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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따끈한 미술잡지를 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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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따끈한 미술잡지를 손에 들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1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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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에 도착한 그는 일단 한숨 잤다. 한숨이라고 했지만 한숨 아니었다. 그동안 자지 못한 것을 보충이라도 하듯이 자고 일어나니 하루가 지나갔다.

꼬박 그렇게 자고 났는데도 또 자고 싶었다. 하지만 휴의는 그러지 않았다. 꾸물거리기보다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훈련을 하는 듯이 좁은 방안으로 가볍게 뛰었다.

창문도 열었다. 작은 구멍 사이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무너진 것이 일어서는 듯했다. 갑자기 모든 피로가 순간에 물러나듯이 사라져 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엄마 품에서 막 자고 일어난 것처럼 거뜬했다.

몸의 개운은 정신을 또렷하게 했다. 명료한 머리 대신 뒷목이 조금 뻐근했다. 잘 때 베었던 개머리판에 눌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것 없이 정말로 좋았다. 상쾌해진 그는 일단 베게 대용으로 썼던 군장을 풀어헤쳤다.

안에 있는 것을 쏟아놓고 보니 산발한 여인의 머리칼처럼 방바닥이 가관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한동안 그냥 그대로 두고 챙겨온 것들을 하나씩 눈에 넣었다.

이것들은 다 필요한 것이구나. 특히 급하게 튀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여기 나온 물건들은 모두 쪼그라든 군장 속에 다시 들어가야 할 것들이었다. 그러자 군장과 물건을 따로 놓을 수는 없었다.

특히 기관총이나 수류탄은 항상 같이 다녀야 했다. 그래서 그는 꺼내 놓을 것을 다시 집어 넣었다. 군장을 꾸리고 나니 그게 그거였다. 양쪽 다 앞면인 동전을 던지고 앞면이 나왔다고 좋아하는 꼴이었다.

시덥지 않게 혼자 웃었다. 휴의는 그 모습을 풀지 않고 작은 손거울을 들었다. 반쯤은 웃고 다른 쪽은 무표정한 얼굴이 다가왔다. 이것이 내 모습이다. 휴의는 거울을 치웠다.

그리고는 비누칠을 해서 옷을 빨고 흙 묻은 군화는 칫솔 뒤쪽을 이용해 털어 내는데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했음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적다보니 금방 끝났다. 다시 할 일이 없는 한가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언제나 무엇이든 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한가한 사람이었을 때 휴의는 습관의 무서움을 알았다. 가만히 있는데도 휴식이라기보다는 약간의 불안이 몰려 왔던 것이다.

손에 잡든 발에 걸든 무엇이든 해야 했다. 몸이 아니면 머리라도 굴려야 한다. 우선은 임정을 찾는 일이다. 휴의는 그러나 아직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거리의 인파 속에 휩쓸리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은 곧 아직은 조심해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임정은 자신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알고 있을까. 훈련소를 탈출한 것을 알고 있을까. 이런저런 궁금증 때문에 주석은 노심초사 자신을 기다릴 것이다.

달력을 보면서 훈련 기간이 얼추 끝났다고 부관에게 소식을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는지도 모른다. 휴의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끈을 대기로 했다. 그것이 안전했다.

미군 특수부대가 탈영병의 뒤를 추적할 수 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은가. 당분간 노출을 피해야 한다. 굳이 나서서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 밀봉한 밀서를 임정에 전달하는 임무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맡아야 한다.

휴의의 안전을 확인한 주석은 은밀한 미소를 입가에 물고 조선총독부 폭파 작전의 디데이를 짤 것이다. 내가 굳이 주석을 만나지 않더라도 명령을 수행하면 된다.

문제는 보조 인력이었다. 혼자서는 임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다. 숨어서 나오는 누군가를 저격하는 일이라면 가능하다. 그러나 건물을 폭파하는 것은 다르다.

다이너마이트를 옮기는 것부터 시작해 선을 연결하고 타임어를 작동 시키는 일은 혼자서 하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적에게 노출될 수 가능성이 높다. 그런 경우 체포되거나 현장에서 사살이다.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이인 일조라면 하나는 방어를 치면서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짬은 생긴다. 휴의는 위험하더라도 형이라며 자신을 따랐던 조선족 청년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라면 믿을 만했다. 그러나 돈 벌어서 고향에 논 사겠다고 말하는 그 초롱초롱한 눈빛을 배반할 수 없었다. 미군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에게 왔다면 평생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

탈출하면서 그 몫의 수류탄과 삽탄된 탄창을 두고 나온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인접한 관물대를 쓰고 있어 휴의는 청년이 어디에 무엇을 두고 있는지 훤히 알았다.

어둠 속에서도 탄창을 잡을 수 있고 수류탄을 꺼낼 수 있었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탈출이 확인되고 개별 장비를 점검하는 와중에 청년의 것이 사라졌다면 그 청년은 분명 의심을 살 것이다.

더구나 같은 조선족이 아닌가. 그는 후회했으나 땅을 칠 정도는 아니었다. 되레 그를 남겨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청년이 미군으로 임무를 수행해 월급 외에도 위험수당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전쟁이 끝나고 아니 전쟁 중에 휴가라도 나가는 일이 있다면 모아 논 돈으로 논을 샀으면 좋겠다.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그 청년이 대신해주기를 바라자 휴의는 조금 신이 났다.

남의 일이지만 자신의 일 처럼 만족했다. 휴의가 중국 땅 어딘가에 박혀서 이런 생각에 빠졌을 때 또 다른 중국 땅 어딘가에서 용희는 말수와 함께 미술을 관람하고 있었다.

미술잡지를 보고 서양미술사를 읽었던 용희는 병원이 문 닫은 일요일 날 말수의 팔짱을 꼈다. 오랫 만에 하는 문화생활이었다. 용희는 조금 들떴다. 책 속의 그림을 한두 점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을 터이다.

말수는 아니었다. 용희가 보채니 한 번 가준다는 심사였다. 그는 미술보다는 포목점 주인과 연관된 독립운동에 관심이 부쩍 들어 있었다. 가는 발걸음 속에서 독립군동가들의 활약상이 채이고 채였다.

미술관은 제법 컸으나 유명한 서양미술은 보기 어려웠다. 대신 고대 중국미술이나 학생들이 그렸을 법한 조잡한 것들과 일본 미술이 몇 개 걸려 있었다. 관람객도 많지 않아 감상하기에는 좋았지만 기대했던 작품들이 없자 용희는 조금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말수가 그런 용희를 달래기 위해 미술관 열람실에 있는 미술잡지 한 권을 가져왔다. 11월 호였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따끈한 것이었다. 파리 미술을 한눈을 볼 수 있는 특집호여서 용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혹시나 점례가 있을까. 거기서도 눈에 띄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데 과연 점례는 그곳에 있을까. 용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가 조선 여류 화가가 그린 조선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영문으로 된 글을 용희는 빠르게 읽어 나갔다. 틀림없는 점례였다. 그녀는 읽다 말고 뒷장으로 넘겼다. 한 페이지에 사등 분 된 그림이 네 점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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