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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내용이 궁금했으나 점례는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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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내용이 궁금했으나 점례는 기다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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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대신에 임명됐다는 일본에서 온 편지는 유지가 답장을 보낸 지 한 달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편지를 먼저 본 것은 유지가 아닌 점례였다.

유지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점례는 그런 유지를 내버려 둔 채 아침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센강은 혼탁했으나 고요했다.

빠르지 않고 느리게 흘러갔다. 가로수의 낙엽이 한 두 개씩 땅에 떨어져 쌓였다. 나갈 때 보지 못했던 편지가 와 있었다. 문 간 우편물에 편지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둥지의 새가 무엇이 있나 궁금해하면서 부리를 들고 있는 것처럼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 온 것이구나. 아버님이 보내셨군.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런 예상을 하면서 손을 들이밀었고 알을 꺼내듯이 조심스럽게 손에 잡았다.

방금 어미 품속에서 있었던  것처럼 따뜻한 감촉이 맴돌았다. 내부대신이라는 글자가 먼저 눈에 띄었다. 점례는 참의원이 내무대신으로 임명됐다는 것을 알았다.

수상 다음에 높은 자리다. 엄청난 일이다. 점례는 마음이 급했다.

'여보, 일어나 봐요. 아버님이 보낸 편지예요. 내부대신 직인이 찍혀 있어요.'

유지는 킁, 하고 몸을 비틀었다. 눈은 뜨지 않고 내무대신? 하고 중얼거렸다.

'아버님이 보내신 거예요. 읽어 드릴까요. 아니, 아니 됐어. 당신이 읽고 나중에 말해줘요.'

유지가 더 자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불을 얼굴 위로 덮어썼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 게요.'

점례는 더 말하지 않았다. 고집 부릴 이유가 없었다. 술이 약한 그가 조금 과음한 것 같았다.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다. 피로를 풀어야 오후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점례는 유지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녀는 편지를 그의 머리맡에 두고 주방으로 나왔다. 속풀이 해장국을 준비하기로 했다. 조선에 있을 때 무교동으로 먹으로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걷는 길은 자신이 떠올랐다. 콧 노래가 나왔다.

유지는 선지가 들어간 국밥을 유난히 좋아했다. 다른 것도 먹을 게 많이 있었으나 무얼 먹을까요? 하고 물으면 언제나 대답은 국밥이었다.

'국밥, 조선 국밥이 최고야. 왜 일본에는 이런 게 없는 지 몰라.' 

그런 유지를 위해 오늘은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국밥을 만들 수는 없었다. 더구나 선지를 구하는 것은 난망했다. 그래서 그녀는 맑은 탕국을 끓이기로 했다.

소고기를 준비하고 마늘과 무를 곁들였다. 소금을 조금 치니 간이 맞았다. 유지가 깨기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편지 내용이 궁금했으나 참기로 했다. 자신이 쓴 편지에 대한 답장이 궁금했던 것이다. 유지는 답장을 점례에게 맡겼다.

'같이 쓰자면서요?'

'아냐 난, 다른 것 써야해. 부탁해 여보.'

그러면서 유지는 점례가 쓴 답장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오케이 이거면 아버지도 기뻐 하실 거야 하면서 자신이 직접 우체국에 가지고 가서 붙였다. 

그랬으니 점례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점례는 기다렸다. 유지가 먼저 읽고 나서 말해달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으나 아들 이름으로 온 편지를 점례는 뜯을 수 없었다.

'그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답장은 아들에게 한 것이니 내게 한 게 아냐.'

점례는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무대신은 유지에 속한 것이지 나에 속한 것은 아니다. 점례는 거실을 한바퀴 돌면서 그런 생각을 떨치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그림들을 하나씩 감상했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만족을 표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봐도 작품의 가치는 있었다. 그녀는 전쟁의 그림 대신 파리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유화를 주로 그렸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전쟁이었다. 삶이었고 죽음이었다. 잘려나간 팔다리는 실체였고 과거가 아닌 현실이었다. 어디든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를 점례는 잊지 않았다. 

이곳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어디서든 전쟁은 피할 수 없다. 파리가 해방된지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다.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더 빠르게 생명이 자라고 있다. 예술가들은 그것을 눈여겨 보았다. 

'사실 내 주제는 인간의 본성이예요. 내면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죠. 인간은 왜? 하는 원초적인 질문에서 벗어나기 힘들어요. 전쟁은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줘요.'

유지가 당신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냐고 말했을 때 점례는 이런 식으로 답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다, 나는 인간의 본성에 심취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고 해답을 구해야 하는 이유다.

'당신의 글 주제는요? 역시 인간이겠죠? 사랑인가, 증오인가? 무게중심의 차이일뿐 본질은 다르지 않을 거예요.'

답을 말해 놓고 질문을 한다고 유지가 뾰루뚱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작품의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을 탓할 수는 없다.

'맞아, 나도 당신의 그림 주제와 같아. 사랑과 전쟁, 전쟁과 평화 같은 어울리지 않은 것들로. 우습지? 왜 인간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까. 파괴를 하고 다시 복구하고, 다시 파괴를 반복하지.'

