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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문을 열지 말아 달라고 말수는 하늘에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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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문을 열지 말아 달라고 말수는 하늘에 기도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2 15: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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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갑자기 다가왔다. 폐허에서 살아남은 생쥐처럼 생명은 쉼 없이 꿈틀거렸다.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먹이를 찾고 손에 잡은 것을 놓치 않았다.

쿵 쿵 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달리고 있다. 쉬지 않고 뜀박질이다. 넘어질 듯 위태롭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조심해, 애야. 환구야, 그러지 마.'

용희가 따라가서 잡았다. 아이는 뿌리쳤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애들은 저러고 크는 거야. 내버려 둬. 지치면 알아서 그만두겠지.'

말수가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품이 저런 것이다.

'다치면 당신 책임인 거 알죠.'

엄마의 목소리였다. 곽환구. 아이가 병원에 들어 오면서 식구사 세 명으로 늘었다. 용희는 바빳다. 저절로 크는 것이 아이가 아니었다. 돌봄이 필요했다.

아이는 장삿집보다 크고 넓은 병원을 제집처럼 아니 제집인 것이니 마음대로 활보했다. 다가온 생명은 쉬지 않고 울고 웃어댔다.

거실을, 이층으로 가는 계단을, 진료실 앞을 마구 흔들었다. 말수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그 모습을 용희는 바라보았다. 흐뭇했고 안심이 됐다. 무언가 사라졌던 것이 저절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다시 삶이 시작됐다. 휴일에는 셋이서 나란히 외출했다. 잘 차려 입고 시내를 돌다가 맛있는 것을 먹었다. 그리고 돌아오면 나른한 피곤함이 기분을 환기 시켰다.

창문을 열고 소독냄새를 빼고 걱정 어린 환자들의 눈망울을 지웠다. 그러고 나면 병원은 낙원이 됐다. 셋이 행복했고 비로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았다.

말수는 술이 줄었으나 아주 끊지는 않았다. 아편은 모르겠다. 용희앞에서 한 번도 흰 종이에 싼 갈색 가루를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흐리멍텅한 눈을 들낀 적도 없다.

그러나 용희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 번 들인 맛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 악마의 눈이 그를 위협할 지 모른다.

손을 잡았으면 끝까지 잡아야지 중도에서 놓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깡패처럼 하는 위협을 뿌리치기가 어렵다. 그 어려운 것을 말수는 견뎌내고 있다. 낭떨어지에서 밀어대는 상대의 힘을 뒷발로 버텨내고 있다.

먼지가 일고 있다. 돌덩이가 떨어지고 있다. 그도 알고 있다. 여기서 밀리면 떨어져서 죽는다는 것을.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걸 풀지 않으리라. 말수는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을 앞으로 계속 실천할지는 말수 자신도 알지 못했다.

포목점 집과는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진짜 형님으로 말수는 집주인을 대했다. 용희도 안 사람을 형님으로 부르면서 깍듯이 존대했다. 그러나 서로는 환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쩌다 실수로 나온 말이라도 금새 거둬 들였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말수는 세상의 지도가 어떤 식으로 그어질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의학서적 만큼이나 세계사 책도 열심히 읽었다.

과거를 알아야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말을 그이 가슴을 뛰게 했다. 전쟁이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도 그럴 것이다.

조선은 어떻게 될까. 전쟁도 하지 못하고 거저 나라를 뺏긴지 어언 30년이 넘었다. 오천 년 조선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기적적으로 기사회생해 명맥을 이를 것인가. 말도 뺏기고 이름도 뺏기고 정신도 뺏겼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배불뚝이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그의 눈은 더 작아졌다. 큰 얼굴에 작은 얼굴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두 눈의 크기가 짝짝이였다. 확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나 자세히 보면 오른 쪽 눈이 왼쪽 눈보다 더 크고 길었다.

말수는 그런 인상을 싫어했다. 싫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앞에서는 늘 조심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책 잡히지 않도록 했다. 나중에 모았다가 한꺼번에 쏟아낼지 모른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 불만을 해소할지 몰랐다.

형님, 동생 하지만 결정적인 일은 도모하지 않기로 만나는 순간마다 헤어지고 나오는 순간마다 맹세를 다짐했다. 뒤통수를 칠 상인가. 배신하고 또 배신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믿었을 때 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꾸 만나다 보니 어떤 때는 짝짝이가 아닌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래는 정상이었다가 급한 일이 생기는 그렇게 바뀌는 지도 몰랐다. 저런 상이라면 괜찮은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날도 있었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괜찮다고 주문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내 뱉은 말은 거칠고 직설적이었다. 빙빙 돌려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말수의 본능을 자극했다.

'일본놈들을 쓸어 버려야 해요. 임정이 직접 그 일을 하고, 누군가는 심부름을 해야 해요. 한 번 임정에 같이 가봅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돕던지 말던지 할 거 아니오?'

말수를 만난 어느 날 배불뚝이는 이렇게 말했다.

