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유지될 때 용희는 행복했다.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다. 내일도 오늘 같은 일만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그녀가 꿈꾸는 일과였고 지금까지는 그것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고 하는 일도 마음에 들었다. 늘 그렇듯이 그녀는 말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거칠고 사납기 그지없던 사내가 온순한 사람으로 돌아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멀미로 검은 물을 흘리며 고통 받던 사람들 앞에서 모욕하고 춤추었던 뱃사람의 기질은 어디에도 없었다. 무섭기만 했던 그가 행복의 원천이 될 줄은 용희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솟는 물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있다. 숱한 죽음의 문턱에서 생사를 같이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을 맹세 했지만 용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말수의 존재에 대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어떤 때는 쉬고 있는 공기와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마다 용희는 아이들처럼 코를 막고 숨을 쉬지 않으면서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곤 했다.
일 분을 넘기고 삼십 초가 더 지나면 용희는 손을 털고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더 견디기 어려운 순간까지 왔을 때도 용희는 산소는 없어도 좋으니 말수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다짐했다.
병원을 개업하고 시간이 흘러 이런저런 작은 일들이 없을 수야 없었지만 화가 났을 때도 말수는 좀처럼 용희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녀가 그것을 연상할 만한 어떤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의 그늘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당하게 내 인생의 중앙을 차지는 그는 내 드라마의 주연이었다. 그것이 용희는 고마웠다. 나에게 또다른 선택의 순간이 벼락처럼 달려온다고 해도 말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다 말수와 연관이 있었다. 용의는 그의 가슴과 어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말수는 용희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침착했다.
지옥을 견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영적인 힘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힘은 환자를 대할 때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어느 날 한꺼번에 두 명의 외상환자가 들어왔다.
차가 뒤 집어져서 운전사와 동승자가 실려온 것이다. 온몸이 피투성이여서 상처 부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보니 남자는 턱과 어깨를 심하게 다쳤고 여자는 팔과 발목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수는 그런 환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환자보다 자신을 먼저 안정시키고 우선 급한 부위부터 틀어막았다.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가면서 이리저리 왔다가 갔다 했다.
용희도 날세게 움직였다. 그가 말하기도 전에 나이프를 건네주었고 붕대를 감았다. 얼추 두 어 시간의 사투가 끝났다. 그야말로 녹초가 됐다. 마지막 남은 촛농까지 녹아내렸다.
둘은 기진맥진 상태였다. 그러나 말수는 지친 표정을 하거나 더는 손을 쓸 수 없다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되레 용희의 피묻은 손을 닦아 주면서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
'당신이 먼저 씻으세요.'
'아냐, 거울 한 번 봐, 어디서 흠씬 두둘겨 맞은 여자 같아.'
'정말요. 내가 어디가서 맞고 올 사람 처럼 보여요.'
'그렇다니까, 다른 날은 아니어도 지금은 그래. 그러니까 당신이 먼저 씻어.'
말수가 입술을 앞으로 내밀고 너그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루는 외과의사를 한 명 더 두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 때의 그 너그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정해 놓고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상의한 후 결정하겠다는 태도였다.
용희는 망설였다. 의사 한 명을 더 두는 것은 자리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비용과 연결됐다. 식구를 늘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직 다른 의사를 용희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고용 의사를 둘 만큼의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중한 말수가 꺼낸 말이니 새겨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일전의 그 일을 겪고 나니 용희도 마음이 흔들렸다.
하나의 환자가 퇴원하고 다른 환자가 들어오는 순서가 언제나 일정한 것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몰려올 때는 아무리 능숙한 말수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릴 때가 있다.
살릴 수 있는 환자를 놓치는 것이다. 용희는 서로 생각 좀 더 해보고 나서 결정하자고 했고 말수도 동의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용희는 벌써 한 명의 외과 의사가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무렵 포목점 집 주인이 팔을 다친 아들을 데리고 말수를 찾았다. 한참 만에 본지라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들은 팔이 부러져 석고로 감았는데 보름 정도는 있어야 뼈가 붙을 것이다. 그 사이 남자는 두 어 번 아들을 핑계로 병원을 방문했다.
하루는 그가 말했다.
'의사 선생, 의사 하나가 필요하지 않소. 듣자하니 일전에 두 명의 환자를 한꺼번에 살렸다면서요. 대단한 의사라고 이곳 한인촌에도 소문이 자자해요. 그러나 세 명이었다면 어쩔 뻔했소. 환자 하나는 죽었지 말입니다.'
말수는 남자의 입을 쳐다봤다. 다음 말이 궁금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괜찮은 의사 하나 소개할게요. 월급은 노동자보다 조금만 더 줘도 될 것 같고... 능수능란한 의사가 아니라 초보예요. 가르치면서 데리고 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겁니다. 단번에 선생처럼 그런 경지에 오를수는 없지만 조선에서 성실했다고 합디다.'
그가 말한 의사는 황포군관학교 동료의 조카라고 했다.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왜놈들 꼴 보기 싫다고 무작정 상해로 온 젊은이였다.
'한 번 만나보시지요. 지금 우리 집에서 숙식하고 있는데 본인도 어서 떠나고 싶어하고...아마 미안해서 겠지요. 수술을 해 본 경험이 제법 있기는 있는 모양 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말귀는 알아들을 것 같아요.'
말수가 뒷머리를 긁으며 즉답을 피하자 쓰고 안 쓰고는 의사선생 마음대로이니 한 번만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만나달라고 남자는 사정조로 말했다. 사실 말수는 당장에 오케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용희가 정해둔 다른 사람이 있을지 몰라 망설였던 것이다.
남자가 이렇게 까지 나오자 말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부관을 만날 때는 용희도 함께 했다. 말하자면 같이 면접을 본 것이다. 용희는 거절했으나 말수가 꼭 참석하라고 해서 차를 내온 핑계로 그대로 잠시 눌러앉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말수가 용희를 부른 것은 관상에 대한 그의 일종의 믿음 같은 것이 작용했다. 전장에서 숱한 사람의 얼굴을 봤던 말수는 관상과 생명과 신의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고 봤다.
과학까지는 아니어도 절반 이상은 관상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말수의 생각이었다. 젊은이가 떠나고 나서 말수는 용희가 어떤 말을 할지 기다렸다.
'그 정도는 무난해요. 배신할 관상은 아니고요. 더구나 남을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얼마나 성실히 병원 일을 할지는 조금 걱정이 들어요. 너무 열정적인 얼굴상이거든요.'
'그건 걱정말아. 보조 역할만 해주면 돼요. 간혹 내가 없을 때 오는 환자를 일단 살려만 놓고 보는 일이 중요하잖아. 그일 정도는 할 수 있게다 싶어. 그럼 사람을 보내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할까.'
용희는 마침 의사가 필요한 마당에 잘됐다 싶으면서도 선뜻 찬성할 수 없었다. 살림하는 여자의 벽이었다.
'내일이라고요? 안돼요. 너무 빨라요. 다음 주 월요일은 11월 첫날이니 월급을 계산하는 데도 편해요. 그리고 그 사람도 하루 이틀 정도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죠.'
'그래, 당신 말이 맞군.'
이렇게 해서 면접을 본 젊은 조선 청년은 말수의 병원에서 월급받는 외과의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