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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3-01-28 19:58 (토)
말수는 지는 해를 따라 가는 그림자처럼 서서히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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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는 지는 해를 따라 가는 그림자처럼 서서히 변해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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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그림을 보러 가자고 했을까. 미술관에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땅에 엎어진 물과 같았다. 아쉬워한들 입속의 설탕물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말수는 그날 이후에도 전과 다름없었다. 다르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다를 것이다, 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차분하고 냉혹했으며 자기 일에 여전히 충실했다.

숙취를 이겨내고 수술을 무사히 끝냈고 환자가 없는 오후에는 피 묻은 시트를 세탁하는 것을 옆에서 도왔다. 용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열심히 방망이를 휘둘렀고 쥐어짰으며 발로 밟았다.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면서 분위기를 바꿔야 할 것을 예정된 것을 하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여보, 이것 좀 널어줘요. 팔 긴 당신이 힘쓸 차례에요.’

말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햇살 가득한 병원 뜰에 눈부시게 하얀 빨래를 긴빨을 이용해 가지런히 널었다. 새것에서는 피비린내가 없었다. 새것이 주는 상큼한 냄새가 말수의 코를 자극했다.

구겨진 것을 펴면서 말수는 냄새의 정체를 알기 위해 코를 비벼대는 강아지처럼 빨래에 코를 갖다 대기도 했다. 용희는 그런 말수의 행동을 어떤 낌새라고 찾아려는 듯이 유심히 살폈다.

작은 것 하나에도 변화된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내심은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자꾸 그런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그것은 어느 순간 두려움으로 변했다. 이전과 다른 말수의 어떤 것이 눈에 띈다면 용희는 겁을 먹을 것이다.

일상의 이 행복이 금가듯이 깨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어떻게 이룬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수십 번은 죽음의 사선을 넘었다. 십 초 후에는 죽을 운명에 처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는 살아났다.

말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불사신이 따로 없었다. 둘은 그렇게 살아서 지금 이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사진 한 장이 무어라고 쉽게 흔들릴 수 있을까. 그러나 용희는 말수의 가슴에 작은 틈이 생기고 크게 벌어질까 봐 노심초사했다.

큰 것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 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용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조심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말수는 그런 용희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듯이 나 아무렇지도 않다고 전보다 더 살갑게 대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 하는 일종의 시위였다.

걱정할 것이 따로 있지 나를 의심하느냐고, 말수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말수는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다. 아니 악했으나 만에 하나 있을 만한 사람으로 천성이 변했다. 그래서 악성이 천성으로 바뀐 드문 예가 말수였다.

이 경우는 조심해야 한다. 시기가 문제일 뿐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빠지면 나왔다고 해도 다시 빠지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것을 용희도 알고 말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순리가 아닌 반대로 자꾸 이끌려는 기운이 들어오면 말수는 발로 걷어찼다. 분위기는 좋지 않은 쪽으로 흐흐고 있다. 악마의 힘이 세지고 있다. 그러나 말수는 악의 손길을 무시했고 다가오면 세차게 뿌리쳤다.

결코 네 손은 잡지 않아.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말수는 눈을 부라리는 상대의 눈을 향해 맞서 부라렸다. 그런 날에는 기분전환을 위해 술을 먹었다. 과한 것은 아니지만 전보다는 주량도 늘었고 횟수도 늘었다.

포목점 집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가는 것 같았다. 친해져서가 아니었다. 신뢰감은 여전히 바닥이다. 그러함에도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가는 발걸음이었는데 가고 나면 오기를 잘했다고 늘 판단했다.

둘이 시내서 만나 술친구가 되기도 했고 아니면 일과가 끝난 저녁 병원에서 한잔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술이 아니었다.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새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터인가 말수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시가라고 손가락만 한 것을 들고 와서 입에 가득 넣고는 열심히 빨아댔다. 아이가 사탕을 먹듯이 황홀한 표정을 짓는 말수에게 그것이 그렇게 좋아요? 용희가 물었다.

'당신도 한 번 해봐요? 유한부인들 가운데 피우는 사람이 많아요. 지난번 의사 모임에 갔는데 거기 나온 여의사들과 남편과 함께 온 부인들 거의 다 시가를 잡고 있어요. 아, 참 이달 말일에 외과의사들 모임이 있어요. 선조각이라는 아, 왜 당신도 알잖아. 그 유명한 중식당 말이오. 거기서 모임이 있는데 당신도 같이 가지요. 우린 의사부부니 눈에 확 띌 거요. 거기서 누군가 한 대 주면 못한다고 피하지 말고 고맙다고 받으면 세련된 분위기가 더 좋아질 거요.'

말수는 말도 많아졌다. 말수가 어떤 식으로 유혹해도 거기에 말려들 생각이 없었다. 담배를 가까이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냄새조차도 싫은데 겨우 입에 들어갈 정도의 커다란 것을 입에 넣고 있는 것이 흉측해 보였다.

'난 빠질래요. 시가나 피는 모임이라면요.'

'아, 알면서 왜 그래요. 학술 모임이라고. 안 피면 그만이지 뭐.'

말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술과 담배는 어느새 말수의 기호품이 됐다. 환자에서 물러나면 시가를 잡았고 그렇다 보니 손에서 그것이 떠날 날이 없었다. 시가를 잡으면서 주량도 늘었다. 주말에는 취하게 마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취했다 싶으면 말수는 하지 않던 옛날이야기를 간혹 꺼내기도 했다. 꺼내기가 어렵지 꺼내고 나면 주절주절 말이 길게 늘어졌다. 이야기는 주로 노 저으면서 고기를 잡던 때였다.

망망대해서 비를 만나 귀항을 서두르는데 어찌나 고기가 많던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물을 당기는 어리석은 인간이 자기였다고 웃었다.

