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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4 23:04 (수)
이 모든 선택은 휴의 자신이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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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선택은 휴의 자신이 한 것이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10 1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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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에 보자던 약속은 삼 일 후로 당겨졌다. 임정은 급하게 계획을 수정했다. 미군 특수부대는 여러 번 거절했던 조선독립군 폭파전문가 양성을 승인했다.

'장교급으로 똘똘한 녀석 한 명 급해 보내시오. 한 달 동안 무료 교육 시켜 드립니다.'

간단한 문장을 받아든 주석은 급하게 휴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머뭇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례하게 하루 전에 통보해서 이틀 후에 보내라니. 이런 경우는 드물어요.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 처지에 그런 것을 따질 게재가 아니라는 것을 동지도 이해해 주시라 믿어요.'

주석은 미안했던지 미군을 탓하면서 휴의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가 어떤 표정을 짓더라도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미군들은 우리보다도 성미가 더 급하다는 점만 알고 넘어갑시다. 휴 동지, 오랫동안 기다린 일이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는 할까요. 망설일 수 없었어요. 바로 오케이 했지요. 병원을 가기 전에 통보를 받았다면 좋았겠지만 어디 일이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던가요.'

주석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을 그르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닌 무언가 해냈다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한숨인 것을 휴의는 알았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휴 동지의 작전은 변경됐어요. 그렇게도 원할 때는 거절하더니 이렇게 간단하게 승인이 떨어지는군요. 우연이라고나 할까요.'

주석은 우연이라는 것을 꺼내 들기가 조금은 쑥쓰러웠던지 그 말을 하면서 조금 뜸을 들였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계획하지 않은 사건이 느닷없이 끼어드는 경우가 있다. 독자들도 그것을 이해할 것이다. 소설이라고 마구 편한 대로 쓴다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난징의 모처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만 믿으면 된다. 임정은 오래전부터 폭파전문가를 원했다. 건물 전체를 일거에 날려야 하는 순간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총독부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주석은 실패의 원인보다는 건물을 폭파하는 계획이었다면 성공했을까 하는 가정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것이 가능하냐고 신흥 무관을 통해 여러 차례 묻기도 했다.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다. 주석은 우리측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면서도 순식간에 적을 무력화시키는 파급력 있는 공격이 어떤 것이 있을지 그날 이후 고심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군의 요청이 날라왔다. 그것도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다. 생각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임정은 바로 휴의를 낙점했다. 신뢰할 수 있고 대범하면서도 이해력이 빠른 휴의를 대체할 독립군은 없었다.

한마디로 그 일에 제격인 사람이 휴의였다. 애초 임정은 휴의를 의사로 침투시켜 그곳 병원장의 신뢰를 얻도록 했다. 그런 다음, 다음 단계로 나가기는 전보다 쉬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첩보에 따르면 병원장은 폭파에 식견이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의 규모와 단단함에 따라 폭약의 양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 루트로 이같은 첩보를 임정이 입수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임정은 주석이 환자로 병원에 입원할 때부터 어느 정도 말수의 실체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를 직접 투입할 수 없다면 그에게서 이론과 실제를 배운 휴의를 내세우려던 계획은 예상보다 일찍 실현됐다. 작전의 안전성 면에서도 좋은 조건이었다. 말수는 포목점 주인보다 말이 적었고 어쩌다 하는 말도 신중했다.

주석이 새로운 임무를 명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런 곡절을 휴의가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순순히 따랐다.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자신이 적임자라는데 아니라고 손을 내저을 형편이 못됐다. 다만 미안한 것은 병원과의 약속을 깨는 일이었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 미행자가 없음을 확인한 휴의는 프랑스 조계지의 끝자락에 위치한 담벼락이 붉은 한 아담한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우선 급하게 전화를 한 통 해야 할 곳이 있었다. 바로 병원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 출근이 어렵다는 통보를 하기 위해서였다.

직접 가서 하고 싶었으나 웬일인지 휴의는 다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병원장이나 병원장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되레 그 반대였기 때문에 휴의는 미안했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나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장의 아내였다.

'안녕하세요. 어제 뵈었던 의사입니다. 급한 일이,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빠지면 안 될 급한 일 때문에 월요일 날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음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군요. 병원장에게는 이렇게만 전하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아래층에 계실지 모르지 잠시 기다려 주시면 바꿔드릴게요.'

'아니요. 아니, 됐습니다. 그냥 급한 개인 일 때문이라고만 전해 주시겠어요. 전화 통화하면 더 죄송할 것 같아서요.'

'네, 그렇군요.'

용희는 그렇군요라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상대도 그녀가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은 짧지 않고 길었다. 용희는 뛰는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수화기를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그런데, 혹시?'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아닙니다. 아네요. 제가 경성에 있을 때 뵙던 분이 아닌가 했어요. 착각입니다.'

'경성요? 저는 경성에서 산 적이 없어요. 시골에서 바로 일본유학을 떠났으니까요.'

'그렇군요.' 이번에는 휴의가 그렇군요를 따라하듯이 말했다.

