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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5-24 12:48 (금)
자신의 과거를 억지로 꺼내 학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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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과거를 억지로 꺼내 학대하기 시작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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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희는 가끔 우울했다. 그럴 때면 피아노를 쳤다. 기타를 만지작 거렸다. 무엇에 끌릴라치면 환자가 들어왔다. 심심하지 않았다. 우울했으나 심해지지 않는 이유였다.

환자들은 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픈 것이 낫기만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서렸다. 그럴수만 있다면 잘못된 것을 다 버리겠으니 오로지 건강하게만 해달라고 했다.

용희는 그런 환자들에게서 의지를 보았다. 그러다가 나은 환자가 같은 이유로 다시 찾아 올 때면 굳센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사람은 그런 것이다. 나도 그렇다.

용희는 병원 개업할 때를 생각했다. 환자가 들고 생활이 안정되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사치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병든 환자가 됐다가 완치됐다가 다시 환자가 되는 일이 반복됐다. 우울한 것도 그것의 일종이었다. 찾아 보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용희는 가끔 우울했다.

다 가졌어도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 허전한 것의 원인을 찾아야 메꾸고 그래야만이 가라 앉는 마음도 치유될 수 있었다. 아기에 대한 생각은 버렸다. 말수는 거기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 자신이 아버지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모를 일이다. 여러달이 지났다. 불쑥 말수가 말을 꺼냈다.

'그 입양건 말이야. 당신이 말했잖아. 아이 한 명 들여볼까. 당신 생각 변함 없는 거지?'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나온 그 말은 숨어 있던 게릴라의 출현처럼 용희를 놀라게 했다.그러나 놀라움은 잠시였다. 그 말 한마디에  용희는 다시 아기를 품에 품었다.

오물거리는 것을 등에 업고 얼르고 손을 잡고 동네를 걸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벌써 엄마가 되어 있었다.

'포목점 집 아들 말이지요?'

'세 살이라고 했나? 막내 아들이 어리고 귀엽잖아.'

'그 집에서 준대요?' 

'아직 몰라. 말은 안 했봤는데 진지하게 제의하면 받을지 모르겠어. 괜히 이야기 꺼냈다가 사이만 나빠질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술 김에 농담삼아 이 녀석 우리 아들 삼자, 내가 데리고 가지. 하고 말해 볼 참이야. 마침 오늘 저녁에 술 약속이 있거든.'

용희는 들떳다가 술이라는 말에 입양 이야기는 쏙 빼놓고 걱정부터 했다.

'여보, 요즘 술 너무 자주 마시는 것 아니에요. 그것도 많이.'

'걱정마, 내가 실수한 적 있어. 없잖아. 적당한 선에서 나는 끊고 맺거든.'

'그야 그렇지 만요.'

용희는 실수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한 번도 없다니요? 지난 번에 그 일을 잊었나요.'

용희는 울컥했다. 불과 보름 전의 일이다. 한 번 울기 시작한 말수는 계속 울었다. 다 큰 남자가 크게 울자 용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슬픔 속에서도 무언가를 재고 있었다. 그것은 어른의 울음이 주는 낭패감 때문이었다.

힘깨나 쓰는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맞아서 터진 꼴이었다.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수는 만취하면 곧잘 울었다. 그러면 용희는 그러지 말라고 했고 그러면 말수는 소리를 질렀다.

'신경 쓰지 마. 울음이 나와. 나보고 어쩌라고.'

그러면 용희는 우세요, 실컷 울어요하고 말했으나 그때처럼 같이 울지 못했다. 처음에 통했던 그 말은 이제는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울라고? 나보고 울라고.'

그가 충혈된 눈으로 용희를 노려봤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수류탄 파편이 터지는 것처럼 위험했다. 오늘 밤에는 다 잤다. 잘 수가 없다. 용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풀에 지쳐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무력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말수는 대들었고 시비를 걸었다. 가만히 있으면 가민히 있는다고 말리면 말린다고 손을 내저었다. 어쩌자고 저렇게 됐을까.

'여보 정신 차려요.'

'정신, 정신 이라고?' 내가 정신을 잃었으니 차리라고. 암 그래야지.'

그리고 나서 말수는 그녀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여보, 처음으로 제정신이 들었어. 미안해. 내가 정신 줄 놓았나 봐.'

이런 식으로 빈정거렸다. 다 술 때문이다. 술이 원수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가야 바다가 잠잠해 지듯이 마음 껏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나서야 말수는 쓰러졌다.

'미안해요, 당신의 깊은 맘 헤아리지 못해서.'

