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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6:36 (금)
생사를 확인했고 행선지도 알았으니 조선땅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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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를 확인했고 행선지도 알았으니 조선땅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0.2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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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의 넋을 핑계로 여러 달 품였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 외에 다른 마음도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 미련하게 남아서 그를 잡아 두었던 점례에 대한 미련이었다.

그가 동지의 장사에 그토록 애착을 보인 것은 동지의 약속 때문이었으나 전부는 아니었다. 일정은 바뀔 수도 있었다. 나머지 오 프로 정도의 다른 이유는 구십 프로를 상쇄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점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한번 들자 휴의는 걷잡을 수 없는 파도에 놓인 작은 목선이었다. 크게 흔들렸고 상륙하지 않으면 침몰을 피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는 서둘렀다. 이미 자신에게는 면죄부를 줬으니 가슴을 칠 일은 아니었다. 조선독립을 부르짖다가 변절하는 친일파 같은 인물과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골치 아픈 일이었다.

스스로에게 휴의는 암시의 주문을 걸었다.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복잡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위험을 감지한 피신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정작 두려운 것은 점례를 보지 못할 거라는 의구심이었다. 순사들이 어두운 거리를 배회하는 자를 의심하기 직전에 그는 아지트로 스며들었다. 호랑이처럼 혼자 어슬렁거리는 짓을 멈추었을 때 그는 굴속의 토끼처럼 편안했다.

그가 들어간 곳에 부관은 없었다. 잘된 일이다. 오늘은 부관과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는 신도림에서 가까운 영등포시장 통의 작은 벌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공간은 협소했으나 이곳에 오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무엇보다 냄새가 그를 넉넉하게 품어 주었다. 채소 냄새와 과일이 썩어 가면서 내는 술 냄새 같은 것이 마치 고향집 같은 느낌이었다.

공장의 매연이 바람을 타고 올 때도 그 냄새조차 정겨웠다. 그는 상인들이 내는 호객 소리와 마차를 굴리면서 가는 힘찬 역동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늦은 저녁까지 휴의는 잠 못 이루고 있었다. 낮에 먹은 막걸리 잔의 기운도 그런 기분을 부채질했다. 사람이 없다면 자신에게라도 호소하고 싶은 그 무엇이 휴의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러지 못해 답답한 것도 아니었다. 휴의는 술을 더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려고 들어오기 전에 술 한 병을 더 사왔다.

그는 술을 앞에 놓고 한 시간 정도 그대로 있었다. 앉았다 누웠다 엎드렸다 하면서 저 술을 잔에 따라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딱히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안 먹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먹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안 달라질 것도 없었다. 먹으나 마나 그만이었던 것이다.

휴의는 그런 상태를 깨기 위해 보고 있던 술병을 한참 동안 더 들여다보다가 기어이 집어 들고는 대접에 따랐다. 그득 따르려다가 이러다가는 내일 일정을 소화하지 못할 거라는 판단 때문에 그만 멈추었다.

아직 그는 정신줄을 놓지 않고 있었다. 술 냄새가 훅, 하고 끼쳐왔다. 그는 요즘 들어 자주 자신의 진로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아직 자기 길을 정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하는 그런 식의 걱정이었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직업으로 독립운동이 그와 맞는지 불쑥불쑥 의문이 들었다. 깊은 산속 외딴집에서 사는 것 같은 삶에 회의가 왔다. 그는 그렇게 살더라도 열흘에 사나흘은 세상으로 나와야 했다.

삶은 가벼운 것이어서 언제까지나 숨어서 살 수는 없었다. 하늘의 별이나 산의 바위와 어울리기 전에 사람과 함께 있고 싶었다. 의심받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가야 한다.

한때는 군인이었다가 도망자였다가 독립군으로 총독부를 공격했다.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 시간은 그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는 벌인 일을 마무리하자는 데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당연히 끝장을 봐야 한다. 그것에 대해 자신은 물론 주변을 의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만두더라도 신상을 정리하고 그만두어야 한다. 그는 서너 달 머무르면서 조선인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대개는 체념하는 사람들이었다. 시키면 시키는데로 했다.

나라를 뺏겼든 그렇지 않든 그들의 삶은 큰 차이가 없었다. 하루 먹고 살기 힘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고 누가 임금이 되든 그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그보다는 적은 수였지만 민족이나 자존심 같은 것에 기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왜놈이 안 보이면 욕을 해댔다. 어떤 사람은 창씨 개명을 거부했다. 신사 참배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이 도움이 되지 않고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휴의가 몰래 숨죽여 지켜본 사람 가운데는 조선말을 지키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일본말 대신 조선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말을 공공연히 하면 잡혀갔기 때문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조선말을 말하고 조선 글을 써야 한다고 그것이 나라를 찾는 길이라며 주먹을 쥐었다.

전국에 흩어진 조선어를 한곳에 모아 사전을 만든다고도 했다. 휴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하는 운동만이 애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애국의 방법은 여러 가지 있었다.

자신처럼 총을 들고 하는 애국도 있었고 골방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왜놈들 욕하는 서민들도 애국자였다. 이들은 누가 시켜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자기 길을 가고 있었다.

휴의는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일본과도 한바탕 해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감을 때로는 잃었다. 너무 지쳤다. 고향 부모는 돌아가셨고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산소도 가보지 못하고 타향을 떠돌면서 그는 차츰 나약한 휴의가 돼가고 있었다. 자식 노릇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불쑥불쑥 찾아왔다. 그런 회한을 밤새도록 아프게 새겼다.

