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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10-05 21:46 (토)
참의원 집을 떠올린 동휴는 무턱대고 체포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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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원 집을 떠올린 동휴는 무턱대고 체포하기로 마음먹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0.20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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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휴는 사령관과 헤어지고 나서 곧바로 서로 향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발길은 남산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신사 참배의 기다란 계단이 마치 깊은 굴로 들어가는 출입문 처럼 보였다.

그는 그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일본의 승리를 위해서 기도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휴의를 잡다 문초하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에게는 일본의 승리도 중요했지만 그 보다는 휴의를 체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도무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녀석에게 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구겨도 여러번 구겨졌고 세워도 모자랄 자신의 위신이 깎여 나간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잡으면 반드시 사지를 찢어 죽이리라.'

이를 가는 소리가 뇌 속 깊숙이 박혀 들었다. 그는 부관도 돌려 보낸 채 홀로 신사를 거쳐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부서진 성곽의 잔해들 사이로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런 것이 다 뭐람.'

그는 워커발로 쓰러진 돌무더기를 밟고 일어섰다. 대일본 제국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이곳에서 불이나 지피고 있겠지. 적이 쳐들어 왔는데 어느 세월에 연기를 보고서 대비를 하느냐.

전화기를 들고 그는 인천에 파견나간 부하를 닥달하는 자신을 돌아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낙엽은 떨어졌고 남은 가지를 타고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윙윙 거렸다.

코트 깃을 세우고 동휴는 총독부 건물을 내려다 보았다. 석양을 받아 대리석의 흰빛이 슬쩍슬쩍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람했다. 저 늠름하게 서 있는 거대한 석조 건물 앞에 왜소한 기와집 몇 채가 눈치를 보듯이 한쪽에 비켜 서 있었다.

왕이라는 자가 준비는 하지 않고 주색잡기에 빠졌으니 나라를 잃는 게 당연하지. 그자가 아직도 조선 왕으로 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여전히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있겠지. 배를 곯고 밤낮 일해도 헐어빠진 옷과 짚신 따위를 신고 진창길을 헤매고 있겠지.

일본, 아 나의 조국. 동휴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이 날 듯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사령부 대원이 행여 놓칠새라 그 뒤를 따라 달려 내려갔다.

동휴는 늦은 저녁을 먹었다. 부하들은 퇴근했고 당직자 일부만이 동휴에게 인사를 하면서 다가왔다.

'서장님, 헌병대사령부에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동휴가 대답 대신 어떤 내용이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전해주겠다고 했으나 그쪽에서는 직접 말하겠다고 하면서 오면 전화달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래?'

동휴는 그렇게 말을 받고도 전화기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내가 놀다 왔으냐, 왜놈 사령관 놈아.

동휴는 속으로 사령관과 있었던 몇 시간 전을 떠올리면서 불쾌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놈이 뭔데 종로서장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개새끼.

동휴는 부하들이 사라지고 나자 이런 욕을 하면서 발을 굴렀다.

'어, 저리들 가 있어.'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움직이는 부하들은 없었다. 그들은 벌써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당직자가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사령관을 바꿔달라는 말도 하기 전에 야마모토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종로서장과 한잔하려고 찾았는데 어디 갔었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아쉽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사실대로 말했다. 둘러대고 뭐라고 할 기분이 아니었다.

'신사 참배하고 남산에 올랐다가 내려왔어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아니, 아니 별일 아니오. 그저 술 생각이 났던 참에 서장님이 생각나서 전화해 본 거요. 우리 낮에 했던 얘기 잊지 맙시다. 그렇다고 밤잠까지 설치지는 말고요.'

그쪽에서 먼저 전화 끊는 소리가 찰깍하고 나서야 동휴는 던지듯이 전화기를 집어 던졌다.

'개새끼.'

단순 술자리는 아닐 것이다. 할 말 다 해 놓고 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전화질이야. 화가 덜 풀린 그는 밥에 장국을 말아 먹으면서 대포 한잔을 걸쳤다.

이대로 잠을 잘 수 없을 듯했다. 오늘 밤은 자기 다 글렀다. 왜놈 자식에게 이런저런 지청구를 들었으니 글쎄 야간 순찰이나 돌아볼까.

그는 당직자 가운데 한 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날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행인들의 발걸음은 뚝 그쳤다. 그는 인사동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문득 점례를 떠올렸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일등상을 받은 점례를 왜 이제야 떠올렸는지 자신에게 빠가야로를 외치며 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래 맞아. 참의원이 그 집에 들렀었지. 그리고 그 집 아들이 태평양 전쟁에서 부상으로 돌아왔고 그 집 삼촌이 골동품상을 한다고 했지, 아마. 그럼 점례는 그 집 식모야 뭐야. 식솔이 아니라면 부상당한 아들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단 말인가.

화실의 불이 꺼져 있었다. 그 가운데 살림집을 겸한 가게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그 집 화실은 껌껌했고 모든 것이 닫혀 있었다.

한동안 동휴는 그 집 앞을 서성였다. 언젠가 술집에서 맞닥트린 것이 점례가 틀림없다는 생각을하자 휴의와 점례가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참의원은 뭐지? 동휴는 상상만으로는 이들의 관계를 파학할 수 없었다. 이른 새벽에 다시 오리라. 그리고 나오는 자는 일단 체포하고 보자.

그는 시나리오를 짰다. 참의원 집 일행을 잡아들이는 것은 종로서장의 권한 밖이었으나 근거를 대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수상한 자가 밤에 드나들었다거나 첩보에 따라 테러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둘러댈 수도 있었다. 요인의 집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라고 하면 충분히 먹혀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 발늦었다. 일본으로 갔던 점례와 유지는 일주일 전 쯤 화실에 들러 파리 유학에 필요한 짐을 챙겨 떠났다. 삼촌 혼자서 빈집을 지키기 적적해 골동품 가게서 소개받은 종업원 하나가 그 큰 집에 사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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