'제가 잘못 봤습니다. 어쨌든 약속을 지키지 못해 거듭 죄송하고 병원장님께는 잘 말씀드리기를 부탁합니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전해 드리지요.'

이번에는 기다릴 것도 없었다. 동시에 수화기를 내려놨기 때문이다. 찰깍 소리는 휴의도 용희도 서로 들었다. 찰깍, 아니 철꺼덕이 맞았다. 철꺼덕, 휴의는 전화기를 놓고 돌아서면서 노리쇠를 전진했다 후퇴할 때 나는 바로 그 소리를 연상했다. 후련하지 못하고 답답했다.

휴의는 창가의 자리로 와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면서 누가 보면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답게 아주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의도적인 한가함과 여유로움이었다.

그는 손에 쥔 펜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시각 휴의는 용희가 했던 것과 같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볶고 서양식 의복에 세련된 말투를 하고 있어도 용희일지 모른다, 부분은 아니어도 전체로 보면 용희가 맞을 수도 있다.

조신한 행동으로 차를 식탁에 내려놓을 때 언뜻 보았던 얼굴 윤곽이 용희가 아니면 다른 누구란 말인가, 휴의는 차를 한 모금 꿀꺽 소리가 나게 마시면서 그녀가 용희라면 점례의 소식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쪽으로 생각의 끈을 잡아당겼다.

파리로 유학을 떠났어도 우편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지도 몰랐다. 느긋하고 나른한 오후였다. 그러나 그 순간은 이때까지 였다. 휴의는 용희와 점례에 할애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바로 내일 모처에서 미군 요원을 만나 특별한 장소에 입소해야 한다. 기한은 한 달이라고 했으나 보름 정도면 끝날 수도 있다. 휴의는 최대한 빨리 폭약에 대한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생각이 용희에서 점례로 다시 폭약으로 이어지자 가슴 밑바닥이 서서히 끓어 올라왔다. 요즘 들어 이런 증상은 수시로 휴의를 찾아왔다. 휴의는 눈을 감았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폭약이 정말로 터졌다. 온몸이 찢겨 허공으로 살점이 날아 다녔다. 피 묻은 건더기들이 가을날 고추잠자리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자리 날개를 잡아 뜯고 좋아라,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날개를 뜯긴 잠자리는 날개에 어깨 살점을 붙이고는 몇 번 퍼덕이다가 죽어 나갔다. 명줄이 좀 긴 잠자리는 날개 대신 꽁지가 잘린 경우였다.

자른 꽁지를 버리고 그 자리에 빳빳하게 마른 풀 줄기를 넣고 날리면 그것이 꼬리 역할을 하면서 서너 걸음 날아갔다. 그러나 더는 날지 못했다. 자기 꼬리가 아닌 남의 꼬리는 잠자리에게 필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온전한 내 날개를 가지고 있는가. 순간 휴의는 이런 물음과 마주했다.

어쩌자고 나는 거절하지 못했을까. 어쩌자고 나는 남보다 앞장서는 일을 할까. 나 말고도 대신 나갈 요원은 있을 것이다. 존경하는 주석의 말이라고 해도 명령은 아니었다.

다른 핑계를 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병원장과 약속한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고 버텼다면 주석도 한발 물러났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선택은 휴의 자신이 한 것이다. 그러니 후회는 없어야 한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쓰자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 좋은 세상은 조선독립이다. 그것을 하다 배에 가스를 가득 채우고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또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자신은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따지고 보면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조선팔도에 후방이 있었던가. 의병이나 의열단 열사의 죽음이나 조선의용대는 열악한 환경을 근근히 버텨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최상급 대우를 받고 있다. 영어를 조금 익혔다는 이유로, 주석의 신임을 받았다고 미군 특수부대의 일원이 되는 것은 정말로 특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휴의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조선총독부의 거대한 석조 건물이 자신이 설치한 폭약에 의해 연기와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다. 흰옷 입은 백성들의 환호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즉시 튀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처럼 숨을 쉴 수 있다.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질문을 반복할 시간이 없다. 어디에서 죽든 조선 땅이든 중국 땅이든 죽는 것은 매한가지 아니더냐. 휴의는 갑자기 비장해졌다.

젊음은 이런 것이다. 그의 피는 여전히 뜨거웠고 가슴은 요동쳤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해치우리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뒤를 잇자.

휴의는 이런 다짐을 했다. 마치 거사를 치르러 가는 대원처럼 각오를 새롭게 다지자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목구멍이 따갑고 목이 말라왔다.

그러나 마음은 조금 나아졌다. 미군을 만난다는 설레임도 일어났다. 새로운 것은 늘 흥분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코가 큰 양키들은 군 생활을 어떻게 하고 지휘체계는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보고 싶었다.

그들의 최신식 무기를 손에 쥐고 싶다. 휴의는 스스로에게 출동 명령을 내리고 태극기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은 다이너마이크를 안은채 사진기 앞에 섰다. 후레쉬 불빛이 착각하고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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