그만하고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은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그물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뒤집혀서 죽을 뻔한 기억도 꺼내 들었다. 고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쪽 부터 가라 앉고 있는데도 잡은 고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얘기를 하면서 마치 그물을 걷어 올리는 시늉을 하듯이 손을 뻗어 밧줄을 잡아당겼다. 붉은 얼굴이 더 붉어졌다. 용희가 끼어들 때라고 여기고 제때에 그렇게 된 것에 만족하면서 부드럽게 물었다.

'어떤 고기가 제일 맛있어요?'

'생선은 다 좋지. 그때는. 갈치도 그렇고 멸치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큰 놈과 작은 놈이네. 말린 조기는 맛이 기가 막히지.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해.'

'그럼 생선을 한 번 먹으러 가요. 옛날 추억도 새길 겸 해서.'

'아냐, 아냐. 내가 통영을 떠나 오면서 생선은 입에 대지 않는 걸 당신도 잘 않잖아. 고기한테 몹씁짓을 너무 많이 했어. 그것들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억지로 잡아다가 칼로 토막 내고 도려내고 그랬잖아. 속죄해야지.'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시구려.'

용희는 생선을 내심 기대했다가 어긋나자 조금 뾰로통한 기분이 됐다. 말수가 찾지 않으니 용희도 자연히 생선 반찬을 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한 번 생선 이야기가 나오자 용희는 먹고 싶은 욕구를 참기 어려웠다.

만두를 먹을 때도 돼지고기를 삶을 때도 나물을 볶을 때도 갈치구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것은 떠나지 않았다. 전에는 쉽게도 떨어져 나가더니 이제는 한 달이 지나도 갈치 냄새는 입가에서 서성거렸다. 갈치를 생각하면서 용희는 말수도 그럴까 생각했다.

사진 속의 자신을 쉽게 잊었던 말수가 갈치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감이 몰아쳤다. 한 번 빠지면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라면. 나처럼 오래 가지고 있다면. 갈치 냄새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왜 이렇게 오래갈까. 갈치 냄새는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용희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라고 여겼다. 생사가 경각에 달렸을 때는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지위도 있고 돈과 시간이 생기자 자신에게가 아닌 말수에게 어떤 변화가 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 생선을 찾을지 모른다. 입맛 어쩌고 하면서 갈치구이 먹을까 하고 먼저 생선꾸러미를 들고 올지 몰랐다. 말수는 서서히 아주 천천히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지는 해를 따라 어느 순간 다가온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말수는 변해가고 있었다. 술김이라고는 하지만 간혹 거친 말도 나왔고 무언가에 분노할 때는 예전에 보았던 살기 어린 눈이 번뜩이기도 했다.

'우리 입양을 하면 어떨까요.'

용희는 넌지시 그런 말을 꺼냈다.

'여보, 우리 아이 하나 데려다 키우면 어때요. 당신, 어린애들 좋아하잖아요.'

'애들은 당신이 더 좋아하면서. 지난번 포목점 집 아이들 보고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했잖아. 그런 즐거운 모습을 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아이를 대할 때면 당신은 꼭 엄마 같다니까.'

말수는 이렇게 받았다. 그것이 찬성인지 반대인지 용희는 몰라 답답했다.

'둘러 말하지 말고 예스, 노로 대답해 봐요.'

'글쎄, 당신만 좋다면 난 좋은데 한 번 더 생각해 봐요. 애를 데려오는 것은 자식으로 들이는 것인데 내가 과연 아빠가 될 자격이 있을까.'

말수는 용희를 쳐다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그 말은 네가 엄마 자격이 있느냐는 소리로 들렸다. 용희는 부끄러웠다. 깜짝 놀라는 대신 그럴게요. 그럴 자격이 내게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냐, 당신은 충분해. 세상에 당신보다 뛰어난 엄마는 없을 거야. 난 다만 당신이 아닌 내가 문제라는 거지.'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 말을 해요. 당신 답지 않아요.'

'이건 자신감하고는 다른 거야. 알잖아. 당신도. 우리에게 아들이나 딸이 생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야. 가족이 한 명 는 거잖아. 죽을 때까지.'

'알아요, 알아. 지금 당장이 아니라 한 번 생각해 본 거예요.'

이번에는 용희가 뒤로 빠졌다. 그러면서 말수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신의 몸을 한탄했다. 말수 몰래 용희는 임신 할 수 있는지 병원을 다니기도 했다. 어떤 날은 베이징까지 갔다 온 적이 있었다. 여의사 모임이 베이징에 열렸을 때 핑계를 대고 하루 일찍 도착해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다.

'난소가 아주 망가졌어요. 애기씨를 생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알아들어요?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일찍 혹사했어요.'

그러면서 의사가 용희를 쳐다봤는데 그렇게 함부로 굴리고 엄마가 되겠다고? 참으로 뻔뻔한 여자군 하는 눈초리였다. 용희는 고개를 숙였다.

'나 때문이 아니에요. 함부로 굴린 건 내가 아니에요. 조심하지 않은 건 그들이에요.'

용희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런 말이 머릿속에서 떠돌았다.

병원을 나왔을 때 용희는 서러웠다. 말수의 아이,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꿈은 깨졌다. 쫓길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상황이 바뀐 지금 용희는 자식을 낳고 싶다.

아직 시간은 있다. 용희는 틈나는 대로 해외 의학 서적을 뒤적이면서 자궁이 부서진 여자의 임신에 관한 논문이 있는지 열심히 뒤졌다. 불임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두 어 번 읽어 보면서 해답을 찾으려고 여간 애를 쓰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기꺼이 쓰고 싶었다.그러나 헛수고였다. 내 몸뚱이를 다 지켜본 내가 아는데 임신이라니. 용희는 체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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