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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8 20:29 (목)
그동안 나는 좋은 일만 하면서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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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좋은 일만 하면서 기다리겠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30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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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가 입을 다물자 유지가 입을 열었다. 대신 누군가는 그래야 하는 것처럼.

'추가할 만한 말 없어?' 

'추신에 추신을 더하라고요? 사족일 뿐이에요'.

'그래도, 내가 놓친 것을 당신이 찾을지 모르잖아.'

'편지가 무슨 숨은 그림 찾기에요?'

'난 당신 의견을 하나쯤 넣었으면 해.'

'퍼펙트 한데, 그래도 원한다면.'

점례가 입가에 손을 대고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유지는 그런 점례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이리와. 당신과 닿고 싶어.'

점례가 유지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세게 기대도 돼, 나 안 무너져.'

얼굴을 떼고 점례가 살짝 웃었다.

'그래요. 당신은 센 남자에요. 힘보다 의지가 그래요.'

'그런 칭찬은 됐고.'

유지가 겸연쩍은 듯이 한마디 했다. 그러면서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이 진다는 생각을 전선에서는 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랬었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어. 붙으면 이겼으니까. 진주만도 그렇고. 그런데 필리핀 해전부터 상황이 꼬였어. 당연히 이번도 이기리라고 달려들었는데 엄청나게 깨졌거든. 내기했으면 큰 손실을 봤을 거야. 일본이 약해 져서 그런 게 아니고 미국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던 거야. 우리는 그대로인데 상대는 더 커져서 온 거지. 숨은 곳은 귀신같이 찾아내고 후퇴하면 기다렸다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공격했어. 일본이 조준하기 전에 발사하는데 당해낼 개간이 있겠어.'

'전쟁 분석은 더할 게 없고요.'

결혼이나, 이 부문에서 점례는 망설였다. 한 번 더 아버지 뜻을 따르는 게 어떠냐고, 나는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난번 대화에서 앞으로 언급하지 않기로 이미 정리가 된 상태라서 다시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굳이 꺼낸다면 그가 화를 낼 것이고 일부러 자기 자신을 그런 기분으로 몰고 간다고 여길 것이다. 조선 청년에 관한 것도 그렇다. 내가 알든 모르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들과 내가 접촉할 수 있는 파리에 있다면 모를까.

조선은 어떻게 되느냐? 미국이 소련 개입 없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소련이 조선 땅에 들어온 후 종전이 됐을 경우 조선이 어떤 상태가 될지 궁금했다.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거죠?'

점례의 입에서 조선이라는 말이 나오자 유지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선이라, 조선의 운명? 글쎄, 나도 생각못했어. 당신이 참 조선 출신이지.'

유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뒷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괜히 했다는 듯이 서둘러 다음 말을 이었다.

'조선도 아마 해방되겠지. 원래 독립 국가였잖아. 그런데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만한 역량이 있을지 몰라. 우리가 패전하면 당연히 조선 땅에서 일본군이나 일본인이 물러나겠으나 그렇다고 온전히 조선사람이 지배할 수는 없을 거야. 미국이 들어오겠지.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 식민지가 되는 거지. 혹시 몰라. 소련의 식민지가 될지도. 변수는 많아. 소련이 언제 참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분명한 것은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거야. 조선은 우리에게도 중요하지만 미국이나 소련한테도 더 없이 가치 있는 땅이야.'

유지가 이 정도면 이해하겠지 하는 얼굴로 점례의 표정을 살폈다. 혼자 계속말하는 것이 조금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군대는 떠났어도 정세 판단을 빠르지. 그래서 군부에서도 나를 작전참모로 썼던 거야. 그때는 뭐가 그리 좋았던지 오로지 군복만이 나의 전 인생이었어. 목숨 정도는 거기에 비하면 아주 하찮않지. 당신도 알잖아? 그런데 우습지. 지금은 전혀 아니야. 군복은 전생에서도 나와 어울리지 않아. 전혀.'

그가 손을 아래로 내뻗으면서 부정의 뜻을 강하게 표현했다.

'근데 아버지는 아냐. 군인이 아니면서 군인보다 더 전쟁에 빠져 있어. 아버지는 수상까지 노리고 있나 봐. 천황 이나 그 친척들과도 긴밀히 연락하고 있으니 전쟁 전후에 아마 최고 자리에 오를지 몰라. 그러면 난 귀국해야 해. 당분간 아버지 옆에서 잘난 아들 행세를 해야지. 벗었던 군복을 입은 나를 보고 당신은 충분히 수상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일본 국민에게 자랑하고 싶어 할 거야. 그것까지 내가 거부할 수는 없고. 누군가의 권력과 유지를 위해 내가 도구가 되는 것이 싫지만 어쩌겠어. 아버지인데.'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결혼 얘기가 나올 거고?'

