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희는 일요일 내내 초조했다. 안절부절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킬 정도였다. 상황에 따라 자주 변하는 사람이 아닌 용희가 이런 것은 어떤 큰 이유가 있었다.
어떤 것이 와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용희의 이런 태도는 뭔가가 그녀를 심하게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온 강한 타격이라기 보다는 마음 깊은 곳을 할퀴고 간 상처였다.
아니면 혈연과도 같은 어떤 치명적인 것, 남자가 아닌 여자인 것이 지녀야 하는 타고난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난 번 면접 본 의사가 체한 것처럼 자꾸 마음에 걸렸다.
'알고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내가 알고 있었다면 대체 그는 누구인가.'
용희는 이런 자문을 하면서 심장이 울리는 고동소리를 귀로 듣고 있었다.
보이차를 내오면서 슬쩍 본 그 인상이 자꾸 파리떼처럼 눈 앞에 어른 거렸다. 당시는 몰랐으나 그가 가고 나서 부지불식 간에 들었던 그 생각이 밤을 새고 나서도 여전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한 치 앞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 넓은 중국땅에서 용희가 알 만한 조선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세상이치였다. 그런데 어딘지 낯이 익은 듯 하고 목소리도 들어 본 적이 있는 남자.
'누구지?'
그녀는 이층의 자기 방을 나와 창밖으로 밖을 내다 보면서 가볍게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생각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문득 설마, 설마 그가. 그럴리 없다. 그가 여기 올 일이 있을까. 더구나 의사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닐 것이다. 잘못 봤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그렇게 부인할수록 용희는 자신이 본 사람이 휴의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사로잡혀 이제는 그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순간 든 생각은 휴의라면 나에게 낭패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이내 그렇다는 답을 내놨다. 그렇다 낭패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커다란 돌멩이다.
파문이 일 것이다. 어쩐다. 그가 맞다면 자신은 일요일 오후에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아니면 월요일 그가 출근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휴의라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마가 넓다. 긴 머리로 감췄다고 하지만 얼핏 본 관상은 큰 이마가 아니었다. 코도 오똑 하지 않았고 광대뼈가 들어갔다. 목소리도 사내 답지 못하고 조금 여성스럽다. 아닌 쪽으로 용희는 자꾸 남자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그러나 눈빛은 아니다. 그대로다. 이것마저 부인할 수는 없었다. 죽마을에서 봤던 바로 그 눈동자다. 그 눈동자, 그 눈빛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의문은 사라지고 확신만이 용희를 지배했다.
그러나 틈은 있었다. 내가 확신하는 만큼 그도 나를 확신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나처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치지도 않았다. 그저 고맙다고 찻잔을 들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처음 본 사람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뭐지? 이건.'
나와 달리 그는 알아보지 못했다. 용희는 종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용희가 완전히 평정심을 찾은 것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차분하자, 마음을 진정시키자며 자신을 위해 커피를 내렸다.
검고 뜨거운 것이 식기도 전에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용희는 목이 데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뜨끔했다. 한 대 세게 맞은 듯이 얼얼했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찻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내 일상은 왜 이런가.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녀는 분주히 거실을 서성였다. 잔이 조금 흘러 손등을 적셨다. 데일 정도는 아니어서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뭐가 걱정이지. 휴의라고 해도, 휴의가 나를 알아 봤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지? 용희는 문제가 아닌 쪽으로 주문을 계속 걸었다. 그러자 정말로 조금 진정이 됐다.
휴의가 아닐수도 있고 휴의라고 한들 말수에게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를 만큼 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속으로라야 누군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혼사가 오간 것도 아니다. 마음속으로는 좋아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괜히 마음을 졸였다. 그 사실을 설사 말수가 안다고 해도 나쁘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마을 사람을 만났다고, 조국에서 사람이 왔다고 되레 환영할 것이다.
