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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5 18:17 (목)
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그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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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그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4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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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가 무언가에 빠져들고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실체였다. 간혹 유곽에도 드나들었다. 그런 날에는 얼굴이 핼쑥해져서 돌아왔다. 용희는 그가 변하는 것이 계절만큼이나 뚜렷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아직은 용인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해 놓은 잣대를 넘지 않기 위해 말수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용희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실제로 모르는 것도 많이 있었다. 진료가 끝나면 그는 의사 모임을 핑계로 집을 나갔다. 그리고는 늦은 시각 들어왔다.

만취해서 이성을 잃는 경우는 없었으나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독립운동도 그 중 하나였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용희가 모르는 그 무엇인가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그냥 이대로 오늘같은 내일이면 된다.

용희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내버려 뒀다. 더 바랄 것도 없다. 무엇을 해도 자신감이 떨어졌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무력감이 더해졌다. 여기서 더 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용희의 생각이었다.

벌린 것이 있다면 거둬들이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말수는 새로운 일을 꾸미고 있다. 그가 그만의 새 인생을 살려고 작정한 것인가. 그럭저럭 아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인데 왜 자꾸 다른 것에 눈길을 돌리는지 용희는 말수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라고 해도 전적으로 그의 것만은 아니다. 그의 한쪽에는 내 인생도 있지 않은가. 더구나 우리에게는 아이도 있다. 말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잡고 애원하고 싶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니 더 깊숙이 들어가지 말았으면 했다. 그 속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낭패를 보면 회복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멈추어라.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한 번 더 넘어지면 일어날 용기가 없다. 남아 있는 것은 다 소진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거지에게만 유용한 것이다. 기타를 치다 용희는 그만 줄을 놓고 흐느꼈다.

이제는 내가 울 차례다. 그녀는 울면서 폐허 속에서 생존했던 그 때를 떠올렸다. 몸서리 처졌다. 상하이에 와서 처음으로 끄집어 낸 기억은 그녀는 괴롭혔다.

죽음은 사방에 있었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그녀는 울음을 멈추고 일어섰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내렸다.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위장에 도달하자 마음이 조금 차분해 졌다.

그 때와 비교해 보니 조금씩 마음의 위안이 찾아왔다. 아무리 나빠도 그 때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자 나의 불행이 나의 괴로움이 들기 쉬울 정도로 가볍게 느꼈졌다. 환구가 다가왔다.

'엄마, 어디 아파?'

'어, 그래 엄마가 조금 아파.'

'어디, 어디가?'

그가 작은 손으로 이마를 댔다.

'머리가 아니야.'

'그럼 어디야?'

용희는 두 손을 모아 가슴을 가리켰다.

'마음이 아파.'

'아빠 때문이야. 술먹어서 그렇지?'

'그런 것 아냐.'

'우리 아들,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까?'

용희는 환구의 손을 잡고 부엌으로 가려다 말고 밖으로 나왔다.

만두를 사줄 요량이었다. 바람이 불었고 하늘은 청명했다. 바깥공기는 용희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 놓았다. 그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한편 임정은 말수가 다녀간 후 그를 포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왔다. 완전히 우리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주석이 소매를 걷어 붙였다. 

신분이 확실하고 믿음직스러운 말수의 등장은 천군만마와 같은 것이었다. 주석은 그가 자신을 치료했던 의사라는 것을 젊은 사무원을 통해 들었다.

'전에 주석님을 치료한 조선 의사입니다. 사전에 연락이 온 것은 아니고요. 그 전에 포목점 주인에게서 말로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바로 그분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음.'

주석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기억할 만한 말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했어요.'

주석은 사무원을 물리고 나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려는 그를 잡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됐다. 그러나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는 말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첩보에 따르면 말수는 전선을 따라 다니며 일본군을 치료했다. 특히 상해에 특수 임무차 온 고급 장교가 부상당해 모두 죽을 것을 예상했으나 말수가 살려 냈다.

장교는 그 보답으로 그를 태평양 바다로 복귀시키지 않고 눌어 앉도록 서류를 꾸몄다. 그리고 병원 개업을 도왔다. 미복귀 이유로 부상을 핑계로 댔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덴노 훈장을 받는 것도 그 장교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도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개연성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포목점 주인에 따르면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 못 믿으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간다. 더구나 포목점 남자의 말은 그 말 자체가 신뢰와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주석은 그를 직접 만나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 위해 오래 대화하고 싶었다. 그 전에 그 인상을 한 번 보기로 했다. 치료 중에 받은 인상은 별로 기억에 없었다.

인상을 관찰하면서 나누는 대화는 그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주석은 그 사람의 얼굴은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얼굴도 보지 않고 큰 일을 시킨 경우가 없다. 주석은 이리 저리 이층 집무실을 옮겨 다니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일본이 기울고 있을 때 한시라도 빨리 조선에 독립군을 보내야 한다. 그래야 전후에 주도권을 쥘 수 있다. 미국에 전권을 내주지 않으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주석은 마음이 급했다. 휴의는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다. 약속한 훈련 기한이 끝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미군 측에서는 어떤 연락도 없다. 우리 쪽에서 상황을 알아 보고 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확인을 거부하고 있다.

답답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미군은 미군 나름대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휴의에 대한 행방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애초 그들은 휴의를 조선독립군에 넘길 의사가 전혀 없었다.

써먹기 위해 임정에 손을 벌렸던 것이 결국 이 사단이 나고 말았다. 미군은 첩자를 임정 주변에 배치했다. 휴의가 나타나면 체포할 요량이었다. 그들도 일이 틀어지고 있어 임정에 대한 반감이 일고 있었다.

그래서 일이 더 벌어지기 전에 사건을 덮거나 마무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휴의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임정이나 미군이나 모두 휴의의 행방을 찾고 있을 그 무렵 휴의는 중국 전역을 떠돌고 있었다.

바로 임정을 가기도 그렇고 아니 갈 수도 없어서 상하이 인근 도시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미군 특수부대 요원들이 임정을 감시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그는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미군이 자신을 잡기 위해 요원을 파견한 사실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러리라고 생각은 했다. 그 생각은 적중했다. 자신이 체포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임정에게도 큰 손실이다.

그래서 그는 잡히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임정과 끈을 대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무엇보다 궁금해하는 주석에게 살아 있고 잘 견뎌내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전갈을 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렵게 암호문을 보내는데 성공했다. 주석은 휴의의 안전을 확인하고 안심했으나 왜 돌아오지 않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할 수 없었다. 미군과의 관계가 틀어졌다면 앞으로 작전에도 상당한 애로가 있을 것이다.

주석은 미군 측의 오해를 풀면서 휴의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임정은 국민당 정부의 손을 빌렸다. 가운데서 중개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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