'가서 뭐 내가 할 일이 있어야지요. 환자가 있다면 모를까.'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선생도 알다시피 지금 임정은 곤란한 지경이오. 무엇보다 돈이 없소. 군인을 양성해야 하는데 그럴 자금이 없단 말이지요. 어려운 살림이란 말이외다. 자금이 필요해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보고 돈을 내라고. 임정에 발을 들여 놓으라고. 나를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어서 어떤 재미를 보려고. 

'선생도 조금 힘을 써봐요. 임정은 지금 한 푼이 아쉬운 상태요. 지난번 나는 권총 값을 지불했어요. 나중에 주석이 고맙다는 전갈을 사람을 시켜서 보냈어오. 잘했다 싶었지요.' 

말수는 뜨끔했다. 배불뚝이는 자신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나에게 사인을 보내고 있다. 못할 것도 없다. 재산을 다 주는 것도 아니다. 거기까지 가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는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선생, 돈이 있으면 기부를 해요.'

배불뚝이의 오른눈이 다시 작아졌다. 말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임정에 돈을 댄다는 것은 조선독립운동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내가 그럴자격이 있는가. 아직 나는 덜 정리됐다.

'왜놈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야지요. 누가 하겠어요. 다 같이 해야지요. 한 두 사람의 힘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러니 선생도 힘을 보태시오.'

맡겨놓은 돈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배불뚝이는 당당했다. 말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안 사람하고 상의도 해야 하고요. 아직 그것의 의미를, 나 자신의 중심을 잘 알지 못해요. 난 여기서 조선사람도 왜인도 되놈도 로스케도 양놈도 아니고 그냥 떠돌이처럼 살고 있어요.'

'아니, 아니 될 말이오. 주체가 있어야지. 당신은 조선인이오. 통영이 고향이라는 것 내가 다 알아요.'

배불뚝이는 좀처럼 물러갈 기세가 아니었다. 말수는 수술준비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빠져 나왔다.

'한 번 생각해 보시오.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지를요.'

말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신을 신었다.

누구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가. 그렇다. 내가 누구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는가. 누구 때문에 용희가 그렇게 욕을 봤던가. 누구 때문에 불임이 됐고 누구 때문에 고향땅을 떠났는가.

말수는 형님의 말을 곱씹었으나 전적으로 그를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일본총영사관 사람들과도 만나고 있다. 그들을 만나면 조선은 일본 때문에 근대화 됐다고 칭찬에 입이 마른다.

내선일체는 반드시 필요하고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것도 안다. 조선민은 일본인의 조상과 뿌리가 같고 일본민족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침을 튀겼던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

'덴노를 위해서 우리는 살고 또 죽어야지요.'

그런 말을 실제로 말수는 들었다. 술기운도 아니었다. 신문을 보다가 딱 던지고는 조선이 왜 일본 전쟁에 소극적이냐고 말수에게 따져 물었다. 더 많은 학도병이 나서야 한다고, 왜 그런지 아느냐고 바로 황국의 신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 뿐이 아니었다. 그는 간혹 임정의 움직임을 일본영사관 밀정에서 보고 하기도 했다. 수시로 임정이 사무실을 옮기는 것도 이같은 첩자들 때문이었다.

말수는 믿지 않았다. 믿음은 언제나 한쪽 방향인데 상황에 따라 반대쪽을 향하면 불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에게서 말수는 많은 정보를 얻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없는 것들을 주워 듣다 보면 나름대로 판단 근거도 나왔다. 진주만 습격으로 미군이 참전한 것은 일본의 뼈아쁜 실수라거나 소련을 태평양전쟁에 끌어 들이려는 노력은 일본에게는 신의 한 수라는 등 제법 놀랄만한 국제정세에 대한 견해도 내놓았다.

전황이 불리한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소련이 일본편에 서는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소련이 연합군에 들어가면 일본은 승산이 없다는 것이 포목점 집 주인의 판단이었다.

말수는 그와 만나면서 잊고 싶었던 전쟁에 다시 발을 들여 놓고 있었다. 후방에서 보는 전쟁은 그가 겪었던 것과는 달랐으나 이전의 아픈 상처를 되살려 놓고 있었다.

그 가운데 용희가 있었다. 말수는 인상을 썼다. 몸 전체에 화약냄새를 묻히고 허름한 막사에 쪼그리고 있는 용희를 다급하게 찾아갔던 그 순간은 머리를 쪼개서라고 기억에서 씻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아는데,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용희에게 그럴 수는 없다. 그녀가 겪은 고통은 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말수는 하늘을 보았다.

기도하고 싶었다. 그러지 말라고. 제발 용희를 과거에서 꺼내지 말고 동굴 깊은 곳에 영원히 잠들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해달라고. 열쇠는 오로지 하느님만 갖고 있다고.

'내게는 동굴의 문을 열 열쇠가 없어요. 신이여, 그러니 그것을 당신도 영원히 열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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