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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충돌했던 여러가지 생각들을 묻어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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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충돌했던 여러가지 생각들을 묻어 두기로 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8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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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가 눈을 떴다. 깜박 잠이 들었다. 인기척 때문인지 깨고 나서 인기척을 느꼈는지 기억할 수 없다. 쪽잠이었지만 깊이 잠에 빠졌다.

‘일찍 들어왔네요.’

내려다보고 있는 유지를 향해 점례가 입을 열었다.

‘더 자지, 미안 깨워서.’

‘아니에요, 저절로 눈이 떠졌어요. 그런데 몇 시죠’

‘11시가 막 넘었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어, 그래 싸움이 있었어. 지난번에도 그랬거든. 내가 끼어들 입장도 아니어서 슬그머니 나왔지.’

점례가 눈을 비볐다.

‘자기들끼리 하는 정치토론이야. 비씨 정부 인사들을 전부 사형시켜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많았어. 당신도 알잖아. 이런 험악한 시대에는 강경파들의 힘이 세잖아. 그것이 또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소수의 사람은 너도 그 상황이었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걸 하고 비아냥대지만 호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애국심을 시험해 봤자 통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나도 그렇고. 즐길 만큼 구경한 나는 그냥 물러났어. 이방인이잖아. 내가 끼어들 자리는 아냐. 그리고 우린 저들과 달리 아직 전쟁 중이잖아. 비록 밀리고는 있지만. 소련이 변수지. 어디까지 개입할지가 중요해.’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소련이 끼어드는 거. 아, 맞다. 아버님이 그러셨지.

‘당신도 아버님과 같은 생각이군요.’

‘달리 생각할 방도가 없잖아. 아, 만사가 귀찮군. 나에게 전쟁은 어울리지 않아.’

‘뭐, 따뜻한 꿀물이라도 드릴까요.’

‘아냐, 많이 마셨어. 밤새 화장실 들락 거릴거야.’

‘그래요, 저녁에는 참아야죠.’

‘그런데 답장은 써봤어.’

‘이번에는 당신이 해봐요. 글은 당신이잖아요.’

점례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지 뭐.’

유지가 흔쾌히 말했다.

‘내일 약속도 미뤘으니 오전에 써서 오후에 우체국에 가자. 가서 점심 먹고 오자.’

‘그래요. 근처에 성당도 가보고요.’

둘은 나란히 누웠다. 커다란 달이 창가에 비치고 있었다.

‘여보, 그런데 이번 소설은 잘 돼가요. 장편을 쓴다면서요?’

‘음, 좀 호흡이 길어. 그래도 써야지. 운명 같은 거야.’

‘어떤 내용이에요. 운명을 다 끌어들이고.’

‘아직은 비밀. 사실은 나도 잘 몰라. 어떻게 흘러갈지. 그냥 거칠게 써놓고 계속 고칠 생각이야. 세상이 변하면 글도 바뀌게 되니 완성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

‘그래요, 서두르지 말고 대작을 완성해 봐요. 기대가 커요. 내 이야기도 나오나요.’

유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망설였다.

‘나오는군요. 그렇죠?’

‘아닐 수도 있고.’

겨우 생각해 낸 말이었다. 그래서 딴전을 부렸다.

‘분명한 것은 당신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무조건 뺄 거야. 난 당신이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을 싫어하거든.’

‘그러지 말아요. 소설일 뿐이잖아요.’

‘그래도. 당신 이야기라고 생각되면 신중을 기할 게. 그래서 나쁠 게 없잖아.’

점례는 그가 나를 어떻게 표현할지 상상할 수 없었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경험이 들어간 것이니 진실과 아주 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점례는 유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지금 물어요. 나중에는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을지 몰라요.'

‘소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내자고.’

점례가 이어서 말을 할까 봐 유지가 미리 막아섰다.

몰래 보지 뭐, 점례가 삐진 듯이 말했다. 

'소설은 여기서 끝.'

유지가 선언하듯이 말했다.

‘그거 아니거든요. 편지 말인데요. 내 걱정은 붙들어 매고요. 결혼은 생각해 봤나요.’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내. 다 이야기된 거 아니었어. 아까 말이야. 또 그럴 거면 나 화낸다.’

정말로 화났다는 듯이 유지가 돌아누웠다.

그런 유지를 점례가 흔들었다.

‘이거는요. 아버님이 휴의나 동휴에 대해 물었잖아요.’

조금 뜸을 들였다가 점례가 다시 말했다.

‘거기에 대한 답장은 해드려야지요.’

유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새 잠이 들었리는 없었다. 그런데 그는 조용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다는 신호였다.

점례는 더 묻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은 것이 되레 다행이다. 무뚝뚝하게 대답하거나 그가 어, 그래. 그런데 당신 그 사람들 아는 사람이었어. 하고 물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괜한 것을 건드렸구나.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가 묻기도 전에 묻다니. 용희는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달은 컸다. 보름달인가. 시골 죽마을에서 보던 것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더 노랗고 붉은 기운마저 느껴졌다.

점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까 잠을 자서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청해 보았으나 불가능했다. 가볍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잠자리를 빠져나온 용희는 거실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다시 들어가 겉옷을 입었다. 문을 열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그리고 거실에 눌러 앉았다. 창틈으로 달빛이 서로 들어오려고 다투는 듯 보였다.

여기저기 걱정거리가 몰려 왔다. 그러지 말아야 할 것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귀찮게 했다. 그녀는 잊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달이 옥상을 비추고 있다. 거기에 젊은 여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다. 웃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약간 고개를 숙였으니 사색에 잠겨 있다고 봐야한다.

긴 생머리에 어깨가 작아 동양 여인으로 보인다. 창가에는 노란 침대가 있고 남자가 등을 거실 쪽으로 하고 누워 있다. 얼굴을 볼 수 없어 자고 있는지 그냥 누워 있는지 안색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다.

이불 위로 손이 나와 있다. 그 손은 이불에 수놓은 한 쌍의 학을 잡고 있다. 평온한 모습이다.

점례는 스케치를 마쳤다. 채색의 구상도 끝냈다. 가볍게 칠할 수채화 붓을 들고 그녀는 머릿속의 것을 꺼내 자신과 달과 유지를 한 장의 화폭에 담았다.

여기는 어딘가. 장소는 불분명하다. 일본인지 조선인지 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땡하고 한 번 종소리가 울리고 다시 두 번 더 울리고 잠잠해졌다.

새벽 세 시다. 숱하게 충돌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은 그대로 묻어두고 용희는 유지 옆에 다시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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