점례는 기어이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말은 입 밖으로 떨어져 나왔다. 유지가 말했다. 화를 내거나 단호히 아니라는 말 대신 부드러운 음성으로 난 결혼이 싫어. 날 압박하는 모든 것은 내게서 떨어져야 해. 달달 볶이는 것은 죽음과도 같아. 애도 싫고.

'애도 싫다고?'

점례는 조용히 그 말을 되씹었다.

'내 몸에 당신 아기가 자라고 있어요.'

그 말을 언제쯤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에게 당신은 나는 애가 싫다고 말한다. 점례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얼굴은 들키지 않기 위해 약간 웃음을 지었다.

'왜 그래, 당신 애 좋아하는 거야? 그런 거야? 난 난리통의 군인이었어. 당신도 그렇고. 사람 목숨은 파리목숨보다 가벼워.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그래.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라고. 싫어. 난 단호히 그걸 거부해. 내 신념은 확고하고 의지는 누구도 말리지 못해.'

점례는 그가 이처럼 단호한 것은 군복에 일본도를 차고 작전을 명령할 때에 보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기가 두 눈에 가득 찼다.

누구도 말리지 못해. 그 다음에는 아버지라도 천황이라도 라는 말이 생략됐다고 점례는 생각했다.

'이건 나에 대한 예의야. 우습지? 그게 나야. 전쟁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짐승의 것도 아니고 모기의 것도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아닌 거야. 그래서 난 아버지와도 엄마와도 그 누구와도 친해지기보다는 떨어져 있고 싶어. 살아 있다는 것만 알면 되지 더 뭐가 필요해?'

묻는 말인지 아닌지 점례는 알 수 없었다. 그 부분은 정확히 자신과 일치했다. 죽마을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의 안부가 간혹 궁금했다. 경성역에서 그들은 자신의 바로 옆에 있었고 막사 앞에서는 같이 생활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어도 마찬가지다. 전쟁에서 점례는 그걸 느꼈다. 그래서 유지가 하는 지금 이 말, 부모와도 친해지기보다는 떨어져 있어야 한는 그 말이 자신 속에 들어와 박혔다.

'몸에 불이 붙었어.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바다로 뛰어들지. 비명과 함께. 인간은 죽지만 이런 식은 아냐. 사방에서 나보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라고 해. 그러니 어쩌겠어? 그래야지. 아버지는 나보고 떨어져 있어도 뭐라도 하라고, 마음만이라도 힘을 보태라고 하지만.'

'들어 보세요. 여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을 보는 나는 이렇게 행복해요. 내 행복의 팔 할은 당신이에요. 나머지도 나의 것은 아니죠. 그래요. 내 행복의 전부는 당신에게서 왔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불행의 한 가운데를 빠져나온 것은 순전히 당신의 힘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어요. 불편하면 언제든 당신을 떠날게요. 말로 하든지 아니면 그게 싫으면 눈치를 주세요.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떠날게요. 홀로 서 있어도 당신에 대한 고마움은 늘 함께해요. 그러니 여보, 가는 사람 억지로 잡지 말고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요. 오는 사람 밀어내지 말고요.'

'너무 하는군. 앞서 나가는 진도가 빨라.'

유지가 달래려는 듯 대꾸했다. 그러나 그 말이 불편한 것은 오히려 그가 아니라 점례였다.

'그동안 난 좋은 일만 하면서 기다리고 있지요. 누가 알아요? 행운이 찾아올지?'

'그게 조선식 미신인가?'

'그래요. 아마 그럴 거예요. 엄마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물 한 잔 떠 놓고 늘 빌었어요. 달을 보고 그렇게 했고 마을 앞 큰 나무 아래에서도 그랬어요.'

'뭐, 그게 어때서?'

'우리 일본도 그래. 성경책 놓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우리는 늘 주변의 것에 고마움을 표하지. 심지어 주머니 속에 있는 성냥에도 감사해.'

유지가 성냥을 꺼내면서 의식적으로 크게 웃었다.

'여보, 당신이 낭만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에요?'

'낭만적 혁명주의자들과 함께 있어서 그러나. 아냐, 난 원래부터 낭만주의자야. 커피 한 잔, 한 잔의 술과 담배면 난 충분히 사치스러워. 그걸 지금 하고 있잖아. 그리고 당신도 있고. 더 뭘 바래. 더구나 난 절제해. 적당한 선에서 그만할 수 있어. 그것이 내 장점이지. 술을 먹어도 결코 나를 방어하지 못할 만큼 취하지 않아. 절제하면서도 잘못되는 경우는 없어. 이것은 내 안에 있는 낭만과 함께 내가 최후까지 지켜야 할 신조야.'

'이리 와, 여보. 왜 떨어져 있어. 다시 닿게 이리와.'

유지가 점례의 손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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