이런 때에 점례를 떠올린 것은 그에게 사라졌던 힘을 다시 주는 소고기 국과 같은 것이었다. 이른 아침 화구를 챙긴 그는 부관이 있는 노량진에 들러 청계천이나 충무로나 인사동을 돌다가 돌아오겠다고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고 혼자 길을 떠났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었다. 마포에서 곧장 서대문 쪽으로 가지 않고 용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산수 구경하는 사람처럼 그는 걸어 가면서 지리를 익혔다.

용산에서 서울역을 거쳐 남대문에서 점심을 먹을 요량이었다. 앞에서 검문을 하는 순사들이 보였다. 막무가내로 아무나 잡고 따지고 때렸다. 아무 잘못도 없이 빌고 또 빌면서 애원하는 그들이 처량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손짓 발짓하는 그들은 순사들의 놀림감이었다. 검문을  피한 휴의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총을 내려놓기에는 아직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는 불타는 분노를 삭이면서 그들의 눈을 피해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상처에 둔감해진 줄 알았는데 되레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저들에게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한다. 그들의 잘못을 알게 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저런 꼴을 보고도 참는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닌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조선호랑이처럼 밤세워 어슬렁거린 것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숨겨진 야수의 본능을 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점례를 만나든 못만나든 생사만이라도 확인이 되면 바로 상해로 출발하리라고 다짐했다.

휴의는 이번 생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망한 인생 얼마나 더 망가질까, 이런 극단적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봄기운은 따뜻했고 마음은 이유없이 한결 가라앉았다.

그런 마음으로 휴의는 충무로 부근을 서성거렸다. 밤과 같은 낮의 연속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여자의 주변이 바로 그곳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그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인사동까지 오게됐다. 그는 조선제일 화랑 앞으로 가려다 그만두고 화구를 거리에 내걸고 있는 인근의 다른 화랑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떠벌이 화랑 주인 덕분에 점례의 행방을 알았다. 우연한 기회에 얻어 들은 듣고 싶은 정보였다. 조선미술대전에서 일등상을 받은 점례가 참의원 아들과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는 것이다.

워낙 은밀히 이뤄진 것이라 다들 모르고 있었으나 최근에 제일화랑의 삼촌이 종로서에 끌려갔다 나오면서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는 것이다. 휴의는 깜짝 놀랐으나 붓을 고르고 나서 물감을 집어 들면서 그가 계속 말을 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였다.

'아, 글쎄 삼촌은 참의원 동생 아니오. 그 일 때문에 종로서가 경을 쳤지 뭐요. 그 조선인 서장도 헌병대사령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지요. 뭐, 다행인지 뭔지 서장은 아무 일 없이 곧 나왔고 서로 오해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잘 해결됐나 봐요.'

휴의는 말대꾸를 하지 않으면 화랑 주인이 입을 닫을 것 같은 기분이 들자 얼른 이렇게 받았다.

'종로서가 실수를 했군요.'

'맞아요. 삼촌의 신분을 모를 리 없는데 왜 연행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곳 화랑에 의심스러운 자가 들락거렸다는 첩보를 서가 받은 모양이에요. 성질 급한 서장이 급습을 하고 그 와중에 삼촌이 연행된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들락거렸다는 자는 잡혔나요.'

'왠 걸요. 그런 사실조차 없다고 삼촌이 버럭 고함을 치고 난리를 피자 실수를 인정하면서 바로 풀어줬나봐요. 난다 긴다 하는 종로서도 더는 물고 늘어질 수 없었지요. 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참의원 동생이라고 발로 책상을 걷어 찼으니까요. 전세가 역전된 것이지요. 다들 그 일로 서장 목이 날아갈 줄 알았는데 사령관이 총독부에 손을 써서 겨우 살아난 모양입니다.'

'헌병대사령부에 잡혀 갔다면서요? 그런데 사령관이 손을 썼다고요.'

'그래요. 둘은 앙숙이지만 큰 일을 위해 서로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지요. 서로 이용해 먹는다고나 할까요.'

'그렇군요. 신문에는 났나요?'

휴의는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물었다.

'한 줄도 안 났어요. 다만 점례와 그 아들이 파리 유학을 일년 정도 떠난다는 단신 기사가 난 적은 있었어요. 신문을 본 사람도 얼마 없었는데 화랑가에서는 소문이 다 퍼졌어요. 특별히 재능있는 인물이고 여자이고 조선인이니 파리 유학은 대단한 뉴스였지요.'

'그렇군요.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그 여자 집이 큰돈을 댈 만큼 부자인가요.'

'아니요. 그 여자는 부모도 없는지 집에서는 한 푼도 받지 못했나 봐요. 대신 참의원 아들이 전액 댄 모양입니다. 참, 참의원 아들이 조선 여자를 어떻게 만난 지 아세요?'

'휴의는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으나 큰 관심이 없다는 투로 글쎄요, 그걸 일반인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하고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화랑 주인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글쎄 전쟁터에서 만난다고 해요. 여자가 만주에서 그림을 팔다가 마침 시내로 출장 나온 일본군 장교를 만났는데 그게 바로 이번에 파리로 같이 유학 간 참의원 아들이었나 봐요.'

화랑 주인은 자신이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 대단한 인물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을 알고 나자 휴의는 단 하루도 조선 땅에 남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노량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로 정리할 것을 정리하기 시작하고 삼 일 후 기차를 타기로 마음을 정했다.

남아 있을수록 심란한 마음이 흔들릴 것이고 그것은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생사를 확인했고 행선지도 알았으니 남아 있는다고 해도 점례를 만날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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