용희는 그런날이면 우울이 더 심해졌다. 아무 준비도 없는데 이런 벌어지고 있었다. 말수는 술을 통해 잊었던 과거를 하나씩 꺼내고 있다. 그래서 무엇을 하려는지 용희는 겁이 났다.

깨고 나면 말수는 미안했던지 진료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쳐박혀서 차트를 본다거나 의학서적을 뒤적였다. 차를 주면 거기 놓고 가라는 시늉을 했다.

'기타 연습 안해요?'

'시간이 있어야지. 그리고 내 취미도 아니야. 그것은 당신이 제일이지.'

그녀는 돌아 나왔다. 무사히 이 밤을 지낼 수 있을까. 오늘은 그렇다 쳐도 내일은 또 어떻게 하고.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용희는 포목점 집을 찾았다.

그리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말수가 이미 운을 띄운 뒤라 배불뚝이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이라는 조건을 걸고 안주인은 자신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애 아빠가 아직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오늘 선생님이 오시면 저녁에 애기해 볼께요.'

'오늘 저녁도 약속이 있나요?' 

모르셨어요? 애 아빠가 그러더라고요. 술상을 봐 놓으라고 의사 양반 온다고.이렇게 말하고 아침에 나갔어요.'

'그래요.'

용희는 그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가지고 있던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데 그 여자는 알고 있다. 남편의 일정을 나 보다 더 잘알고 있다.

용희는 다리에 힘이 빠졌다. 입술이 말라왔다. 그래도 힘을 냈다. 점심참에 잠깐 나왔으니 서둘러 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떼었다.

요새는 남편이 일주일에 두 세번은 포목집에 들른다. 거기서 끝나면 좋지만 다른 곳에서 또 술을 마시는 모양이다. 그런 날은 언제나 취해서 들어온다.

저러다 끝일이 날 것만 같다. 몸도 염려 된다. 당국에 불순불자로 체포될 지 모른다. 전쟁통에 허구헌날 술만 퍼마시니 잡아갈 이유는 많다. 용희는 끌려가는 말수가 뒤돌아 보는 무거운 표정을 상상했다.

'나, 막 감옥에서 탈출했어. 여보 날 어서 숨겨줘. 곧 체포될 거야.'

다음 날 새벽 말수가 부들부들 떨면서 거실에 엎어졌다. 다시 일어날 생각이 없다는 듯이 그대로 엎어져서는 겨우 말을 했다.

'여보 추워. 춥다고.'

두려움에 떨며 쓰러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용희를 향해 말수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빨리, 좀 더 빨리 움직일 수 없어?'

'알았어요. 이불을 가져올게요.'

빨리 빨리 가져오라고 고함 소리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용희의 등뒤를 때렸다. 이런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말수는 시간이 지날 수록 달라지고 있다.

용희가 이불을 가지고 왔을 때 말수는 쇼파에 앉아 손에 약봉지를 들고 있었다. 표정도 싹 바뀌어서 언제 화를 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디가 아픈가.

용희는 말수가 그것을 입에 넣을 때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의 분말 가루를 확인했다. 설마 아편인가. 이제 아편에 까지 손을 대고 있나. 용희는 소스라쳤다.

아편이라니. 내가 잘못 봤나. 그러나 용희는 그것이 아편일 거라고 아편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것을 먹고 나서 입맛을 크게 다셨기 때문이다. 얼굴은 찡거러지고 입가심을 위해 한 번 더 물을 들이켰다.

용희는 속에서 뻗쳐 나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았다.

말수는 아주 쓴 맛을 느낀 자만이 보이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황갈색과 강한 쓴맛, 토하게 하는 특이한 냄새 그것은 의료용 아편의 특징이었다. 용희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심장의 고동 소리는 자신은 물론 말수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요동쳤다.

그러나 모른 척 하려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잘되지 않았다. 말수가 봤다면 갑자기 빈혈이 일어나 쓰러지기 직전의 환자를 연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수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어서 약기운이 퍼져 고통대신 기쁨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초조함이 잔뜩 묻어났다. 갖고 온 이불을 말수의 어깨에 올려놓고 용희는 그 옆에 앉았다. 말수가 말했다.

'갈치구이가 먹고 싶어. 갈치구이.'

용희가 잠깐 말수를 쳐다봤다. 미쳐 대답할 새도 없었다.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왜 내 얼굴이 뭐가 묻었나? 못 볼 거라도 붙이고 다니는 술주정벵이가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화가 난거야. 그런 거야. 아니면 못들었어? 들었으면 대답해야지.'

'알았어요. 내일 준비할게요.'

'내일, 내일이라고 당장 가져와. 난 지금 먹고 싶어.'