애초 조금 있었던 불신도 사라질 것이고 서로 의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손을 잡고 흔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휴의였다. 내가 용희인 것을 알면 휴의는 지난 5년 동안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가 물으면 적당히 둘러대면 되고 묻지 않으면 그냥 저냥 넘어가도 된다. 용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정리되자 용희는 점례와 동휴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졌다.
그들은 살아 있을까. 조선에 있을까. 아니면 자신처럼 중국땅으로 건너왔을까. 고향이 그리워졌다. 의식적으로 떨쳐냈던 고향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부모님 그리고 어린 동생도 눈에 밟혔다.
그러나 용희를 애써 지웠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은 가족이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고향 따위는 잊자고 했다. 굳이 잊은 것을 되살릴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것이 과거에 있었다는 정도만 기억하자.
용희는 느긋하게 잔을 들었다. 식기 전이라 커피 특유의 신맛이 올라왔다. 용희는 그것을 즐겼다. 커피맛을 안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커피가 자신의 일상에서 조용히 파고 들어왔음을 느꼈다.
한편 독자들은 휴의가 어떻게 용희네 병원에 의사로 취직하게 됐는지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할 것이다. 포목점 집 주인의 소개라는 것과 조선에서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의사생활을 하다 불현듯 중국으로 건너와 황포군관학교를 다녔다는 것은 앞서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 휴의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국민당이 만든 중앙정치학교를 일년 남짓 다닌 정도였다. 인재양성기관인 이곳을 휴의는 임시정부의 소개로 들어갔다.
졸업하지 못한 것은 그가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석의 지시로 총독부 급습에 필요한 대장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경성의전 졸업도 사실과 달랐다. 그는 그 근처에 가보지도 않았다. 중국에 와서 잠깐동안 병원에서 시중을 들던 중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전부였다. 짧은 기간 이었으나 간단한 수술은 의사보다 나았고 증상에 따른 처방도 나름대로 내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어떤 직업에 임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해냈수 있는 실력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휴의는 열성이 대단한 인물이지 않은가. 그런 덕분에 면접도 무사히 통과했고 의사 노릇을 하는데 큰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가 됐다.
총독부 습격후 노량진에 숨어 살 때 그는 의사인 것을 숨겼다. 환자를 만나는 대신 많은 책을 읽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학식을 쌓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조선어학회 사람들과도 접촉했다. 그러면서 단순히 불의에 대한 젊은 피의 저항이라는 구조를 깨고 보다 근복적인 식민지 탈출의 이론적 근거를 하나씩 쌓았다.
불만을 터트리는 단순한 머리에서 문제 해결의 원인을 찾아 나가는 복잡한 과정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숨어서 나라를 찾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금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조선말을 할 수 없고 조선글을 쓸수 없고 조선이름도 빼앗겼다.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됐다. 자기 결정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흔들리던 휴의의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
세상이 바뀌어야한다. 그는 남들도 자신처럼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데 놀라기도 했고 힘이 됐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 둘 씩 늘어갔다. 일경에 쫓겨 지내던 반 년의 기간은 휴의에게 자신이 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게 해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화가 나서 혹은 누구의 지시로 그것도 아니면 먹고 살기 위해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신념은 이런 것이었고 정의는 바로 세워야 하는 가치였다. 휴의는 동료의 장사를 지내고 이것을 알았다.
한동안 방황을 끝내고 바로 상해로 돌아온 이유였다. 주석을 만나고 긴 시간동안 그는 조선에서 있었던 습격과 조선 민중의 동태를 상세히 보고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주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 이차 공격을 준비 중이오. 빠를수록 좋지만 서두르다가 실패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소. 그래서 말인데 휴 동지가 의사 생활을 좀 해야겠소.'
휴의가 고개를 들었다.
'시내 장터에 묵고 있지요. 포목점 점 말이오.'
'네, 그래요. 선생님이 주신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요. 그런데 이젠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내가 포목점 주인에게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겁니다. 상해서 이름난 외과의사가 운영하는 부부 병원인데 조선인이오. 대외적으로는 일본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독립운동에도 관심이 있다는 첩보가 있어요. 거기 가서 일단 그 사람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한 달 후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