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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06:01 (금)
일어나지도 않은 사실을 유지는 언급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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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도 않은 사실을 유지는 언급할 수 없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03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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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기 위해 편지를 다시 읽었다. 아버지 전상서,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점례는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났다. 진짜 아버지, 나를 낳아준 아버지를 그동안 점례는 애써 기억에서 지웠다.

생전에 아버지를 보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다. 무덤조차 보지 않겠다. 막걸리 한 잔 따라 놓고 절하지도 않겠다. 그럴 자격이 없다. 점례는 철저히 떨어졌다.

그런데 아버지 전상서라니.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잊고 있던 아니 애써 그러려고 했던 잊혀진 한순간이 자신을 소에 달린 쟁기처럼 억지로 그곳으로 끌고 갔다.

주름진 얼굴의 아버지, 수확의 기쁨도 잠시 지주에게 거의 전부를 뺏긴 아버지는 그래도 이것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고마우냐고 웃었다. 그날 가족은 모여 앉아 흰 쌀밥을 먹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먹어보는 쌀밥이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그릇을 앞에 두고 아버지는 연신 먹어, 먹어봐 점례야 하고 재촉했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주재소에 끌려갔다. 죽마을 읍내서 열리는 소작쟁의에 참여했다 모진 고초를 당했다.

만신창이로 돌아온 아버지는 절망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십 년은 더 늙었다. 이마의 깊은 주름은 밭고랑보다 더 깊고 넓었다. 그 주름을 점례는 그린 적이 있었다. 그러다 자신도 너무 놀라 그만 종이를 찢어 버렸다.

아직 덜 마른 물감이 얼굴에 튀었다. 점례가 눈을 떴을 때 아버지는 근엄한 얼굴의 참의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멋진 옷과 값진 모자를 쓰고 세상을 호령하는 또 다른 아버지.

점례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진짜 아버지의 밭고랑처럼 무서웠다. 나의 아버지, 점례는 속 깊은 곳에서 달려드는 감정을 어찌해야 몰라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금세 추스렸다. 파도처럼 왔다가 금세 밀려나는 그까짓 감정에 자신을 오래 가두고 싶지 않았다. 슬펐다가 기뻣다가 이리 저리 쓸려다니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었다.

점례는 거침없이 그리듯이 그렇게 써 내려갔다. 점례가 편지를 마쳤을 때 유지는 여전히 책상위에 놓인 편지 주변을 서성였다. 그도 아버지 전상서로 시작했으나 한 줄을 써놓고는 더 내려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필체에 눈을 고정했다.

점례는 조심스럽게 유지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이번에는 크게 마음을 두지는 않았다. 어차피 둘 중의 하나를 보낼 것이고 아니면 둘을 혼합해서 다시 쓸 것이다.

하루 이틀 답장이 늦는다고 문제 될 것도 없다. 점례는 화구를 챙겼다. 그리고 자신이 쓴 편지를 유지에게 주었다. 크고 짙은 눈썹 사이로 예의 옅은 미소가 돋아났다.

'화랑에 나갈게요. 기다렸다 같이 갈까요.'

'아니, 난 좀 써야 할 게 많아. 당신은 글도 잘 쓰고 잽싸게 쓰고 난, 당신의 재주가 부러워.'

'글은 당신을 따라갈 수 없어요. 알잖아요. 당신은 일본 최고의 작가가 될 겁니다.'

점례가 의도적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유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 말을 하는 저 여자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내 편이다. 아버지는 아들과 나는 아버지와 멀어질 수 있어도 점례는 아니다.

유지는 먼 이국에서 점례에게 의지하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좁은 방안을 걸으면서 자신의 그런 감정을 오래도록 간직했다. 그러다가 더 늦기 전에 이 상황을 묘사했다.

그는 쓱쓱 써 내려갔다. 그랬다. 글은 유지였다. 점례보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비교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점례는 문장이 부족했다. 사람 심리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유지는 달랐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앞뒤 글이 매우 유려했다. 무엇보다 빨리 쓰는 재주가 있었다. 구보에 준하는 속보의 글쓰기였다. 그래도 어떤 사람이 하루를 숙고해 끄집어낸 문장보다도 나았다.

‘당신은 글을 써야 해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글입니다.’

점례는 유지가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이렇게 말했다. 유지도 알고 있었다. 그림보다는 글씨라고. 그는 편지에서 이것을 강조했다.

'아버지 저는 화가보다는 작가가 될 것 같아요. 점례의 화상으로 만족하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올 연말에는 책 한 권이 완성됩니다. 제목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나와 점례예요. 어때요? 근사한가요.'

유지는 여기까지 쓰다 그만두었다. 갑자기 휴의와 동휴라는 조선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휴의와 동휴를 아버지는 어찌 알았을까. 이들이 총독부 습격의 주인공들인가. 하나는 습격하고 하나는 방어한 묘한 관계. 어쩌면 이들의 존재를 점례가 알고 있지는 않을까.

유지의 상상은 엉뚱한 곳으로 마구 흘러갔다. 인사동 음식점에서 보았던 경찰이 그 중의 한 명은 아니었을까. 점례는 내가 자신을 보는 눈길을 알지 못했지만 나는 점례의 스쳐 지나가는 눈짓에서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표정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경찰이었던 상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 점례의 눈은 그를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상대가 알면 곤란한 입장인 것이 입가에 머물렀었다.

유지는 편지를 마무리했다. 꾸물거리면 더 쓰기 싫어질 것을 알기에 그는 쓰다만 편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길이를 재고는 서둘러 마무리했다.

그는 아버지와 대결을 피했다. 책임을 군부에게 돌리자는 이야기에 대한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한테 못되게 구는 자식이 아니다. 전쟁에 지면 분명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유지는 언급할 수 없었다.

전쟁을 잊었으나 일본이 진다는 생각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 이야기가 나오자 유지는 의도적으로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을 거울에서 보고는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단어이기에 발로 차버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의미에서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은 있는지 살펴보고 미심쩍은 부분은 들어냈다. 내가 그렇게 강조한 것을 너는 왜 모르니 같은 반문을 아버지에게 주는 것을 삼갔다.

전쟁은 물론 일본 내 정계 움직임에 대해서도 유지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화난 아이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신 자기의 이야기와 점례의 그림에 대해서만 길게 썼다.

'아버지 옥체를 보존하세요. 내년쯤 아니 내 후년쯤 일본을 방문할 겁니다. 그 전에 아버지가 파리에 한 번 오셔도 좋구요. 3년 전에 오셨던 파리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나쁠 게 없겠지요.

그때는 가능하면 어머니와 함께라면 좋겠어요. 어머니도 파리를 보고 싶어 하잖아요. 더 늙으시기 전에 여기 오시면 어머니 추억에도 깊은 인상이 남겠지요.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못난 아들 유지가. 1944.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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