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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10-03 23:38 (목)
잊고 싶은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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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은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0.28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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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정확히는 편지를 보고 나서 점례는 사색의 시간이 길어졌다.

동지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으로 유지가 나를 인정해 준다는 것과 그 이상을 은근히 원한 것인데 거기에 미치지 못한 데서 오는 좌절 같은 것이 혼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지는 자신을 위해 유지가 선택한 최고의 단어였다. 결코 자신이 유지의 부인이 될 수는 없었다. 그가 우리는 부부라고 말했다면 아니라고 부인했을 것이다.

'난 당신의 아내 될 자격이 없어요.'

그녀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동지라고 했다. 이는 충분히 받아들여도 하나도 아프지 않은 상처였다. 동지, 그것이 부부보다 더 질긴 인연 아닌가.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것이 부부라면 동지는 영원한 것이다. 유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간혹 의견 다툼이 있을 때도 유지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다.

네 과거를 알고 있다는 비열한 눈짓을 단 한 번도 점례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은 물론 막사 근처에도 그의 입밖으로 말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동지, 그렇다. 그는 나의 동지였다.

점례는 '우리사이'를 그렇게 정리해 두었다. 그러자 남는 것은 휴의와 동휴였다. 휴의는 유지 호사카가 채워주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은근히 치고 들어왔다.

그것은 설레는 것이었고 언제나 요동치는 감정이었다. 죽마을의 해변가에서 휴의는 그녀의 눈을 오랫동안 지켜 보았고 그녀 역시 그를 따라하는 것처럼 그렇게 했다.

거기서 더 나가기도 했고 어느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 모든 동작이 멈추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애인인가 그냥 친구인가. 점례는 확정짓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는 친구아닌 애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동지로 불러준 유지에 대해 조금은 덜 미안한 태도였다. 그런 휴의가 동휴에게 쫓기고 있다.

동휴는 어떤가. 한때 부모끼리 언약을 맺은 사이 아닌가. 그는 나를 원했지만 나는 휴의에게 온통 마음이 쏠려 있었다. 동휴는 그것이 불쾌했다. 겉으로는 동네 친구로 평온했으나 둘은 언제나 무언가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앞서가기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싸우는 숫사슴의 거대한 뿔이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돌격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친구가 적이 됐다.

점례는 자신도 그런데 그들의 운명 또한 기구한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생각은 다시 용희에게로 쏠렸다. 귀중한 물건을 숨겨둔 곳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그는 급하게 용희를 기억속에서 소환해 냈다.

경성역에서 헤어진 이후로 점례는 용희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나처럼 만나지 못했다면 용희는 여전히 전선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공장으로 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점례는 높은 굴뚝 아래서 일하는 용희보다는 자신이 한 때 있었던 군용 모포와 어둡고 침침한 작은 방에 있는 용희가 떠올라 깜짝 놀랐다.

순간 점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여전히 깊은 굴레 속에 있다면 과연 용희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나름대로 심지가 굳고 자존심도 있으면서 자기 길에 욕심이 많았던 용희가 아니었던가.

설마 잘못된 것은 아닐까. 용희는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용희는 결론 없는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점례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숱한 시간이 지났고 이제 잊어도 좋을 만한 상황에서 점례는 용희를 위해 신을 찾았다. 그를 도와달라고 간절히 두 손을 맞잡았다.

빛을 감추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방문을 잠그고 엎드렸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들켜도 좋았다. 일부러 조금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눈물을 흘리고 나자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점례는 일어섰다. 더 그렇게 있다가는 자신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기어 나올 수 없는 상황에 빠지기 전에 점례는 몸을 추스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화구를 챙겨 들고 점례는 검은 강변을 따라 화실로 향했다. 봄이 오자 강 주변에는 새싹이 돋았다.

거지들도 늘어났다. 배를 타고 유람하는 사람도 있었고 대낮인데도 깨어나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술주정뱅이들도 흔했다. 고요한 거리가 갑자기 수선스러웠다.

인상을 쓰면서 싸움을 걸어 보겠다는 자가 있었다. 뒤가 섬칫해 돌아보면 어린 애들 서너 명이 흠칫 놀라 다른 길로 접어 들었다. 소매치기들이었다. 낯선 풍경이었고 익숙한 것이었다.

점례는 그런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빠르게 지나쳤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런 이미지는 그가 작업할 때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점례는 또 하나의 작품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늘 보고 지나쳤던 것을 스케치했다. 하지만 연필의 방향은 이상한 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용희였다. 생머리를 하고 어떤 표정인지 모르는 용희가 백지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사진을 보고 그리는 듯 용희는 선명하게 점례의 눈앞에 앉아 있었다. 손이 떨렸다. 늙은 화가의 붓놀림처럼 화구 앞에서 손은 마구 떨렸고 칠은 자꾸 엇나갔다.

점례는 눈을 감았다. 잊고 싶은 것을 잊었다고 했는데 실상은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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