요. 인간의 상상력에 늘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요. 엄청난 작품을 기대해요. 당신은 꼭 해낼 거예요. 일찍 올 거죠?'

'그래야 하겠지. 거긴 오래 있을 곳이 못 돼. 숨이 막혀. 담배 연기 때문에 질식하거든. 적당한 순간에 빠져나와야지. 오래 있으면 싸움에 휘말려. 서로 노려보면서 상대를 고르는 패들이 항상 있어. 그 대상이 되면 슬그머니 빠지는 거지. 그리고는 상쾌한 기분을 안고 집에 와서 기억할 만한 것을 빠르게 써야 해.'

'저기 한 번 가면 일주일은 밖에 안 나가도 쓸 거리가 넘칠 때도 있겠네요?' 

'그럼, 그렇지.'

'그래요, 오늘은 한 달 치를 받아오세요. 당신을 꼭 잡아 두고 곁에서 두고 보게요.'

유지가 웃었다.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숱이 많은 머리칼을 뒤로 날리며 빠르게 걷는 유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점례는 그가 무사히 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 지켜봤다.

영화라면 남자는 건너기 전이나 건넌 다음 뒤를 보고 손을 흔들고 그러면 이쪽에서도 마주 흔든 다음 각자 길을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유지는 그러지 않았다.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안 모양이다. 대신 살롱에 빨리 들어가서 오늘은 누가 와서 무슨 행동을 보일지 보는 것이 급했다. 점례는 간단한 저녁거리를 준비한 다음 집으로 향했다.

나도 글이나 써볼까. 아냐, 하나라도 잘하자. 소설은 내 분야가 아니야. 그에 비하면 그림은 얼마나 단순한가. 상상력이야 소설 못지않지만 단 한 장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소박하다 못해 순진하지 않은가.

점례는 새로운 스케치보다는 이미 한 스케치에 물감을 칠하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 모자가 땅에 떨어지자 아냐, 오늘 일을 하나 더 스케치한 다음에 하자고 색칠을 뒤로 미뤘다.

스케치는 단순했다. 새 신발을 신은 유지와 새 모자를 쓴 자신이 하늘을 향해 날고 있는 모습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걸으면서 하늘을 공란으로 둘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따라 좌우 어느 어느 쪽에서 날고 있는 새나 나비나 그 밖의 어떤 곤충을 배치할지 고민했다.

바닥은 초원이거나 아니면 오래된 보도블록이 빛나는 것으로 할지 이것저것 재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점례는 집에 도착했다.

오후는 그녀 기대대로 정말 늦게 흘렀다. 그것 또한 그녀를 기쁘게 했다. 열쇠를 꽂으면서 그녀는 또 다른 우편물을 발견했다. 일본에서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일단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자 어디서 보낸 것인지 호기심이 이는 마음으로 발신지를 살폈다. 조선에서 온 것이다. 인사동 삼촌의 글씨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편지가 계속 온다. 좋은 조짐인가. 그녀는 햇살이 마당 가득 찬 정원에 잠시 앉았다. 해를 마주 보면서 이 집은 정말 해가 잘 드는구나. 명년 봄에는 봉숭아를 심어야지. 분홍색으로 손톱에 물을 들일 거야.

손톱을 싸맨 것을 보고 유지가 깜짝 놀라겠지.

'다친 거야. 그런 거야 당신?'

'그래요. 음식 하다 조금 다쳤어요.'

'어디 봐, 어디?'

유지가 걱정스럽게 달려들면 그 때 서야 이렇게 말하겠지.

'아니, 아니에요. 손톱에 물들이려고요. 당신이 좋아할 거에요.'

'이것도 조선식인가?'

'아마 그럴걸요.'

점례가 뽐내는 투로 말했다가 금방 말을 바꿔 '이건 일본에서 온 건지 몰라요. 왜, 지난번에 우리 아버님댁에 갔을 때 그곳 아주머니 딸이 손에 봉숭아 물들인 것 봤잖아요.'

점례는 손을 들어 손톱을 살폈다. 새끼손톱에 할지 약지에 할지 아니면 둘 다 할지,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손톱에는 이미 검붉은 칠이 덧입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지? 깜짝 놀란 점례는 얼른 손을 내렸다. 착각이었다. 막사에서 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막사에서 잊기 위해 들였던 봉숭아 물이었다.

그녀는 아플 정도로 세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다. 있던 봉숭아도 다 뽑아버려야지. 점례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기쁨의 순간에 공포가 닥쳤다.

이리 빨리 변하는 감정에 점례는 자신도 놀랐던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자신을 사로 잡았던 공포를 애써 눌렀다. 그리고 기분 전환을 위해 그녀는 찔레꽃을 흥얼거렸다.

그래, 찔레꽃을 심자. 작고 하얀 꽃이 정원에 어울릴 것이다. 아침마다 진한 향기를 주는 찔레꽃이 봉숭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찔레꽃, 찔레꽃 몇 번을 중얼거리자 조선에서 듣던 찔레꽃 노래가 떠올랐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불렀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가사가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달이 뜨는 저녁이면 동창생들 모여앉아 못 잊을 사람아.

정확히는 아니어도 대충은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그다음은 전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거면 어딘가. 이 정도도 성공이다. 조선에 가면 가사를 외워 와야지.

점례는 남쪽 나라 내 고향을 여러 차례 흥얼거렸다. 그래 바로 이거야, 찔레꽃을 심자. 하지만 찔레꽃을 생각할수록 봉숭아가 자꾸 떠올랐다.

손톱으로 땅을 파면서 고향 땅에 심었던 작고 까만 봉숭아 씨가 자꾸 어른거렸다. 나쁜 기억은 왜 이리도 생생하게 살아나는가. 이렇게 좋을 때에 하필 그렇게 나쁜 때를 떠올리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매달린 것이 못 되는 것에 헛심만 쓰고 있다. 유지에게 미안했다. 막사만 생각하면 유지를 쳐다볼 수 없다. 잘못한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죽을 때까지 용서를 빌어도 빠져나올 수 없다.

자신을 스스로 용서했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 골목길의 강아지처럼 예고도 없이 불쑥 뛰어나왔다.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어쩌자고 이러는가. 그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가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그때의 그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미치겠다. 정말로 미칠 것만 같다. 정상이 아니다.

점례는 성급하게 행복을 버렸다. 스스로 고통을 머리 위에 썼다. 점례는 모자를 벗어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그러다가 다시 집어서 머리에 썼다.

왕관이다. 아니다. 가시면류관이다. 점례는 희망했다가 절망했다가 왔다 갔다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거실을 돌아다니면서 다시 찔레꽃을 불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