유지는 이 말을 하고 나서 다음말로 당신을 주인공으로 삼았어, 라고 말할지 말지 고민했다. 그는 글의 주제는 말했으나 주인공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알겠지. 그러나 사랑과 증오라는 그녀의 말은 딱 들어맞았다.

점례, 식민지 조선의 일본군 위안부. 그가 아내 역할을 하면서 때로는 비서요, 동지로 내 곁에 있다. 나는 진실을, 내가 보고 겪은 그 모든 것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을까.

점례가 그림으로 나를 표현하고 자신을 그렸듯이 나는 글로 나와 그녀를 기록할 것이다. 과연 그것은 가능할까.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유지는 착실하게 그 작업을 해나갔다.

작업 진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주제 역시 뭉뚱그렸다.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 점례가 자기 이야기를 보고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지금은 과거를 꺼낼 때가 아닌데,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 덧내는 것은 아닐까 유지는 걱정했으나 작가의 욕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우리 시대의 일은 누군가는 그려야 하고 또 누군가는 써야 해. 그 누군가가 내 옆에 있는 점례이고 또 나 자신이다. 유지는 숙취로 머리가 띵한 상태에서도 이렇게 자신을 정리해 나갔다.

'빨리 일어나야지, 몸을 추스려야지.'

그래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절대로 과음하지 않기로 했다.

과하면 다음날이 그냥 지나간다. 아까운 시간이다. 하루는 세상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 만큼 길고 길다. 원고로 치면 끊없이 인쇄할 수 있는 분량을 채울 수 있다.

그가 슬리퍼를 끌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달콤한 냄새, 추억의 냄새를 찾아 저절로 온 것이다. 알을 부화하는 새의 후각은 나무 사이에서 용케도 자기 집을 찾아내는 것처럼. 오늘은 내가 알을 품은 엄마가 된 기분이다.

'냄새가 좋아, 여기가 파리인지 조선의 무교동인지 모르겠군.'

유지가 너스레를 떨었다.

'여보, 일어났어요.'

'보면 몰라. 당신은 종종 뻔한 것을 물어.

'그것말고는 다른 불만은 없어요?'

'그게 다야. 그것이 불만이야.'

당신도 참, 점례가 혀를 내밀었다.

'내 뒤집어진 속을 좁 달래줄거지.'

'그러려고 국밥을 끓였어요. 시래기가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그런대로 먹을만 할 겁니다.'

용희가 자신의 음식에 대해 자신감을 나타냈다.

'내가 믿지. 당신은 훌룡한 요리사야. 그 어떤 프랑스 요리사보다 낫지. 내가 인정해.'

'그만해요. 그러다가 맛이 없으면 어쩔려고요.'

'아니야, 냄새는 맛을 알려주지. 이 냄새는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어.'

'손이나 씻고 오세요.'

유지는 할 일을 잊었으나 생각났다는 듯이 앉았던 탁자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점례의 말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유지는 지적해 주는 점례가 고마웠다. 부족한 것을 늘 채워준다. 식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유지는 감탄부터 했다.

그런 모습을 점례는 엄마의 모습으로 지켜 보았다. 대충 얼굴을 씻었으나 머리는 정리하지 못해 어수선했다. 사춘기 소년 같은 모습이다. 아침 식탁의 모차림새로는 나쁘지 않았다.

'이 모습 기억했다가 스케치해도 돼죠.'

점례가 물컵을 갖다 놓으면서 물었다. 유지가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미안, 미안 너무 배가 고파서.'

'아네요. 그 정도면 준수해요. 맛은 어때요?'

'그렇지 참 평가를 해야지. 여보 고마워.'

먹기도 전에 유지는 이렇게 말했다. 저 남자를 내가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어느 한구석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다. 입맛을 다지며 유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래, 이 맛이야.'

점례는 행복했다. 이 행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오래 가야 한다.

'그런데 여보, 편지에는 뭐라고 썼어?'

'아직 읽어 보지 않았어요.'

'왜, 얘기해 달라고 했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지는 개봉하지 않은 점례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당신 이름으로 온 거잖아요. 부자지간에 비밀 얘기도 있을 수 있고'?

'비밀, 하하 뭐 그런 게 있었나. 당신이 모르는 나의 비밀을 알아챈 거야.'

점례가 대답 대신 일어나 편지를 가져왔다.

'식사하고 읽어 볼래요.'

'아냐, 지금 보지 뭐. 아까 내무대신이라고 한 것 같은데. 맞지?'

봉투를 받아든 유지가 내부대신을 확인하고 맞네, 맞아 내무 대신이야. 우리 아버지가 수상 다음 자리에 올랐어하고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듯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껄껄 웃었다. 갑자기 부엌이 밝아졌다. 늦은 아침의 해가 창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축하해 여보. 전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버진 더 바쁘실 거야. 바로 답장을 쓰자. 그것이 효도지 효도가 따로 있나. 그래요, 여보. 그렇게 해요.'

'이번에도 답장은 당신 몫'? 

'그럴까요'? 

점례는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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