'억지 부리지마요. 지금 이시각에 어디서 갈치를 가져온단 말이에요. 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에요.'

'어부, 어부 그래 당신은 어부가 아니야. 의사지, 의사. 그 잘란 의사 말이야. 뱃놈은 나야, 나 말수가 뱃놈이라고. 통영 뱃놈.'

그는 자신을 비하했다. 정신병에 든 사자처럼 자기 꼬리를 씹어 먹었다. 그 날카로운 이빨로 가슴을 찔렀고 동시에 용희를 겨냥했다. 숨이 막혔다. 턱 막혔다. 목에 가시가 박혔으니 밥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이제 생선을 먹을 거야. 마음껏 먹어야지. 못 먹을 이유가 없잖아.'

'그래요, 갈치구이 해 먹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다할 수 있어요.'

'다 할 수 있다고. 원하는 걸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래요.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말 만해요. 다 들어 줄게요.'

'잘난 체 그만해. 당신은 다 할 수 없어. 없다는 걸 알면서 왜 그래. 이래도 되는 거야. 어, 이래도 되느냐고?'

용희는 말수가 시비를 걸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비 말고 다른 게 뭐 있겠는가. 작정하고 싸우려는 그와 대화는 무의미했다. 이제 어쩌지. 어떻게 해하지.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머리도 그렇다. 용희는 온몸이 진공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것은 좋은 것이 아냐. 검은 연기가 가득 찬 거실에서 더 머물 수 없다.

잡혀갈 수 있다. 이 위험을 왜 자초하는가. 그는 예전의 말수로 돌아가고 있다. 갑판 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데 혼자 낄낄 웃고 조롱했던 뱃사람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운가. 왜 그런 천한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걸까. 자학이다. 말수는 고통을 왜 사서 하는가. 그런 식으로라도 보상을 받고 싶은가. 이미 받았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더 바랄 게 뭐가 있지?

말수가 옆으로 쓰러졌다. 약기운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그는 쓰러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숨을 쉴 때마다 반쯤 벗겨진 셔츠 사이로 비어져 나온 배가 불뚝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배불뚝이 남자를 닮아가고 있다. 여기서 깨져서는 안 된다. 어떻게 찾은 행복인가. 오래가야 한다.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물건이다. 난 그럴 자격이 있다.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용희는 다짐했다. 별수를 다 내서라도 말수를 되돌려야 한다. 뱃사람 말수가 아닌 전쟁통의 말수로, 의사인 말수로. 완전히 길을 잃고 쓰러지기 전에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지금 날 동정하는 거야. 네가 내 엄마는 아니잖아.'

말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용희는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같잖다 이거지. 꼴 보기 싫다 이거지. 나가 줄게. 내가 나가면 되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수는 손가락 하나 까닭하지 않았다. 

'여보,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알면서 왜 그러세요. 날 모르세요? 당신은 날 살렸어요. 그런데 지금 날 죽이려고 해요. 여보, 그러지 말아요. 난 당신과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그럴 권리가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있다고요. 알겠어요? 그럴 권리가 있다고요.'

말수의 눈이 흐려졌다. 입이 벌어지고 있다. 대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침이 흐른다. 아편의 기운이 깊게 퍼지고 있다. 뼛속까지 침투하고 있다. 어느 순간 쓰러진 몸이 벌떡 일어났다. 시체가 살아서 움직였다. 그러다가 다시 자빠졌다.

그 순간 용희는 독한 마음을 먹었다. 달리 처방할 것이 없었다. 오후 네 시만 되면 수면제를 타 먹여야 한다. 오후 환자는 많지 않다. 있으면 내가 보면 된다. 환자가 찾으면 감기 기운 때문에 자고 있다고 둘러대면 된다.

그렇다. 잠을 자면 나가지 못한다. 술을 먹지 못하고 아편과도 멀어진다. 언제부터 약을 먹었지. 용희는 중독상태가 아니기를 바랐다. 여기서 끊어야 한다.

극약처방이다.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렇지, 죽으면 만사 끝이다. 남편이 죽으면 나도 죽자. 먼지처럼 허공을 날다가 떨어지면 그만이다. 용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바보처럼 웃고 있던 말수가 혼잣말로 그러지 말라고 혀꼬부라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 없으면 난 죽은 사람이야.'

용희는 말수 옆에 나란히 누었다.

'나도 그래요, 여보. 당신이 없으면 그 순간 난 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여보, 죽지 마세요. 죽지 말라고요. 알았지요?'

용희는 말수의 손을 잡았다. 큼지막한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 넣었다. 그 손은 따뜻했다. 용희는 그렇게 그 옆에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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